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눈 내리는 소리
실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겨울,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다. 잘 아는 여류화가와 함께 전주의 중바우산 천주교 성지를 찾았다.
성지에 도착하기 전, 그리 높지 않은 중바우산을 오르기 시작. 이 산은 나지막하고 바위가 많아 중바우산이라 불렸다. 화가 선생님과 함께 걷는 산길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산을 오르던 중, 머리 위로 뭔가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가 내리나 봐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네요.”
그분이 대답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위에서 떨어지는 물체들이 점점 많아졌다. 겨울의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산에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산길은 무척 고요했다. 발자국 소리와 나뭇가지 사이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귓가에 ‘사악사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무언가가 나무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소리였다. 점점 더 자주 들려오는 그 소리는 바로 눈이 나뭇가지 위에 쌓이는 소리였다.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요!”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나 화가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소리요? 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나는 다시 물었다.
“솔잎 위로 내리는 눈 소리, 사악사악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세요?”
그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눈이 내리는 건 보이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아요.”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듣고 있는 이 눈 내리는 소리는 나만의 소리라는 것을. 조용하고 아늑하며 부드러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는 사물은 때로 소리가 전하는 감동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내게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대신, 소리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를 주셨음을 깨달았다. 소리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의 움직임과 그 속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감각이었다.
실명을 한 뒤, 새로운 감각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실명한 다음 해 봄, 한 자원봉사자와 덕진공원을 방문했던 일이 있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꽃 향기가 진하게 다가왔고, 봉사자는 내 손을 진달래꽃에 닿게 해주었다.
“이건 진달래꽃이에요. 분홍색으로 정말 예뻐요.”
그 설명을 들으며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감각은 차가운 물체일 뿐, 내가 기억하던 진달래꽃의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달랐다. 차갑고 생기 없는 감촉에 실망과 충격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가웠던 꽃잎은 다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련꽃을 만지면 은은한 향기가 떠오르고,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눈앞에 우아한 흰 목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 유난히 눈이 적게 내리는 겨울이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덮는 하얀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다. 나에게 들려오는 이 소리는 단순히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따스함을 전해주는 소리이기도 하다.
2024.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