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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옛길
<바우하우스 도서관>
바우하우스와 대표적 인물
가구, 유리공예, 도자기, 금속, 조각, 무대, 텍스타일 등 각종 공방에서는 폼-마이스터(Form-Meister - 형태 교사)와 베르크 마이스터(Werk Meister - 제작교사) 두 사람을 채용하는 1공방 1교원제 커리큘럼을 실시- 미술가 출신과 크래프트맨 출신 교사에 의해서 각각의 조형 교육이 실시되게 된 것도 그로피우스의 교육 이념에 토대를 둔 것이다.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최고의 교사가 초빙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마르크스, 이텐, 슐라이어, 무헤, 슐렘머(Ossar Schlemmer), 클레(Paul Klee), 칸딘스키 등이 차례대로 초빙되었고 후에는 모흘리 나기(Laszlo Moholy Nagy)가 취임했다.
<마르크스> <칸딘스키>
<칸딘스키의 그물>
<칸딘스키의 고립>
그로피우스는 독재형 리더가 아니었다. 건축가로서 그는 팀윅에 의한 설계시스템을 지향하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작업협동체(Arbeitsgemeinschaft) 이념을 제창했다. (그의 후임자 마이어는 이 방향을 보다 철저화 한다. 후에 무헤는 회상한다. "우리는 그로피우스의 이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켰다. 또한 우리들은 그와 함께 자신을 변화시켰다.
알마의 조언과 추천으로 그로피우스가 초빙한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은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들 중에서 유일하게 교육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빈의 아틀리에에서 14명의 학생들과 함께 이주해온 그는 괴짜였는데 카리스마적인 기질로 예술 교육가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신념이 강하고 학생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서 초기 바우하우스 교육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파울 클레는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모럴의 최고 법정'이라고 부른 정신적인 지주였다. 마찬가지로 형태교사였던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에서 해산할 때까지 시종일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1923년 봄, 창립 4주년을 기념하는 '바우하우스 주간(週間)'에 즈음해서 이텐과 슐라이어가 퇴임한 것은 바우하우스의 연혁에 획을 긋는 최초의 위기였다. <생산과 교육 두 기능을 겸비한 기관>으로서 바우하우스를 정착시킨 그로피우스는 외부의 주문에 의한 제품개발과 생산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예술성 교육지상주의자였던 이텐이 그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다가 결국은 퇴임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같은 해 여름, 바우하우스 주간을 맞이해서 그로피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종합』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의욕적으로 대기업과 연계를 추진할 것이다"라고 공표하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전회하면서 이후의 바우하우스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교육, 실천기관으로서 탁월한 활동을 보이게 된다. 이텐을 대신해서 모홀리 나기와 요제프 알버스가 새로운 노선의 추진자가 되었다.
건축가/ 피터 벨렌스, 요제프 호프만, H.P 베를라헤
목재업자/ 아돌프 좀머펠트
음악가/ 아르놀트 쉔베르크, 아돌프 부슈, 에드윈 핏셔
미술사학자/ 요제프 시고프스키
작가/ 겔하르트 하우프트만, 헬베르트 오이렘브르크, 베르펠
자연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한스 드리슈
<아인슈타인>
화가/ 마르크 샤갈, 오스칼 코코슈카
<코코슈카의 폭풍우>
이상의 위원들이 자금 면에서 원조를 해줬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미 바우하우스는 폐교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뎃사우 그리고 베를린으로
공중 분해된 위기에 처한 바우하우스에 뎃사우(Dessau) 시장 후리츠 헷세가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시교육위원회 부룸 교수는 "현대 문화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태도는 루소에 비견할 만하다"라고 평가하며 반대 세력을 제압해서 제 2차 바우하우스가 뎃사우에 개교하게 된다.
