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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 태양촌(안동마을) 안병렬교수 & 박진관기자 정리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올해 고희를 넘겼는데 한국에 있다면 아마 친구들과 어울려 매일 기원에 가든지 등산이나 하며 소일하겠지요. 아니면 젊은이들 밥그릇 빼앗아가며 대학교 시간강사 자리를 기웃거릴텐데 중국의 100대 대학에 들어가는 대학교에서 아직까지 저를 학부장으로 필요로 하니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2006년 말 겨울방학을 맞아 만주벌판에서 대구에 온 안병렬 연변과학기술대 동양어학부장의 말이다. 그는 2001년 안동대 인문대 학장으로 재직하던 중 정년을 3년 남겨두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20년 이상 봉직했던 대학에 홀연히 사표를 냈다. 그 후 바로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가 연변에 남기로 작정한 계기는 1999년 안식년을 맞아 1년 간 연변대 조문학부 교환교수로 있을 당시 연변의 동포 청소년들을 위해 여생을 바칠만한 소중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이다. 슬하의 세 자녀는 모두 자립했다. 그는 2001년 가을 연변과기대 한국어학과로 옮겨 부인과 함께 8년째 중국생활을 하고 있다. "연변의 한 조선족중학교 학생 50명을 조사해 봤더니 부모 둘 다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23명이고, 편부나 편모슬하에 자라는 아이들이 25명입디다. 부모와 같이 사는 학생은 겨우 2명밖에 없더군요. 어른들은 다 외국으로 돈 벌러 떠나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요. 그걸 보고 마음편히 한국으로 올 수 없습디다. 중국 동포가 겪은 고난의 역사는 우리민족 공동의 책임이다. 그들은 나라가 힘이 없어 망해버렸을 때 고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선조의 후손들이다. 아직도 그들은 재미동포나 재일동포처럼 한국을 맘대로 들락날락 못한다. 그가 펴낸 수필집 '연변에의 아가'와 '동토가 아니에요 꽃이 핍디다' '사랑을 팝니다'등에는 연변과 중국 동포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묻어있다. 그는 안동대에 재직할 때까지만 해도 고서를 뒤적이며 논문을 쓰던 전형적인 국문학자였으나, 연변에 와서부터 수필, 기행문, 칼럼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동토가 아니에요 꽃이 핍디다'는 길림신문에 6개월간 연재되기도 했다. 그는 여름방학엔 웬만해선 귀국하지 않고 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비롯 고구려, 발해 등의 유적지와 항일전적지를 답사하며 부지런히 글을 쓴다. 2003년 발간한'연변의 안동마을'이란 수기는 그가 발품을 팔아 최초로 찾아낸 연변 속 경상도 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고향방문이 평생소원이었던 이 마을의 동포 노인 10명을 한국의 지인들과 어렵게 연결, 무상으로 7박8일간의 고향여행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안 교수의 강의는 항상 열정에 넘치지만 대학생들에게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매년 빠짐없이 5.1절 연휴가 되면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선조를 찾는 '족보 리포트'를 낸다. 이는 은연중 그들의 뿌리와 핏줄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또 학생들에게 예절교육을 엄격히 시킨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복도에서 교수를 만나도 인사를 잘 하지 않는데 안 교수 앞에선 어림없다. 조선족, 한족 구별 없이 안 교수 앞에서 깍듯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가 연변대에 재직할 당시 이 대학 조문학부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가장 예의바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의 꼬장꼬장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경상도 촌로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김호웅 연변대 조문학부 교수는 그를 '무뚝뚝하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남몰래 도움을 주는 분'으로 평가한다. 