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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체화된 문장 속 사유의 표면체
이성환 시집 『바람을 필사하다』· 박병성 시집 『사라져간 붉은 꽃잎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진정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써야만 하는 글이 시다. 그 시를 통해 남다른 모습의 일천한 삶을 전장에서 끌어온 두 시인을 만나게 된다. 『바람을 필사하다』의 이성환 시인과 『사라져간 붉은 꽃잎들』을 펴낸 박병성 시인으로 시집 안에 살아온 동안의 침적된 삶의 흔적들을 고뇌하며 문장으로 환기한 의지는 쉽지 않은 결행이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 추세와 달리 인간의 본성인 심리는 그 속도를 따를 수 없다. 무한한 양적 팽창처럼 부풀어지기만 한 세상의 다양한 사건처럼 일상화된 변화 추세는 일방적이어서 인간의 한계를 현실로 깨닫게 해 좌절시키곤 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마다 다시 솟아오른 아침 해를 보듯 빈곤한 자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상실감이 앞설 수밖에 없는 제반 사회 현상 속에서 경제 활동에 예속된 채 침몰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자아의 주체적 이면을 전면화한 문장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시인의 현실적인 선택지인 시집 속에 집적된 제반 문장들은 더는 빈곤한 자아가 아니라 충만한 활기를 포집한 진전으로 인식하며 이해되어야 한다.
1.
먼저 이성환 시인은 광주 출생으로 《시와문화》로 시 등단 이후 펴낸 첫 시집 『바람을 필사하다』에서「붕어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 붕어빵을 한입 물고 가장 먼저 느낀 촉감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은 ‘그대’ 였음을 고백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 법이지”라며 그간 가슴으로 은밀하게 숨겨온 누군가와의 관계를 내비치며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화자가 원한만큼 쉽게 가 닿을 수 없었던 사랑의 행로 같은 거리를 생각해 보니 “너에게 가는 시간은 바다의 깊이/ 나에게 오는 시간은 바다의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잠깐의 쉼터 같은 포장마차에 들러 노릇노릇 잘 익은 붕어빵을 한 봉지 사서 가슴에 품은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가슴으로 품어 안은 ‘그대’와의 관계도 그렇게 달짝한 맛으로 왔다가 잊을 수 없는 안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함께 있기만 해도 좋았을 “별밤의 톡톡 데이트”를 회상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추억은 “시간의 깊이만큼/ 입술에 닿은 달콤함으로/ 황금빛 향기 입안에서 터지는 밤”을 생생히 말해준다. 이젠 함께 해주었던 그 사랑도 없는 외로움이 깊이 드리운 ‘빈방’을 화자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겨우내 틀어박혀/ 곡기를 잊으니/ 방 안이 온통 냉골이다// 손에 전해지는 차가움 잊으리/ 입으로 불어대는 입김// 알량한 자존심으로/ 긴 겨울을 버려야 하는/ 시련의 계절// 창문 틈으로 들어온/ 칼바람이/ 방 안에 안부 전하고/ 떠나간다
-「빈방」전문
어떤 이유에선가 홀로 머물러야 했고 그 “방 안이 온통 냉골이다” 이제는 그것마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빈방」의 사연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빈방’이라 해서 사람이 아예 살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화자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설령 처음부터 홀로 방을 사용한다 해도 텅 빈 방은 적막과 고요 그리고 외로움을 유발한다. 