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죽임을 당할 때에도 Date 2019. 6. 16 Text Rev 2,12-16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 오늘이 무슨 주일입니까? 네~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자를 기념하라고 했으니 그분들이 어떻게 순교하셨는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순교자들의 이름 정도는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국감리교회의 순교자 중에 아는 이름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지요. 열 분만 말씀하실 수 있으면 최고상을 드리겠습니다. 순교자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다가 돌아가시면 순교라고 하지 않고 ‘순직’이라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은 ‘순국’이라고 하겠지요? 남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분들은? ‘순남편’? ‘열녀’라고 하지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훌륭한 감리교인들 중에 아는 이름 한 번 말씀해 보시라고요.(신석구 목사님이 게십니다. 최인규 권사님이 계시고요. 철원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님이 계십니다. 철원제일교회 강종근 목사, 영원한 누나 유관순, 최초의 한국인 목사 김창식 목사 김유순 감독, 양주삼총리사, 이천 의병장 전도사 구연영 부자, 시베리아선교사 김영학 목사 등이 있습니다.
순교자기념주일은 그냥 그 이름 자체만으로 우리를 숙연하게 하고 자신의 신앙을 진진하게 돌아보게 하며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옵니다. 이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선 이분은 ‘버가모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라고 하였습니다. 버가모라는 지역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버가모는 제우스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비너스 신전, 의신(医神)인 뱀의 신을 섬기는 쓰스 신전, 자손의 복을 준다는 베스타 신전, 술의 신을 섬기는 박카스 신전 등이 다 있어서, 마치 신들의 집합소와 같은 곳입니다. 박카스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 신으로 술의 신, 황홀경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버가모라는 이름의 뜻은 ‘세상과 결혼하다’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세상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문화, 의료, 교육의 중심지가 버가모였습니다. 당시 양피지 가공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던지 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20만 권의 서적을 보유했던 도시가 버가모였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교육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로마 총독이 주재한 도시로 아시아의 수도에 해당하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순교자 안디바는 버가모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안디바는 ‘안티-파스’의 번역인데, 안티는 반대하다는 뜻이지요. 파스는 아버지, 혹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안디바는 ‘모든 사람을 대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사는 동네에 살면서 세상을 반대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것만 봐도 안디바라는 사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는 그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지, 스스로 세상과 짝하며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의 신앙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안디바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안디바를 처형대에 세우기 위해 심문을 합니다. “안디바! 이것을 알라! 온 세상이 너를 적대하고 있다!” 그 말에 안디바는 이렇게 용감하게 자신의 믿음을 외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온 세상에 맞서 예수를 만주의 주로 시인하노라.”(Then I am against the whole world! I believe in Jejus, the Lord of Lords!“ 어떻습니까? 안디바라는 이름이 그의 대답과 너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하는 것 두렵지도 않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나도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반대하니까’라는 믿음과 결단이 안디바의 믿음이고 곧 순교자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버가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사는 부산이 ‘버가모’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가정이 버가모일지도 모르지요. 세상이 좋아 세상과 결혼한 나라, 그런 도시, 그런 가정이 버가모 가정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버가모가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순교자기념주일에 진정으로 은혜를 받으려 한다면 ‘안디바’라는 이름으로 살 것을 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버가모 세상’에서 ‘안디바 이름’으로 살 것이다.”
3.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네~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모두 안디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이지요?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에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잘했지요?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 박수 한 번 보내줍시다. 그분들 모두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니 저 하늘나라에 있는 당시 버가모교회 성도들에게 박수를 보내드리자고요.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아니지만 버가모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안디바 믿음에 동조하고 안디바 믿음을 자신도 갖기 원하며 안디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낸 많은 선배 신앙인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십시다. 박수~~ ‘잘했습니다. 자알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받아 마땅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런데 사실은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안디바는 원래 석공이었다고 하지요. 돌을 조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버가모에 신전이 많다보니 세울 우상도 많아서 석물이 많이 필요했답니다. 많은 석공들이 버가모에 와서 석물공장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석공으로 소문난 한 사람 ‘안디바’라는 석공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절대로 그 신전에 세우는 석상은 손을 대지 않는 겁니다. 한번은 로마 관리가 안디바에게 와서 아스크레피온 신상을 조각해달라고 하면서 이번 일을 잘 하며 장기계약을 맺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안디바는 절대 자신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미신 신당에 세우는 일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더니, 화가 난 로마 관리는 안디바를 잡아 처형을 합니다.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소 형상을 한 놋가마에 안디바를 집어넣고서는 모든 시민들이 보는 중에 물로 끓여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모두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 무시무시하고 고통스러운 처형을 보며 오금이 저리지 않겠습니까? 미신의 형상인 소 형상의 끓는 가마솥에서 순교를 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버가모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 공포스러운 장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꺾지 못했다는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한 번 더 읽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할렐루야~
여러분, 비록 순교자기념주일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안디바와 버가모교회 성도들의 순교 장면을 봅니다만, 우리들도 이 순교 장면을 보며 믿음의 최후승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담대하게 이겨나가겠다는 각오가 생기고 결단을 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으니 나도 지리라’라는 다짐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원수들이 미워하나 염려할 것 없도다’(찬송367장)
4.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안디바 믿음, 즉 세상을 대적하는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의 미혹에 넘어갈 수 있는 위험은 항상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외부의 강력한 핍박보다 내부의 은밀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미혹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태풍이 벗기지 못하는 옷을 따뜻한 봄바람은 스스로 옷을 벗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특히 세상과 결론했다고 말할 정도의 21세기 버가모 사회에 사는 성도들은 명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알아야 합니다. 이단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박해하는 세속 정권이 기독교를 문 닫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7-80년 긴긴 세월동안 교회를 박멸하려고 했던 북한에도 여전히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점점 세상을 닮아가게 하는 발람의 교훈, 영지주의자로써 영혼과 영적인 지식을 중시한 나머지 육신의 삶을 방탕으로 이끌었던 니골라 당의 교훈이 교회내부에서 은근슬쩍 자라나게 되면 그 폐해가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 안에 은근슬쩍 자리 잡고 있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주님의 말씀의 검으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사도바울께서는 이 말씀의 검을 성령의 검(엡6,17)이라 하였고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쪼갠다(히4,12)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순교자의 신앙 따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직 말씀만을 길로 삼아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