일 예로 연변과기대 학생들의 동아리 모임에 초대받으면 꼬박꼬박 참석해 학생들을 격려한 뒤 냉면 값을 내어놓고 자리를 뜬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빠듯한 연금생활자다. 연변과기대의 월급은 그야말로 쥐꼬리 봉급이다. 연변과기대 동양어학부장의 한 달 월급은 2천위엔(한국 돈 2십6만원정도)이 채 안된다. 집세와 교통비, 통신료, 식비를 빼고 나면 적자다. 연변의 물가가 아무리 한국보다 싸다고 해도 그 돈으론 중국생활이 힘들다. 그럼에도 그는 또 다른 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일 역시 밑 빠진 독과 같아 돈 들어가는 게 끝이 없다. 그는 안동대에서 받은 퇴직금을 쏟아 부어 2001년부터 연길시에서 한글독서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일엔 그의 친구 정옥동 연변대학교 복지병원 이사장도 거들고 있다. 지금 실질적인 운영을 맡고 있는 사람은 연변의 퇴직공무원 출신인 조권옥씨다. 중국법상 한국인이 대표를 맡을 순 없다. 그는 후원자일 뿐이다. 연길시 공원조선족소학교 정문 앞에 있는 조선문독서사는 연길시의 유일한 사립 한글도서관이다. 허름한 5층 아파트의 1층 두 채를 연결해 쓰고 있는 이 한글도서관은 66평 규모로 약 2만권의 책이 있다. 오래된 책이 많고 책걸상도 보잘 것 없다. 그러나 동포 청소년들에게 독서사는 오아시스와 같은 지식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독서사에서 벌이고 있는 독서운동은 크게 세 가지. 첫째는, 동포 청소년을 상대로 동화책 등의 장서를 빌려주고, 둘째는, 연변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에게 독서교육을 시키며, 셋째는, 연길시를 비롯 왕칭현 등지의 외딴 동포 소학교 어린이를 위한 이동문고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올해로 11회째인 한글독서교사를 양성하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변에서 15주간의 연수과정을 수료한 동포 교사는 약 300명 정도. 수료식을 마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고 생의 의미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즉 동포 청소년에 대한 한글교육의 중요성과 사랑을 파는 안 교수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 안 교수는 "중국의 소학교와 초중학교 교과서 내용은 한국과 달리 때려라, 부셔라하는 글이 대부분이라 아이들의 정서가 삭막해 질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한국의 동시나 동화책은 큰 도움이 되지요"라고 말했다. 장서교환과 독서사 운영비로 매년 5백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그게 잘 채워지지 않아 힘들지만,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이겨낸다. 그는 기자와 만난 날도 대구의 책방을 이 잡듯 뒤지며 동화책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2월말 연변으로 출국할 때 가지고 갈 책 꾸러미를 미리 챙기는 것이다. 사진설명:안병렬 교수가 연변 조선문독서사 앞에서 리상각(맨 오른쪽)시인, 조권옥 조선문독서사 대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중국 땅 연변의 안동마을 중국 땅 안동마을 예 정말 있다기에 댓바람 찾아드니 집집이 문둥이들 귀익은 보리사투리 들을수록 푸근타. 여든 살 할머니에 일흔 살 할아버지 찌들린 그 얼굴에 골골이 파인 주름 휑하니 초점 잃은 눈 보고 봐도 슬프다. 눈물도 매말랐다 통곡도 사치더라 멍하니 바라보며 두 눈만 끔벅끔벅 차라리 울어나 주면 이내가슴 편할걸 고향도 알쏭한데 족보가 어디 있나 민적도 없었는데 인권이 있을손가 정조도 짓밟힌 백성 그 설움을 뉘 알리 조국을 못만났나 가난이 죄이던가 일본 놈 총칼 앞에 열 한 살 끌려와서 만주벌 매서운 추위 피땀으로 녹였다. 황무지 개간하며 허기진 세월이여 날마다 짓는 한숨 밤마다 흘린 눈물 엉키어 불붙는 가슴 한강순들 끄오리 고향도 무정하다 조국도 섭섭더라 종살이 억울함에 남천을 바라보며 그토록 그리는 마음 나 몰라라 하는가?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된다는데 아들 딸 낳고 길러 삼대사대 사셨으니 이제사 내나라 내 땅 떳떳하게 사소서. 떠나며 손 흔드는 무거운 발길이여 보내며 울먹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춘삼월 진달래 필 제 다시 우리 오리다. 연변 땅 태양마을 여기가 진짜 안동 은근한 마음씨에 인정도 넉넉한데 고달파 겉늙은 몰골 안쓰러워 애닯다.