외출했다 들어와 누군가 기다려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인간 본성 안에 ‘함께’라는 공존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방에 홀로 머물러야만 하는 사연인즉 아무래도 어려운 환경에 처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난감한 환경은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 극한 추위에도 난방도 없이 견뎌내야 하는 빈궁의 시간이다. 그런 문틈으로 타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은 매서운 것으로 혹독함을 더해준다. 화자는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위로가 될 수 있는 기억을 더듬어간다. 그 언저리 지점은 어머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바람만 맴도는 허공/ 쉴 곳을 찾아 헤매는 퀭한 눈/ 어른거리는 생채기의 차가움/ 날 선 마파람으로/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텃밭// 얼다 녹기를 몇 번 반복하였던가/ 축 늘어져 일어설 기미가 없는/ 기운이 다해 주저앉은 대파// 언 땅을 버팀목 삼아/ 찬바람을 이겨내고 있었구나/ 용케도 살아있었구나/ 손을 모아 바람을 막아준다/ 손길을 주지 않아 거죽만 남은 몸으로/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 손사래를 치는 엄니처럼// 등 위에 있던 햇살/ 내 손을 꼭 쥐어주네/ 나를 꼭 쥐어주네
-「겨울 텃밭에서」부분
겨울 끝 무렵 밭에 자라던 푸성귀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생의 기운이라고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기진한 시기가 입춘 무렵이다. 모든 생의 기운을 소진한 뒤에서야 봄은 오는 것이어서 그 봄조차 긴가민가하는 의혹을 수없이 오해처럼 풀어야만 진짜 봄이다. 그 무렵 즈음처럼 우연히 장롱을 뒤적이다 눈에 띈 기억에도 생생한 “깃 넓은 양장 한 벌 등 떠밀려 입어본 후 처박아 두었던 초록색 양장 한 벌” 그리고 이어 가슴 아픈 추억을 들쑤시는 “비키니 옷장에 찬장 하나로 허겁지겁 시작한 신혼 남편 졸라 얻어 입었던 스무 살 적 눈물 뚝뚝 박힌 눈물받이 물방울 원피스”가 손에 잡힌 것이 모든 생의 기운이 축 처져버린 겨울 끝동 무렵 ‘텃밭’의 푸성귀와 절묘하게 닮았다. 왕성했던 시간의 기운은 어느새 마감을 다하고 겨우겨우 남은 것이라고는 허전하기만 한 것이어서 그마저 추스르기가 힘이 든 것이다. 그 어딘가에 먹먹하게 하없이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겨울 텃밭’ 속의 말라 차가워진 풍경으로 끝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의 온정한 인정을 바람처럼 풀썩이고 있다. ‘나’를 여기까지 있게 해 준 ‘엄니’의 마음으로 그곳에서 추운 겨울바람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새가 먹이를 찾으러 떠나버린 걸까//헐벗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눈/ 바람 앞에 등불이다/ 파르르 파르르/ 아슬아슬 앉은 눈, 털어내고/ 시치미를 떼는 나뭇가지// 무엇이라도 쏟아 낼 듯/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 바람은 꾸역꾸역 밀어낸다// 목탁 소리,/ 온 산에 가득하다
-「바람을 필사하다」전문
행위의 주체를 한번 바꿔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화자가 바람을 필사한 것이 아니라 ‘바람’이 화자의 마음을 필사한 것이다. “산새가 먹이를 찾으러 떠나버린 걸까”라며 텅 빈 나뭇가지를 연상하고 있고 마침 한겨울 삭풍에 간신히 얹혀있는 눈발이 아슬아슬하다. 눈이 얹힌 나뭇가지에서 방금 전 먹이를 찾아 새가 날아갔다면 작은 나뭇가지가 흔들려 눈이 얹혀있을 수가 없다. 새가 날아간 시간은 오래전이란 것을 짐작케 한다. 위태위태한 순간을 견딜 수 없어 멀리 날아가버린 새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 환기되는 심리적 거리는 풍경을 고스란히 관찰하고 있는 화자와 맞닿아 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 겨울 산의 풍경을 그래도 안도할 수 있게 한 “목탁 소리,/ 온 산에 가득하다”라는 화자는 단지 그렇게 전개될 것이라는 예감을 전술傳述했을 뿐이다.
