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남평문씨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 반여문중과 의안공파 동래거벌 문중
문재인 대통령은 의안공파 후손
남평문씨의 시조는 문다성이며 15세 문익이 중시조 1세이다. 3세 극겸은 4세로 충렬공 후식, 효혜공 유필, 유철을 두었다.
충렬공 후식의 장남 충익공(탄)의 후손 9세 숙선에 이르러 충혜공 익겸, 충선공 익점, 익부 익하 4형제를 두었으며 익점의 첫째 아들 중용 헌납공파, 둘째 아들 중성 순질공파, 셋째 아들 중실 의안공파, 넷째 아들 중진 시중공파 다섯째 막내 아들 중계 성숙공파이다. 남평 문씨의 분파는 충혜공파(忠惠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순질공파, 의안공파(毅安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후식의 차남의 후손 성숙공파, 남제공파, 효혜공 유필(惟弼)의 후손은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의안공파 후손이다.
남평문씨는 고려조에 이르러서 많은 현 수상과 각 재상 현사가 배출되니 세인들은 삼한갑족이라 하였고 고종도 교서에서 진신지문이라 하였다.
후손들은 조선 건국 초에는 고려 충신의 후예답게 출사하지 않고 명문거족의 후예답게 학문강마만은 계속하여 높은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고사들이 속출되었다. 그러나 시대 흐름에 따라 사고 역시 바꾸어 세종 시부터는 문과 또는 무과 유일로 출사하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생진에는 많은 인원이 입격하고 문과대과에만 6명이나 급제하였고 임란 시에는 16명이란 창의지사가 배출되었다.
순평부원군파 반여문중 선조의 입향 경위는 영조4년 1728년 정희랑의 란으로 18세 창적(昌迪) 선조의 부인 경주김씨는 아들 중위를 데리고 친가로 피난을 오게 됐고 끝내 합천 고향을 못 가시고 반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의안공파 동래 입향조인 14세(世) 의안공(毅安公) 문평은 1406년(태종 6)에 종질인 문가학(文可學)[13세]의 모반 사건으로 화(禍)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문평은 선대의 세거지인 경상남도 단성을 떠나 사천에 머물다가 첫째 아들 문어동(文圄仝)[15세]은 그곳에 머물게 하고, 둘째 아들 문우원(文遇元)을 데리고 1440년(세종 22)에 남해안을 따라 동래 초읍동에 자리를 잡았다.
의안공파 동래거벌 문중 문세휘 20(世)는 왜란이 터지자 붓을 던지고 흩어지고 도망가는 병사 수백 명을 끌어모아 영솔하고 의병장 김정서 등 24사람과 더불어 사투를 벌인 끝에 원수들을 격파, 그 승승장구의 기세는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한결같았다.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과 같이 화왕산성 수호에 2등 공신으로 녹훈되고 공신에게 수여하던 상훈을 받았다. 1639년에 운봉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순평부원군파 반여문중 26세(世) 문인갑은 1942년 봄 졸업 한 동창 김영찬, 남기명, 양중모, 김일규, 김병헌, 김한래, 이관수, 김진훈 등의 재학생과 뜻을 같이하여 조선청년독립당에 가담하였다. 대다수 당원들의 졸업과 동시에 행동범위를 넓혔으며 모든 당원은 각처로 침투하여 활약하게 되고 각지의 항일 비밀결사(자일회, 순국당)등과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44년 8월 조선청년독립당은 시기를 보아 민심을 교란하고 일군 탄약고를 폭파하여 내란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1차로 구포철교에서 일본군용 열차를 폭파하기로 하고 만약 이 거사들이 실패할 때는 일군에 지원 입대하여 연합군에 투항한 후 중국에서 재결합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려 할 즈음에 체포되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해방과 더불어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 후 문인갑 선생은 오랜 교직생활을 하였으며, 부산사대부고교장을 역임·정년퇴직·2008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자료제공 :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 간혜공(판도판서)
종회회장 문명규 참고문헌 : 남평문씨 유래사 편저자 문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