이는 연변의 안동 마을을 방문하고 불러본 시조체 노래이다. 처음 다녀와서 대강 읊조리다 이번 두 번째 방문 후에 더 보태고 다듬었다. 그 인정이 가슴에 사무치었고 그들의 지나온 삶이 생각할수록 서러웠으며 그리고 오늘의 모습 또한 너무나 처량하였기 때문에 자꾸만 잊혀지지가 않아서 흥얼거려 본 것이다. |
* 무료의료봉사 하기로 지난번 중국 땅 연변의 안동마을, 이 마을을 말만 듣고 찾아갔다가 예상 외로 너무 많은 환영과 대접을 받고 돌아와서 그 집 자부가 심장병 치료를 위해 이곳으로 오면 좀 빚을 갚으리라 여겼는데 그것도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럭저럭 괜찮게 산다고 생각하였는데 진찰비마저 장만할 힘이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올해는 드물게 풍년이 들어 좋아하였으나 기대와는 다르게 쌀값이 뚝 떨어지고 팔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쌀값도 한 근에 1원 10전 하던 것이 80전으로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니 쌀 한 가마니를 한국처럼 80kg로 치면 160근인데 그러면 쌀 한 가마니가 128원,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만8천원이 채 안 된다. 이런 형편이니 쌀 네 가마니는 팔아야 이곳 연길에 와서 진찰을 받고 돌아갈 경비가 겨우 되니 어찌 함부로 움직이겠는가? 또 그게 어디 진찰만으로 끝이 난다고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사정을 듣고 보니 참으로 난감하였다. 마음 같으면 이 선생과 둘이서 나누어 경비를 부담하고 우선 진찰만이라도 받도록 해주고 싶지만 또 그마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진찰 결과가 안 좋아 큰 수술이라도 하게 될 경우도 가정해야 하지만 그보다 일방적 시혜는 여러면에서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우선 얼마라도 준비하여 치료를 받겠다고 해 때를 기다려야 하였다. 그러나 그 때를 기다리다 병이 악화라도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오래된 병이라 갑자기 악화될 것 같지도 않아 우선 그냥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선생이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내 놓았다. 의사들을 모시고 그 마을에 하루 가서 의료봉사를 하자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의사라면 까마득히 높은 존재라 감히 그 분들께 무슨 부탁을 드린다는 것은 상상을 못하던 터인데 이 선생은 당신 자신이 간호사라 그런지 그리 어려워하지를 않았다. 마침 아주 좋은 일이 생겨 과기대에서 봉사하시는 의사 이맹신 박사님 부부와 역시 과기대에서 공대학장으로 봉사하시는 민교수님, 그리고 이 선생과 우리 부부가 함께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 선생이 이 일을 부탁하니 이 박사님 부부가 즉석에서 허락을 하시며 아주 좋아하셨다. 의사가 그리 쉽게 그 멀리까지 봉사를 가겠다니 나는 놀랍고 고마웠다. 하기야 이 박사는 미국에서도 요즘 한창 인기있는 가정과 의사인데도 다 버리고 이곳 동포들을 위해 오셨으니 아예 봉사가 몸에 배인 분이라 봉사를 어찌 꺼리리오마는 그래도 가는 곳은 벽촌의 오지라 잠자리며 음식이며 어디 고생이 한 두가지가 아닐텐데도 선선히 가겠다고 나선 것이라 나는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이런 열정적인 의사가 나서니 일이 아주 쉽게 풀리었다. 그는 당장 1박 2일로 잡고 이번 금요일 오후에 자기의 찝차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찝차로 여섯 사람이 가기에 그 공간이 너무 부족하였다. 거기에 짐을 좀 싣자면 네 사람밖에 못 탈 것 같았다. 차 한 대를 더 빌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럴 바엔 아예 큰 차 한 대를 빌리자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럼 이왕 가는데 좀더 규모가 컸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 선생과 나는 치과의사 오 선생에게 얘기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개업을 했으나 1년만이라도 무료로 봉사하고자 이곳 연변대 복지병원에 와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얘기하였더니 아주 흔쾌히 동참을 약속하였다. 그 부인도 아주 좋아하며 도리어 꼭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 의견이 모아져 우리는 화요일에 이 선생댁에 모여 저녁을 먹으며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약속한 저녁에 모두 모였다. 또 병리실험사 정 선생도 왔다. 이 선생의 얘기를 듣고 동참하기로 작정하고 온 것이다. 정 선생도 이곳에 봉사하러 오래 전에 와서 복지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는 분이다. 이 자리에서 대강의 일 분담과 일정, 예산 등 계획을 잡았다. 나는 전에 가보았다는 이유로, 또 나이 탓으로 전체의 책임을 맡았다. 