칠산 바다에서/ 건져올린/ 씨알 굵은 조기// 삼십년 전에는/ 금테를 두른 듯 때깔도 곱고/ 툭 튀어 나올 듯 눈은 부리부리,/ 꼬리지느러미는 파도치는 바다/ 주름잡았다고 했다// 망구望九의 어르신/ 식당 한구석에선/ 퀭하니 비쩍 마른/ 보리굴비 앞에 두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비추는/ 토요일/ 해거름 녘
- 「보리굴비」 전문
화자는 칠산 바다에서 잡힌 조기로 만든 ‘보리굴비’와 연관된 삶 속 이야기를 들춰내고 있다. 그래도 ‘칠산 바다’란 말이 시구에 나왔으니 그곳에 얽힌 설화를 살펴보자. 그곳은 본래 일곱 개의 봉우리가 모인 칠산이었다. 그런데 한 마을에 찾아온 낯선 노인을 극진히 대접해 보내면서 조만간 일곱 개의 마을 주변이 바다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버린다. 그 이후 그곳은 예언처럼 바닷물이 차 올라 일곱 개의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칠산 바다는 조기가 잘 잡히는 황금어장이다, 통통한 조기도 일 년 중 한 때라서 풍족히 먹고 살기에는 항상 궁핍했을 것이다. 궁리를 해낸 것이 빨리 상한 생조기를 소금독에 절여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생활 속 지혜가 입소문을 타 바닷가의 곤궁한 시기를 넘길 수 있는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기를 성장하며 익히 보았던 화자가 지금은 아득해져 버린 칠산 바다와 ‘보리굴비’를 소환하고 있다. 마침 식당 안 풍경과 묘한 일치를 이룬 잘 마른 보리굴비와 “망구望九의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처럼 그 추억의 세월만큼이나 배곯았던 시절을 상상하며 시적으로 소환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비추는/ 토요일/ 해거름 녘”도 시간 속에 묻혀 살아온 기억을 훌훌 털어내야 한다. 그렇지만, 털어내도 털리지 않는 심연 속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내 몸 어딘가에 남은/ 당신의 언저리// 점점 기억에서 멀어지는 시간의 깊이/ 나는 당신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방구들 등에 지고 누워 있다가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 기척에/ 건재함 보여주려고 벌떡 일어났던 아버지// 잊을 수 없어서 적는다/ 그때 당신의 나이만큼
- 「아버지의 냄새」 부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정이다. 흔히들 살만큼 살아야만 보이는 세상이 연륜과 비례함을 말해준다.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는 시구와 마지막 “잊을 수 없어서 적는다”는 시어가 파장하고 있는 언어적 번짐이 강한 대구를 이뤄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화자의 기억 속 아버지는 “광대뼈 도드라진 얼굴/ 홀쭉 들어간 양 볼엔 고통의 깊이/ 그래도 눈빛만은 살아있어/ 강단진 선비”로 기억하고 있다. 초상肖像 이면에 감춰진 고통의 깊이는 상당해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언질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런 모습으로 각인된 화자에게의 시간은 측은함과 더불어 아버지가 보여준 부성애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로 존재한다. 서서히 깊어간 악성 병세에도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한 것처럼 보여주려 한 “방구들 등에 지고 누워 있다가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 기척에/ 건재함 보여주려고 벌떡 일어났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못다 한 그리움에 대한 글을 옮긴다. 화자의 몸 어딘가에 배어있을 아버지의 사랑의 냄새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을 시로 재현하고 있다.
이성환 시인의 시선은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자연과의 교감으로 촉발된 감상을 시로 환기한다. 발길 마침 닿는 곳은「실상사 풀꽃밭」으로 주변이 온통 꽃으로 만발한 봄의 중간쯤이었을 것이다. “소외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서/ 오롯한 생명 대접받으며/ 햇살에 반짝이는 풀꽃들의 미소// 태어날 때부터 멸시와 차별/ 스르르 녹아버린 조선의 노비처럼/ 생명 취급 못 받던/ 그대는 이름 없는 백성초”들이 실상사 앞마당에 만발한 것이다. 누구나 이 땅의 생명으로 태어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살고자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잘 알기에 화자는 그 풀꽃밭을 바라보며 꽃무리 속에 한껏 피어난 꽃들처럼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보며 이상향적인 감상에 젖어 “실상사의 풀꽃밭은/ 서방정토”라며 마음을 풀어놓고 있다. 자연의 일원으로 피고 지는 생명체 속에 사람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곧 죽어도 홍어는 전라도 것일 수밖에 없다. 전라도란 상징으로 세상과 불협하다 어느 시기부터인지 모르게 독특한 풍미로 익히 소문나 전국구가 되어버린 「홍어」는 기호 음식으로 대중성을 확보했다. 전라도 사람인 이성환 시인이 늦게 배운 홍어 맛을 “콧속은 콧속대로 매운 것이 쏴 올라오고/ 입 안은 입 안대로/ 혼을 쏙 빼놓았던 첫맛의 기억”을 추억하며 부위별로 각기 다른 맛을 제대로 알리고 있다. 그런 특이한 맛을 구분할 수 있도록 가리켜준 아버지가 더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나이 들수록 불쑥불쑥 가슴을 뜨겁게 데우르는 아버지의 부재한 그 자리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을 어이하겠는가?