신바우하우스는 공방의 구조를 개조해서 각 공방의 기능을 교육 공방과 실험 공방으로 나뉜다. 운영은 각각 한 사람의 전임교사에게 위임해서 종래 일체화 되어있던 교육활동과 생산활동이 공방 내에서 단계적으로 구별되었다. 다시 말해서 교육과 생산을 분리하는 신체제인 것이다. 공통 기초 과정은 요세프 앨버스가 새로 담당하게 되었다.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건축교육 과정, 실천 실험부, 인쇄 공방이 신설되었다. 건축 지도는 그로피우스 자신 (후에는 마이어)이 담당했고, 그가 설계한 뎃사우 신교사는 건축사에 길이 남는 걸작으로 꼽히는데 내장, 조명, 기구 등에 총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인더트리얼 디자인의 생산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그로피우스는 개교와 동시에 바우하우스의 제품을 전문판매 하는 유한회사 <바우하우스 상회>를 설립. 또한 『바우하우스 총서』를 간행해서 이 학교의 이념과 성과를 어필했다. 그리고 전문교육기관의 자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대학 설치를 신청, 바우하우스는 1926년 시립조형대학으로 인가를 받는다.
이렇게 해서 바우하우스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르게 됐을 때 그로피우스는 1928년 사의를 표명하고 이후, 바우하우스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적 당파성 배재를 원칙으로 했던 그로피우스가 이러한 방침 고수를 조건으로 자리를 양보한 마이어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의 실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흥 나치의 비판을 불러일으켜서 바우하우스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했다. 그로피우스와 칸딘스키는 상담 끝에 헷세 시장을 통해서 마이어에게 사직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제 3대 학장으로 그로피우스는 베렌스 문하의 후배 미스 반 데르 로에(Mies Vander Rohe)를 천거했다. 미스는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에서 독일관을 설계해서 근대 건축의 모뉴멘트로 평가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린 직후였다.
1930년 학장으로 취임한 미스는 상황 변화를 모색했지만 결국,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나치즘을 절충, 타협하지 않아서 결국은 교수회에 해산을 제의하게 되었고 전원 일치의 승인을 얻어서 7월 20일 게쉬타포와 각 단체에 해산통지서를 보내게 되었다.
구미 각지로 망명한 바우하우스의 사람들은 각자 의욕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와 울름 조형대학은 뎃사우 학교의 맥을 이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로피우스와 미스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이 시기에 많은 것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4. 바우하우스가 남긴 것 어쨌든 14년간 존속된 바우하우스는 교육 기관이었고, 연구 기관이었으며, 디자인 스튜디오이고 건축설계 사무실이었다. 이 외에도 제조, 판매, 출판 활동 등....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분야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바우하우스의 실체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 총서를 통해서 알려진 사상과 활동 내용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작은 학교가 뎃사우에서 이주해 온 1923년부터 10년 후에 해산할 때까지 재즈 밴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놀랄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활동은 슐렘머가 지휘하는 무대 공방의 신체 표현과 의복 연구와 대응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인간 공학적 분석이라는 개념이 조형에 연결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제품 디자인에 반영되게 되었다. 또한 직물 공방과 연계한 코스튬(costum) 탐구는 현대의 칼 라가펠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단순히 무용 그 자체로서 바우하우스의 실험무대에 나타난 신체 표현과 조형언어의 상호작용에 토대로 둔 퍼포먼스의 선구적인 의의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 공방의 일환으로서 제작 교수 요세프, 헐트비히는 음악을 동반해서 빛의 디자인에 도전했다. 그래서 1924에는 베를린이나 빈에 초대되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편, 클레와 칸딘스키는 모던아트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후에는 모흘리 나기와 협력해서 예술형태학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분석 수법을 확립한다. 큐비즘 / 쉬프레마티즘(절대주의) / 네오플라스티시즘(신조형주의) / 독일 표현주의 등 모던아트의 모든 주류의 원리, 방법을 정리, 종합해서 디자인 문법을 확립하려고 했던 바우하우스의 조형이론은 "시각언어"라는 개념을 체계화하게 되었다. 이 이론 형성 과정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 『바우하우스 총서』를 간행하는데 모흘리 나기가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연구는 미국 망명 후에 뉴 바우하우스에서 발전하여 20세기 조형교육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디자이너로서의 모흘리 나기는 H. 