이른 바 팀장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감투인가? 좀 무거운 감이 들었다. 이 박사는 몇 분을 더 초청하였다. 많이 가야 일인당 분담금도 적어진다며 웃었다. 미국서 오신 정형외과 전문의 강 박사님과 캐나다에서 오신 노블의원의 치과의사 임 선생님 내외분, 그리고 한국 두레농장에서 오신 박선생님 등이었다. 모두가 흔쾌히 동참을 약속하였다. 모두에게 동포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가득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 돈 내고 자기 시간 빼앗기며 봉사하러 가는데도 즐거이 동참하려는 것이다. 드디어 금요일이 되었다. 나는 오전 과기대에서 강의하는 여가에 이 박사에게로 가서 전체의 준비상황을 물었다. 아무래도 책임자라는 중압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길이 너무 멀므로 30분 빨리 출발하자고 하였다. 나는 이를 이리저리 알리었다. 2시 55분, 우리는 이번 걸음이 동포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동포에게 심는 좋은 기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출발하였다. 나는 길을 안다고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원래 차만 타면 잘 자는 습성인데 그 자리는 양쪽으로 햇빛을 받아 잠자기가 어려워 아주 피곤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쩌랴? 인도의 책임이 있는 걸. 나는 앞자리에 앉아 제발 무사히 도착하여 많은 성과를 얻게 해달라고 빌며 갔다. 그런데 생각밖에 길은 멀고 날은 빨리 어두워왔다. 왕청을 지나면서 앞으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라고 전화를 하였다. 마침 정 선생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기사는 천교령까지는 길을 안다며 나를 안심시키고는 유유히 운전하였다. 나는 이 기사와 몇 번 여행한 경험이 있기에 노련한 솜씨를 아는지라 그를 믿고 좀 자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캄캄하여 자기가 좋은데도 금방금방 졸다가도 깨었다. 이게 책임이란 것일까? 긴장이 계속되는 것이다. 얼마나 갔을까? 곧 천교령에 닿았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전적으로 인도하여야 하는데 날은 아주 캄캄하고 길은 너무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천교령에서는 용케 길을 바로 잡았다. 가야하를 따라 가는 길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눈에 익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나는 차를 세워야만 하였다. 양 옆으로 잘 다듬어진 소나무 가로수가 전혀 낯설고 더구나 막대로 길을 가로막은 곳은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답답해 이 선생께 전에 이런 곳 보셨느냐 하니 웃기만 하였다. 그런데 동민에게 길을 묻고 온 기사는 이 길이 맞다고 하였다. 차는 다시 달리었다. 이윽고 제법 많은 불빛이 비치는 큰 동네가 나타났다. 동신이 맞았다. 향 소재지 동신이 아니고는 여기 이렇게 큰 동네가 없는 것이다. |
![]() *연변 안동마을 다시찾다 다시 버스를 타고 그 길을 따라 30분쯤 더 달렸을까? 드디어 안동마을 태양촌이 나타났다. 후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골목으로 꺾어 차를 몰아 전에 갔던 집으로 들어가니 몇 사람이 나와 반기며 왜 이리 늦었느냐 한다. 7시 5분 전, 왕청을 지나 두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니 꽤나 걱정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하영대씨 댁으로 갔다. 거기 넓은 집에 저녁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 우리를 반겨 주었다. 우리는 가져간 짐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몇 개나 되는 사과 상자에, 열 개도 넘는 귤 상자, 그리고 갖가지 선물 상자. 그리고 생선에 고기들. 모두가 풍성하였다. 식사 후에 모두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 사이 나와 이 박사는 앞에 있는 노인정 -여기서는 독보실이라 한다- 으로 갔다. 거기에는 전 번에 만났던 남녀 회장과 여러 노인들이 화투놀이를 하고 있었다. 구면인 몇 분은 더 반가웠다. 그들은 달려나와 우리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의 사람들과 달리 남녀의 구분이 거의 없다. 여자도 스스럼없이 우리의 손을 잡았으며 방금 화투놀이도 남녀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온 목적도 이야기하고 내일의 진료와 윷놀이에 대하여서도 이 박사가 상세히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지를 않았다. 모두가 촛점 잃은 눈에 힘이 빠져 있었다. 처량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내일 만나자며 저녁 먹던 집으로 돌아왔다. 