2.
박병성 시인은 2015년 《농민문학》으로 시 부문에 등단해 문단 활동을 해왔다. 시에 동한 마음을 오랜 묵힘을 통해 첫 시집 『사라져 간 붉은 꽃잎들』을 최근 출간했다. 살아온 시간을 내면화하고 깊은 침잠의 사유마저 화두처럼 아껴 쓴 시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다 던지고 떠나기엔/ 너무 쓸쓸해/ 시를 쓴다/ 새벽 4시쯤/ 소리 없이 떠나기 좋은 시간에/ 펜 하나 들고/ 미명을 걸으며 길을 떠난다”는 비장감이 묻어있는 「시인의 말」에 담긴 소회가 매번 시를 대하는 평상심을 말해준다. 매번 짧은 글로 시집 속 시적 의미들을 다 발라낼 수 없는 나의 필력이 몹시 아플 수밖에 없다. 궁여지책으로 일부 시들을 통해 시의성을 살펴 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유의미한 시적 함의성을 깊게 들여다볼 요량이다. 매번 고민하는 순간이지만, 맨 처음 즉 초심으로 다가가는 마음으로부터 전개되는 시인의 마음처럼 평론을 써 내려가는 상황도 거반 다를 것이 없다. 한동안의 심정적인 고요를 통해 산만한 심신을 정갈히 하고 침묵으로 보이지 않는 문장을 응시하며 환청처럼 들려오는 주문呪文을 받아 적는 것의 과정이 시를 쓰는 것과 같다.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눈빛이 향하는 문장을 쫓아 본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난다/ 쌓인 간절함의 두께만큼 내 안에 똬리를 튼/ 수많은 회한으로 켜놓은 불을 꺼야 하리// 불을 꺼야 하리/ 손가락 걸고 돌아선 수많은 거짓에 대해/ 동그라미 속에 갇힌 사람 ‘八’字가/ 점괘 ‘卜’字가 되는 것에 대해/ 이글거리는 불빛, 불빛// 서달산 현충원 호국 지장사를 지나며/ 검은 정장 코트 걸치고/ 시도 때도 없이 도열해 있는/ 구국 열사를 사칭한 가벼운 입들을 떠올리며// 지나간 일에 혹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일에/ 붙매인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라// 수많은 등불에 가려진 자리마다/ 무념무상의 어둠이 펼쳐질 때/ 반짝이는 별들만이/ 머리에도 가슴에도 온통 빛나리”
- 「불을 꺼야 빛나리」 전문
멀리 볼 것이 없다. 일제 부역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후유증이 지금껏 사회 전반에 정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 민주 시민 의식과 충돌하며 얽히고설켜버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늦었다고 방관하고 묵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인 의식이 개입된 시 「불을 꺼야 빛나리」는 사회 전반에 대한 잘못된 문제점을 살피고 있다. 흔히들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가려 논공행상하듯 호국 선열로 일컬어지는 분들 중 가공된 위훈으로 상훈賞勳의 명단에 올려져 버젓이 “구국 열사를 사칭한 가벼운 입들을 떠올리며” 국가 유공자로 둔갑하여 국가가 부여한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더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그렇지 않다는 것의 반론인 셈이다. 그들이 거짓으로 빛을 발할 때 더 깊은 질곡 같은 어둠이 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등불에 가려진 자리마다/ 무념무상의 어둠이 펼쳐질 때/ 반짝이는 별들만이/ 머리에도 가슴에도 온통 빛나리”였다며 사람(민중)들의 삶은 생존 그 자체가 고통인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된다는 발화다. 이제라도 잘못된 세월과 사람도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는 인식의 환기를 담고 있다.
박병성 시인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시인의 시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자유’와 그 안에 응당 생존의 문제인 삶의 순간을 한시도 놓아버린 적이 없다.「자유를 위하여」에서 “ 나는 오늘 밭에 간다// 해질녘 집에 올 때는 그물망도 건져 오리”라며 말하는 저의는 시대의 밑바닥을 지탱해 주는 농민적인 삶의 의식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흙을 만지며 고래古來로 부터 작금까지 이어지는 농민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고뇌에 찬 삶을 체험하며 반성과 사회의식으로 재충전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며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반성을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에 대한 결과로 시를 담은 그물망을 거둬들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심란하다 못해 불편하다.
