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슷한 연배의 은퇴자들이 결성한 친목회의 정기모임 일이다. 약속장소인 지하철 2호선 냉정역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많이 남는다. 역내의 장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한 중년의 남자가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개찰구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혹시 3하사관학교 나오지 않으셨는지?”
‘하사관 학교라….’
1975년도에 군입대를 했으니까 4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다.
논산훈련소에서 신체검사 갑종을 받고, ‘완’자 장병으로 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본적지가 울산인 장병들이 3하사관학교 병장 반에 차출되어 간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본적지가 아버지 고향인 울산이라 나하고 상관있는 소문이었다. 아무튼, 차출 지로는 최악이라고 쑥덕거렸다.
경기도 가평에 있던 3하사관학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군기가 세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주일에 한 번씩 10㎞ 완전군장 구보는 필수였고, 수시로 선착순, 유격 체조, 원산폭격 등 모든 교육에 얼차려가 동반되었다. 그래서 극한상황에 몰린 교육생이 적응을 못 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교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나도 큰 고비가 한 번 있었다. 영점사격 때의 일이다. 전날 완전군장 구보를 하는데, 그날따라 유달리 군장이 몸에 붙지를 않고 따로 놀더니 우측 등이 크게 파이는 열상을 입고 말았다. 밤에 열이 나고 아파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컨디션은 최악의 상태였다.
사격장에서 가늠쇠를 통해 검은 원 표적을 보니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 결국, 영점이 형성되지 않아 불합격하였고, 중위 계급의 교관에게 정신 불량이라는 죄목으로 엉덩이에 각목 찜질을 당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팬티에 피가 말라붙어 잘 내려가지 않고, 취침 시에는 붓기로 반듯이 눕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틀 후 일요일에 영점사격 불합격자 10여 명이 교관의 인솔하에 왕복 20㎞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실거리 사격장을 헐떡이며 뛰어갔다. 여기서 불합격하면 학칙에 따라 바로 퇴교 조치를 당한단다. 숨을 가다듬고 100m부터 200m, 250m 사거리의 사람 상반신 크기의 검은 표적을 쓰러뜨린 후에야 겨우 퇴교는 면했다.
그러나 한 집단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긴 호흡으로 볼 때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군 생활 전반에 걸쳐 혼란을 야기한 제도상의 더 큰 문제가 곧바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하사관학교에서 거의 비슷한 과정으로 교육받는 하사반은 24주간 교육을 받고 임관하면서 군번을 새로 받았다. 그런데 우리 분대장 반은 16주간의 압축되고 강도가 더 센 교육에 병장 계급을 달아주면서, 군번은 논산 군번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일병보다도 군번이 늦어 소위 가짜 계급을 뜻하는 물병장이라 불렀으며, 상병으로 제대하는 병사가 대부분이던 시기라 기존 병사들에게는 눈에가시 같은 존재였다. 모든 일에 성실히 임한 나로서는 그런 혼란으로 군대 생활이 별로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을 같이한 전우라고 전혀 낯이 익지 않은 사람이 내 앞에 떡하니 서 있다. 자기는 3하사관학교 및 소대 몇 학번이며, 경남 양산을 본적으로 한 자원으로 입대하였단다.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으며, 긴 세월이 흘렀는데 내 얼굴은 또 어떻게 알아봤을까?
화명동 사는 회원이 나타난다.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이 당연히 우리 회원인 줄 알고 인사부터 하고 앞의 사람을 쳐다본다
그 사람은 지하철을 타러 개찰구 쪽에서 기다리는 여자에게로 가고, 그렇게 40년 만의 짧은 만남은 아쉬움만 남긴 채로 끝을 맺는다.
첫댓글
군생활이 생각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