임, 강, 박 선생은 피곤하다며 안내자를 따라 어느 댁으로 자러 가고 나머지 우리들은 동네 분들과 어울려 윷판을 벌였다. 5대 3으로 우리가 이겼다. 10시쯤 되었을까? 더 놀자고 했으나 나와 이 박사, 그리고 민 선생은 피곤하다며 자러 나왔다. 아침 6시경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겨울같지 않게 따뜻하며 아주 맑았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하아얀 연기가 그럴 수 없이 정겨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 보았다.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 방으로 오니 벌써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잔 일행이 속속 도착하였다. 여자들과 아이 둘은 모두 이 집의 작은 집,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갔던 그 집에서 잤다고 하였다. 남녀 일행 모두 뜨뜻한 방에서 잘 잤다고 하였다. 아침상도 푸짐하였다. 가져간 생선과 고기로 더욱 푸짐한 상을 꾸민 모양이었다. 일행은 모두 든든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의사 외에 검사하는 정 선생, 간호사인 이 선생과 이 박사의 부인, 그리고 나까지 모두 6명은 노인정에 배치되었다. 나머지 세 사람 중 민 선생은 이곳 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고 정보를 전하고, 복지사와 나의 내자는 어린이 놀이와 노인들 윷놀이를 도우도록 하였다. 뭐 특별히 계획을 짠 것은 아니었으나 적성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배치는 아주 훌륭하였다. |
*몰려드는 환자들로 북새통 노인정에다가는 책상을 여섯 곳에 배치하여 접수, 혈압, 내과, 외과, 약 조제, 검사대로 각각 쓰기로 하였다. 가져온 장비와 약상자를 정리하니 예상외로 많았다. 장비도 다 갖추고 약도 한국제에 미국제와 독일제 등 최고 품질의 약들인 것 같았다. 주사도 여러 가지 있었다. 진료 중에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한 아주머니는 약을 타 가면서 무료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조심스레 묻더니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오래 있다간 혹 다시 달라고 할까봐 겁이 난 모양이었다. 또 어느 아주머니는 몸무게가 110kg이나 되어 남녀 환자 가운데 가장 무거워 체중을 줄여야 한다고 얘기를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답답하였던지 정 선생도 거들어 체중을 줄여야 한다고 권했으나 그저 웃기만 할뿐이었다. 검사를 하던 정 선생은 좀 심심하였던지 자기 혈액형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 와서 검사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피 빼는 게 무섭다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에 정 선생은 자기 피형도 모르면 숙맥이라고 놀리듯 말하니 그제야 한 둘 모여 왔다. 이에 또 정 선생은 부부가 다 하고 아이를 해보아야 진짜 내 아이인지 안다고 넉살좋게 웃으며 얘기하니 이젠 부부가 아이까지 데려와 피 검사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모와 피형이 다른 아이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모두들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또 환자 가운데는 재미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 40살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기에 등록을 하라고 하니 이 양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기는 위가 아파 왔는데 위장을 들여다보는 기계를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아마 위내시경을 말하는 것 같아 그 큰 기계를 어떻게 가져오느냐 하며 그냥 진찰부터 받으라니 필요없다며 등록도 안 했다. 기계도 없이 무슨 진찰이냐 하며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변검사는 하는 것 같았다. 자기 혼자 진찰 안 받으면 될 걸 왜 그렇게 비웃으며 남의 좋은 일에 훼방을 놓는지 참 얄궂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 주민들을 대하며 한없는 비애를 느꼈다. 이들이 모두 겉늙고 있는 것이다. 60대 중반은 된 것 같은데 물어보면 겨우 50살 정도요 50은 되어 보인다 싶으면 실제로는 40 남짓하고 20대의 새댁이 중년의 아주머니 같았던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겉늙고 있었다. 더구나 아주머니들도 화장을 모르니 더 늙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치과는 좀 일찍 마치었으나 노인정에는 12시가 넘었는데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것도 어제 오기로 하였던 동신교회의 환자가 어쩐 이유에서인지 오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만약 그들마저 왔더라면 더 복잡하였으리라. 