제국은 혁명 그 후부터/ 폐결핵을 앓아온 박명薄明한 여인,/ 히말라야 만년설에 뿌리내린 복수초가 오히려 심상찮다/ 제국의 태양과 달은 바람과 구름과 햇볕에게/ 항상 소풍처럼 놀다 가랬는데/ 기름이 타들어가는 저녁놀은 / 죽은 피 다 쏟아낸 듯/ ---중략---/ 뭉크의 ‘절규’ 속에/ 병색 짙은 여인의 눈엔 검은 눈물이 흐르고/ 각혈한 핏빛으로 저물어가는 석양은/ 떠나는 강물에 자꾸 흔들리는데/ 섣달그믐 갈고리 달빛에 때 잊은/ 진달래와 개나리 꽃망울이 편찮다
- 「겨울비」 부분
예전에는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춥던 겨울 한파도 오지 않고 간간히 칙칙하게 내린 ‘겨울비’가 불안하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계절을 넘나들며 나쁜 징후를 보여주듯 우리 주변 환경에서 종종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시인도 그런 불길한 예감의 징후들을 보며 그 원인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산업 혁명으로 시작된 제국의 침략 야욕으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것의 끝은 결국 지구 환경의 파괴와 인간적인 삶의 피폐로 이어지고 기어이 우리가 영원히 실재하며 살아가야 할 지구 환경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겨울비’가 내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겨울비’에 침착된 온갖 나쁜 성분들이 함께 내린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핀 “히말라야 만년설에 뿌리내린 복수초가 오히려 심상찮”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도 봄이면 만발해야 할 “섣달그믐 갈고리 달빛에 때 잊은/ 진달래와 개나리 꽃망울이 편찮다”는 시인의 심리적 불안이 꼭 한 개인만의 것은 아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지구 환경에 대한 각성을 새롭게 해야 될 시점이다.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 만물이 다르지 않으니 사람과 자연이 다르지 않고 그 안의 생명이 함께 하는 것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압화押花」란 시를 보면 시집을 펼치다 책갈피에 넣어둔 네 잎 클로버가 빠져나온 우연한 정황에서 전이된 사유가 시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바싹 말라버린 ‘네 잎 클로버’를 보며 한때 온전하게 살빛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인간의 욕망을 위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을 반성하고 있다, 심정적으로 매우 여린 감성반응 같지만, 그런 마음은 자연애적인 심상에서 기인한다. 그 자연 속에 존재한 인간의 삶과 동일시한 관념의 일환인 것이다. “몇 장을 넘기니 분홍 노루귀가/ 또 애기단풍이/ 죽은피 색깔로 납작하게 눌려있다// 내 피와 살이었던 너// 아가 때, 땅바닥에 넘어져도/ 손바닥 야무지게 털며 벌떡 일어났던 너”로 이어지는 인연이란 것의 관계를 떠올린다. 책갈피에 담겨있던 ‘네 잎 클로버’와 ‘분홍 노루귀’ 따라 맥없이 떨어지는 ‘애기단풍’을 보며 그 모습이 마치 하찮은 돌부리에도 잘 꼬꾸라지는 자식들의 ‘아가 때’와 영 닮은 것이다. 그 ‘아가’가 시간을 물고 성장하여 ‘에미 애비’가 되어 힘든 삶을 이어가듯 책갈피 속에 압화된 그들도 그러해야 했는 데 그렇지 못하도록 한 미안함을 고백하고 있다. 자유로운 생명의 시간을 억압했다는 반성으로 “이제는 무엇이든/ 포개어 쌓아놓지 않으리”라는 각성이 곧 삶에 대한 동반 지향적인 성찰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대나무 숲은 울음소리로 서늘하다」란 시를 살펴보자.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소리는 계절과 듣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의 반응은 다양하여 심리적인 상태를 관통해 분별하고 만상萬象의 소리로 다가온다. 시인이 들은 “한여름 대낮 대나무 숲에는/ 퉁소 소리 같은 바람이 서늘하다”라며 비장한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마음이 충동한 것은 사물을 바라볼 때 그저 스치듯 바라보지 않고 제반 관계 현상을 역사 인식으로 깊이 있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갖는 민중의식의 상관성을 충만의 기개로 연상하며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을 들고 관군과 맞선 갑오 동학의 민중은 언제든지 무참히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위기를 응당 감당하고자 했다. 생때같은 죽음을 마다치 않고 뛰어든 “임진년 민중의 활시위 소리와/ 동학년 농민의 죽창에서 들리는/ 함성과 함께 서늘하다”는 시인의 심정 또한 ‘비감’한 시대 의식에 대한 각성인 것이다. 이어 “매화 합죽선 펼치며 나는 듯 휘도는/ 관비의 부챗살에서도/ 시누대 서슬 퍼런 바람 불어 서늘한/ 몽중헌의 오후”는 분노에 찬 서늘함인 것이다. 그런 마음이 부쩍 들게 된 것을 되돌아보면 그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화된 현실에서 불공정한 기색들이 준동할 때 대나무 숲에서 이는 서늘한 충동이 간혹 일곤 한다는 심정을 우회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지점은 매우 깊다. 사물의 표면이 아닌 이면에 가려진 사실적인 서사를 시적으로 환기하기 때문이다.