바이어와 함께 타이포그래픽과 사진에 관한 시각적 실험을 진행해서 그래픽 디자인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무대 조형에도 뛰어난 성과를 올린 그는 기계의 도입이 무대를 다이나믹하게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텍스타일에 있어서도 통상적인 디자인 활동에서 벗어나서 뎃사우에 있는 바우하우스에 설치된 쟈카드식 문직기 등의 최신 설비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지기조법(支機祖法)이 실험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옷감 샘플은 방적 업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이어서 공업화되었다. 디자인 개발에는 클레 등의 지원이 있었고 군터 슈테르첼과 제자들이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브로이어와 브란트도 바우하우스 졸업생이고 알프레트 어른트가 벽화 공방의 주임이 돼서 개발한 "바우하우스 벽지" 는 첫해에 440만매를 러슈사가 제조하여 이 디자인 사용료 수입이 바우하우스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2대 학장 한네스 마이어는 자신이 뛰어난 건축가였는데 알트 슈탐 / 루드비히 히르벨자이머 / 에드와르트 하이베르크 / 안톤 프렌너 등 각국의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서 공학적인 요소를 확대했다. 히르벨자이머는 당시 르 코르뷔지에에 버금가는 고층 대도시 공간론의 일인자였다. 바우하우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도시 개발 계획을 제안했다.
물론, 이텐/ 앨버스/ 모흘리 나기에 의한 조형교육의 방법(Method)이 세계 교육계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고도의 이론교육과 병행해서 바우하우스에서는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재료들을 취급하고 그 재료들을 가공하는 여러 가지 도구의 사용법을 지도하면서 그 재료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또한, 상상력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 형태교사는 예술이론 뿐만 아니라 감정 트레이닝(커뮤니케이션론)을 가르쳤다. 게다가 재료학이나 실습교육과 병행해서 학생들에게 부기, 계약 방법 등의 비즈니스 커리큘럼을 실시했다. 예술가와 직업인의 완전한 일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공작연맹의 지도자 무테지우스가 "도대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오리무중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불확실했던 공학과 미의 관계에 대해서 바우하우스는 구체적인 회답을 주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로피우스와 교류가 많았던 호프만의 빈 공방보다도 분명히 진전된 것임에 틀림없다. 바우하우스 활동의 다양함은 실제 작품의 가치 이상으로 디자인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내용의 확립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라고 하면 일부에서는 근대합리주의라는 도그마에 충실했던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2,3대 학장이었던 마이어와 미스의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것이다.
바우하우스가 근대 디자인의 흐름과 교육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인데 그 내용과 성과를 기능주의 내지는 협소한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로피우스 학장의 재임 중에 지향하던 변화의 시도가 여러 번 있었고, 최신 공학 기술 도입에 열의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공업화의 모순과 시대 정신의 위기를 자각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히려 일반적인 의미의 근대주의를 뛰어넘는 전위적인 사상이나 시도가 왕성했다.
데 스틸의 조형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그로피우스는 이렇게 서술했다. "데 스틸은 우리 보다 앞서가고 있지만 우리는 바우하우스에 어떠한 도그마도 심어지길 원치 않는다. 각자가 독창적인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
양식성과 연관을 지어서 말한다면 당시 유럽에서 성행했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명확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건축가로서 그는 "건축은 항상 개성적이고 민족적인데 3개의 도심원= 개인, 민족, 인류 중에서 최후, 최대의 원이 나머지 두 가지를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제창하며 "인더스트리얼 건축"의 주장을 강조했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교육은 과거 문화에 연루되지 않는 긴급한 현실생활의 문제를 전향적인 자세로 해결했다는 점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고루한 것을 과감하게 타파했다는 그 혁신적인 전위적인 정신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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