진료는 오후 1시가 거의 되어서야 끝이 났다. 원래 12시쯤에 마치리라 여겼는데 한 시간 가까이 더 지체된 것이다. 예상보다 환자가 많았다. 내 접수부에 적힌 숫자가 98명이었다. 이 98명을 보느라 두 분 의사와 간호사 약사는 네 시간을 강행군한 것이다. 강 선생은 이렇게 강행군하기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하였다. 오후 1시가 지나서야 점심을 먹게 되었다. 처음 계획은 노인정에서 모두 같이 먹기로 하였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 도저히 수용이 안 되었다. 노인정의 회원 30명은 물론 학교의 전 선생님, 동네의 촌장 등 공산당 간부, 그리고 위생소의 의사 내외분 등등 동네의 유지를 다 청한 것이다. 그러니 노인정에서는 다 수용이 곤란할 것 같아 부득이 우리는 아침 먹던 그 집에서 먹기로 하였다. 또 그 집에서 밥을 하였으므로 편리하였다. |
*우리는 어떻게 이 은혜에 보답할꼬 모두들 서둘러 점심을 먹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 사이 나와 강 선생은 노인정에 가서 인사를 하였다. 노인들은 베풀어준 동족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하였다. 그 인사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였다. 한 노인이 우리를 향해 "우리는 어떻게 이 은혜에 보답할꼬?" 하기에 나는 모국을 위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늘 기도하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하고 또 마음으로라도 이곳보다 더 못산다는 저 북한 동포를 도우라고 당부하였다. 그랬더니 그건 부탁 안 해도 다 한다며 달리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지나간 험악한 세월 그 누구 있어 이런 따뜻한 사랑을 이곳에까지 와서 베풀었겠는가? 참으로 동족으로서의 사랑을 만끽하였으리라. 그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에서 내 콧날이 시큰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로 노인들 가운데는 아직도 한국 사람을 보면 미안해하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이다. 내가 난처하여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였으나 아마 이 마을 노인들 가운데도 조선전쟁에 참가하여 남한을 향해 총을 쏘았을 사람이 혹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그 남한 사람으로부터 진정의 사랑을 받으니 그 얼마나 감사하랴? 우리는, 이 헷갈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연을 쌓은 노인들로부터 진정의 감사를 받고 노인정을 나와 버스 앞으로 왔다. 벌써 모든 짐이랑 구입한 쌀자루도 다 실려 있고 우리 일행도 모두 차에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발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그런데 그 버스 주위에는 온 동네 남녀 분들이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과 작별을 고하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어울려 함께 사진을 찍었다. 떠나는 우리나 보내는 동민이나 모두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일행은 모두 승차하여 이 동민과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서로 손을 흔들며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헤어졌다. 오후 2시 정각이었다. 오는 길은 더 빨랐다. 길도 낯익었고 때도 낮이었기 때문이다. 왕청 시가를 벗어나 잠깐 쉬고 계속 달려왔다. 나는 역시 어제처럼 앞자리에 앉아 흔들리면서 왔다. 피곤하여 잠을 청하나 감격이 큰 탓인가 잠은 오지 않고 도리어 머리가 더 맑아졌다. 나는 이 기회에 전에 쓰다 마무리를 못한, 이 마을에 대한 느낌을 노래한 시조를 오늘의 느낌도 보태어 흥얼거리며 다듬었다. 그리고 결산을 해보니 총 3천200원이 들었다. 오늘 벌인 행사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돈이나 이곳으로 보아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쌀 한 근에 80전이니 쌀 4천근의 거금이다. 또 어디 그뿐인가? 의약품은 얼마나 들었는가? 그러나 사랑을 어찌 돈으로 환산하랴? 오늘 동족의 가슴에 심어준 사랑은 쌀 4천근이 아니라 4만근, 아니 40만근, 400만근도 넘었으리라. 이런 생각에 우리 모두는 가슴 뿌듯함을 안고 감사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저마다 이런 봉사를 더하자고 각자 다짐하였다. 나는 각자의 그 환한 얼굴에서 그 결의를 볼 수 있었다. 그 환한 얼굴이 더 큰 수확이라 생각되었다. 봉사의 기쁨으로만이 얻을 수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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