북풍 휘몰아치는 피아골 어느 기슭에서/ 남부군과 토벌군으로 만났을/ 지아비와 시아제의 피눈물과 함께/ 쑥대머리 그들 엄니 삭아버린 속적삼에/ 싸서 버린 한숨도 흐를 것이여/ 애비 에미 부르다 자지러진/ 그들의 피고름 거름 삼아 맹독으로 피어났을/ 노고단 철쭉 핏빛 그리움/ 그 독성도 빗물에 녹아 흐를 것이여/ 전라도 땅 이 구석 저 구석/ 황톳길 밟고 밟아 시린 초승달도/ 동편제 시김새 한시런 가락도/ 논꽃 녹여 꽃눈 틔운 매화 나목의 흰 서슬/ 그 눈꽃개비 이파리도 함께 흐르는 거여/ 바다는 까치너울로 그 아픔 떠밀며 막아쌓지만/ 끝내 모든 걸 허락하는 바다에 닿을 때꺼정/ 눈보다 흰 새끼 은어 떼 벗 삼아/ 바다로 가자는 것이여/ 남해, 엄니처럼 따순 품에서/ 어린 형제로 만나 끌어안고 싶었던 것이여
- 「섬진강 물두꺼비」 부분
「섬진강 물두꺼비」도 그런 시적 유형을 드러낸다. 섬진강 두꺼비의 유래는 고려 때 노략질 하러 온 왜구들이 놀라 도망갈 정도로 두꺼비가 떼를 지어 울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사연도 강폭만큼이나 유장한 강가에 시인이 서 있다.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저 풍경으로 다가오는 시절 좋은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다. 저 강이 어떠한 강물인가를 잘 알고 있는 화자의 인식은 역사의 물길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장 먼저 떠 올린 것은 한 맺힌 삶을 살다 견딜 수 없어 자진한 강가의 민초들을 소환한다. 살다 살다 한이 깊어 가슴속에 독을 품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애당초에는 천상 맑은 샘물처럼 “모래가람 오목조목 갱조개 같은/ 보성강 가로 시집온 하동마을 악양댁,”도 그렇고, 살다 보니 이런저런 세상사에 꼬이고 엮여 기구한 팔자의 괘에 갇히고 만 “북풍 휘몰아치는 피아골 어느 기슭에서/ 남부군과 토벌군으로 만났을/ 지아비와 시아제의 피눈물과 함께/ 쑥대머리 그들 엄니 삭아버린 속적삼에/ 싸서 버린 한숨도 흐를 것이여”란 말 웅얼거린 것을 알아들었는지 맴돌다 거품 물고 빠져나가는 ‘간전’ 물굽이도 애달파 서러운 것이다. 그래도 어이하리. 아픈 허리 부여잡고 우리는 “남해, 엄니처럼 따순 품에서/ 어린 형제로 만나 끌어안고” 못다 이룬 대동세상을 꿈속에서나마 기어이 이뤄야 할 터이다.
두 시인의 최근 발간된 시집 속 시편들을 통해 각각의 삶의 연륜만큼 체화된 문장 속 면면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대로 또 다른 시간 속으로 합류하며 두 시인은 가슴 안 심연을 풀어낼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강의 물길이 되듯 먼 훗날 그 물굽이가 흘러간 강 어귀를 또 우리는 맴돌 것이다.
-《시와문화》가을호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