현경-효자효부 많아 마을마다 열녀비/
망운 목동리-조선시대 설치된 망운목장에서 유래/
운남 원하묘-인바위 전설 추억속으로/
해제 이성산-금광이 아직도 있을 것으로 추측
현경면
■모촌(양학1리) :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함평에 살던 모(牟)한용(선조때 인물)이 마을에 옮겨와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안군 고이도로 옮겨 갔지만 그의 성을 따서 붙였다는 설과 원래 맥촌(麥村)으로 불렸지만 마을에 학덕이 높은 유학자가 많았고, 이들이 한결같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국 중원의 중모(中牟)마을과 같다하여 모(牟)자를 빌어 모촌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유적유물 : 애일당무안박병학효행비, 효열부김해김씨비, 효열부남양홍씨비
■양학동(양학2리) : 마을 형태가 학의 형태를 닮았다하여 붙여졌다.
△유적유물 : 열녀밀양손씨비
■병곡(양학3리) : 청계면 도대리 소재 도대봉이 붓끝처럼 보여 차분하고 조용한 형태이며 마을의 사방이 병풍같이 둘러있어 병곡이라 불린다.
△유적유물 : 곽의원효자각
■신리(동산1리) : 마을이 새로 생겨 새말로 불리다가 신리(新里)로 개칭됐다.
△유적유물 : 효부윤운림행적비, 효열부파평윤씨효행비
■원동산(동산2리) : 마을 동쪽 산기슭에 위치했다하여 동산(東山)이라 불렀고, 동산의 발생지가 되어 원동산이라 부른다.
△솔대배미 전설 :천안전씨 7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후 마을 앞 논에 솔대를 세우고 잔치를 했다고 전해 온다.
△유물유적 : 열녀죽산안씨비
망운면
■목동(목동1리) : 조선시대 설치된 망운목장의 동쪽에 있다하여 목동(牧東)이라 불린다.
△유적유물 : 망운목장감목관선정비(10기)
■목남(목동1리) : 조선시대 설치된 망운목장 남쪽에 있다하여 목남(牧南)이라 불린다.
■주교(목동2리) : 망운 동쪽 마을로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마을 앞이 바다여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하여‘배달이’혹은‘舟橋’로 불르기도 했다.
■압창(목동2리) : 옛날에 마을 앞까지 갈매기 떼가 많이 모여들어 압창(鴨唱)이라 했으나 현재는 압창(押倉)으로 한자를 달리 표현해 부르고 있다.
■해동(목동2리) : 지형이 울퉁불퉁하여‘밤까시’라 불리기도 하고, 또 바다와 인접한 갯마을이란 뜻해서 해동(海洞)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바다의 동쪽의 뜻을 지닌 해동(海東)으로 불린다.
운남면
■두곡(하묘1리) :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고잔면에 속해 첫머리라하여‘머리실’로 부르다가 6,25이후 운남면의 첫마을로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두곡(頭谷)이라 불렀다.
△유적유물 : 지석묘(마을입구 3기, 배나무정 4기), 도요지(일제시대 백자를 구웠다)
■둔전(하묘2리) : 이조 중엽에는 금산(錦山)으로 불렀으나 이후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와우정(臥牛亭) 혹은 구스통(들생), 장오래(쇠고예)라 부르다 지금은 둔전(芚田)이라 부른다.
△유적유물 : 광산김씨열부비
■팔학(하묘3리) : 마을 앞은 학의 목, 마을 중앙은 몸통, 마을 동서주변은 날개 모양으로 되어 있다 또 영광군 고잔면에 속해 있을 때는 8마리의 학이 날아와 산다하여 팔학곡(八鶴谷)이라 부르다 망운면으로 편입되면서 팔학동이라 부른다.
△유물유적 : 지석묘(마을입구 5기)
■원하묘(하묘4리) : 하(荷)란 물에 사는 연꽃과 식물로 예전에 마을모습이 연을 닮았다하여 하묘(荷苗)라 부르다 하가 물이 좋다하여 으뜸 원(元)자를 합하여 원하묘라고 부른다.
△인바위 전설 : 압해면 고리 왕산에 적왕이란 3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통신수단으로 성을 쌓아 고이리 왕산, 원하묘 조산, 망운면 조산과 연계했다. 3형제는 자기의 지위를 상징하는 인장을 연리 연동의 뒷바위, 둔전의 와우정바위, 망운면 두모와 장제 사이의 바위밑에 숨겨 두고 도망갔다는 인바위 전설이 있다.
■신촌(하묘4리) : 물이 풍부한 마을이라 하여‘새몰’이라 부르다가 동네옆 하늘골과 합하여 새로 생긴마을이라하여 신촌(新村)이라 부르고 있다.
△유물유적 : 지석묘 15기
해제면
■오류(유월1리) : 오류마을이 이루어 질 당시 마을 동쪽에 수양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무성히 자라고 있어서 오류라고 불렀다.
△전설 : 월암(마을뒷편에 5개의 반달모양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이 마을이름을 월암이라 부르면 마을에 귀인과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유적유물 : 전주이씨 삼강문
■창등(유월1리) : 어음동의 동남쪽에 위치. 창등마을은 이성산이 둘러쳐 있고, 마을 앞에는 바다가 접안되어 있다. 이 때문에 옛부터 운송수단이 편리해 해제면내의 세금을 보관하였던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등이라 부르게 됐다.
또한 이성산은 해제에서 두 번째 높은 산으로 일제시대 때 금광이 개설되었으며, 해방후에도 강원도 삼중광업소에서 10Kg정도 채취해 갈 만큼 이성산 일대에는 지금도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유물유적 : 이성산봉수(현재 터만 남았음)
■용산(유월2리) : 오류마을 동쪽에 자리한 용산마을은 바다와 인접한 곳으로 농토와 야산이 많지만 마을 형성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의 동편에 인접한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떨어 졌던 산이 있다는 설에 의해 용산(龍山)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사그점’이라는 지명과 마을 뒤편에‘가마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도요지(陶窯址, 용골 산 구릉상에 위치)
■물암(유월3리) : 마을이 이루어 질 당시 북쪽은 당난구지(唐難求地), 남쪽은 일근(一根) 또는 한뿌리라 불렀지만 한뿌리의 바닷가에는 높이 2m, 둘레 6m 정도되는 바위가 있고, 이 바위 이름을 따서 물바위로 불러오다 1910년 물암(勿岩)으로 개칭했다.
■유투(유월3리) : 유투마을은 마을형성 당시부터 마을 좌우로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버드나무촌으로 불릴 만큼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유투라는 지명에는 2가지 설이 있다.
주민들이 버드나무 사이에 우물을 팠는데 물이 많고 물맛이 좋아 우물정(井)자를 붙여 유투정(柳投井) 이라 부르다가 유투로 부르게 됐다는 설과 마을 서편에 앵소유지라는 묘지가 있었는데 꾀꼬리들이 버드나무 가지를 물고 오다 이 마을에 떨어 뜨려 버드나무가 무성하다하여 유투정(柳投亭)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다.
첫댓글 아이구, 무안소녀! 대단히 공부 많이 했구먼요. 우리 고향에 유래에 대해서 자주자주....감사! 어디 책에 있었당가아? 좀더 많이 부탁해유 ㅎㅎㅎㅎ
아이고 우리동네도 나왔네요 ... 압창이 그립네요.소녀슨상 고마워요...
압창... 저거 제가 쓴거 아닌데요~ ㅡㅡㅋ ㅋㅋ 무안신문사엔 ... 무안군사랑, 마을유래지랑.. 그런거 목포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복사를 휘리릭...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