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영향권
김석영
파란시선 0090 ∣ 2021년 10월 2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B6(128×208) ∣ 136쪽
ISBN 979-11-91897-08-1 03810 ∣ 바코드 9791191897081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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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우리는 생략될 때 서로를 읽는다”
우리는 “얼음”이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얼릴 수 있”다(「지붕 버리기」). 또 우리가 고개를 돌리면 “담이 생기”고, “담”은 점차 우리의 일부가 된다(「파수꾼」). 우리는 존재가 되고 존재를 파생시킨다. 파생한 존재는 나와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마침내 분별할 수 없는 우리가 된다. 조금 단순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네모였다가 동그라미였다가 모양이 변하는데도 너”라고 느끼는 만큼의 너를 끌어안은 채 서로의 끝(경계), 서로의 담장을 짊어진 파수꾼이 된다(「지붕 버리기」). 나의 테두리가 아니라 너의 테두리를 지킬 때, 비로소 너는 내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된다. 그러니까, 마침내 도달한 우리라는 인식 안에는 이런 우주와도 같은 과정이 무수하게, 정말 무수하게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무한한 풍경을 상상하면 이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고, 또 끔찍하기도 한 것이다. (이상 우다영 소설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김석영 시의 공간에서 인상적인 것은 독특한 유동성이다. 오브제들이 이동하고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른바 화자, 자아, 주체가 망명이라도 하듯 포지션이 변모하고 있다. 양자는 자리를 바꾸고 회전한다. 연결, 공모, 한 몸, 암전 등등의 말들은 “식물이 되어 간다” “동물이 되어 간다”와 같이 주체의 ‘-되기’ 현장으로 들어가는 키워드이다(「드라이플라워」). 주체는 더 이상 주체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타자가 되어 대상들과 섞인다. 이 탈경계의 장이 김석영 시의 공간이다. 주지하다시피 ‘-되기’ 현상이란 들뢰즈에서 주체의 탈출을 위해 모색되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지만 김석영 시에서 이것은 사물과의 비의도적 공모에 가까워 보인다. 대상과 대상 간의, 대상과 주체 간의 유연한, 순간적 교차 이동이 거의 자율적으로 발생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밤은 이러한 혼효 과정을 통해 균질화된 존재들이 재배치되는 무대이다. 밤이라는 수평의 위용, 수평의 영향권 안에서 모두 흐릿한 존재가 되어 간다. 밤의 수평 지대 안에서 개별적 존재의 우위가 “흐릿한 자세”로 사라지는 것이다(「창백」). 존재의 돌출은 존재의 탈각 속으로 휩쓸려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같은 장으로 이루어졌다/아무 곳이나 펼쳐도 똑같은 색깔이 흘러내”린다(「셔틀콕」). 이러한 존재 지우기는 시집 전체에서 섬세하고 유니크하게 진행된다. 시에서 언제나 튀어나오게 마련인, 주기적으로 출현하는 주체의 강화에 선명하게 반대되는 방향이다. 이 방향이 예비하는 해방의 흐름도 그러므로 매우 다를 것이다. 구별을 회피함으로써 드넓어진 순간성과 임의성을 우리가 미래의 해방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수명(시인)
•― 시인의 말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순간 알게 되는 바닥이 있다.
•― 저자 소개
김석영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시와 반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밤의 영향권>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구멍 – 11
상자 – 12
창백 – 14
아키타이프 – 16
타일 – 18
어떤 대화 – 20
선의 방향 – 22
돌 – 24
영향권 – 26
제2부
스크래치 – 31
다시 말을 걸고 싶어서 – 32
형태맹 – 34
빛과 물질 – 36
셔틀콕 – 38
시멘트 – 40
토르소 – 42
사물의 입장 – 44
전조 – 46
나는 왜 기차에 의문을 품는가 – 48
붉고 무거운 벽돌 – 50
도구와 폭식 – 52
결점과(缺點果) - 53
물의 뼈 – 54
플레이콘 – 56
제3부
커브 – 61
중립 – 62
채플 시간 – 64
밤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도록 – 66
토르소 – 68
파수꾼 – 70
수집가 – 72
모두를 위한 비가 아니듯 – 74
모르는 얼굴 – 76
우산을 펼치려다 말고 – 78
싱크홀 – 80
화병 – 81
거짓말보다 빛났던 – 82
제4부
아스피린 – 87
주머니 – 88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 90
긴 – 92
드라이플라워 – 94
바닥이 있다는 걸 – 96
빵 없이 버티는 오후 두 시 – 98
양말 속에서 모두가 편안한 밤 – 100
지붕 버리기 – 102
더 환한 밤이 우리에게 – 104
해설 우다영 우리가 우리일 때 우리 아닌 것은 어디에 – 106
•― 시집 속의 시 세 편
영향권
부풀어 오르는 커튼을 보고 있다
불행을 잃어버린 세계처럼 환하게 앓고 있는
바람은 흩어지고 부서져
그 연약한 것에 제 몸을 기댄다
집 전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새들은 차례대로 웃는다
서로 다른 시차로 조금씩 어긋난다
한 면을 떼어 버린
구처럼
드러나면 초라하지만
말 없는 포로와 한 몸이 되어 간다
커튼이 줄어드는 동안
바람이 점점 커지고
나에게 닿지 않고도 나를 밀어낸다
몸 안팎을 들락거리는 무게
계속해서 굴러가려고
나는 그 무게에 휩쓸린다 ■
빛과 물질
바다는 홀로 빛난다
물결이 바다를 떠 있게 한다
빛의 가루처럼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공중에서 반짝인다
뜨거운 모래 위 돌처럼 엎드려 있는 몸
태초의 자세를 뒤엎듯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빛
바다의 어두운 색깔이 모래 속으로 스며든다
모래와 물은 긴밀히 만난다
원래 하나였다는 듯
해변을 따라 걸어가는 연인들의
발밑으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 미로가
수천 개로 갈라진다
사라지는 발자국처럼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위해
물가에 서 있다
바다가 바닥을 데리고 간다
●빛과 물질: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변용. ■
더 환한 밤이 우리에게
우리는 생략될 때 서로를 읽는다
붙어 있는 페이지와 페이지를 떨어뜨리자
다시 똑같아지는 밤
다시 또 달라지는 밤
그것은 자주 지워졌다
입을 벌리면, 목젖 너머 파묻혀 있던 그것이
고개를 내밀어 공중을 떠다녔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골몰했다
왜 생각했지
왜 생각지도 못한 기억들만 기록했지
감춰진 페이지에서 발견한, 푸른 향이 나는 곰팡이
우리 중에 그것은 존재했다 두 사람일 때
하나는 외로워서 나머지를 껴안았다
자주 사용하느라 고독해진 쉼표들과 이미 넘쳐서 고요한 말줄임표들
우리 가운데 잘못 읽어 온 삶처럼 거대해지는 숨이 끼어들고
도로에 싱크홀 같은 밤이 파여 있다
더 환한 밤이 우리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