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유일한 성경적인 백성인가? 성경적인 여러 책의 백성인가?
♦마음 열기
*찬양의 시간: 찬미가 236장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세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생각 열기
디모데후서 3:15-17: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재림교회 신앙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1. 양극화된 신학적 상황: 1920년대는 미국의 개신교에게 특별히 충격적인 기간이었다. 미국의 개신교회는 반세기동안에 점차 근본주의자, 근대주의자로 나눠지게 되었다.
양진영이 서로 대립했던 핵심 쟁점은 근대의 지성적 발전들과 기독교사상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근대주의자들은 근대의 사조들에 대하여 수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자유주의 교회들은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철학들을 수용하였고, 그런 것들을 마치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방법”인 것처럼 여기고 자신들의 신앙체계 속에 통합시켰다. 같은 시기에 교단은 정체성과 관련한 세 번째 중요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재림교회 신앙에서 근본주의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근대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영감론을 버림으로써 성경을 어떤 초자연적 섭리가 게재되어 있지 않은 인간의 작품으로 보았다. 그들은 성경연구에 일반적인 문헌연구에서 사용하는 근대의 철학적 전제들을 적용하였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158)
근대주의를 떠받치는 전제들의 중심이 된 것은 이성의 권위와 근대과학의 성취들이었다. 이에 따른 자유주의 신앙체계는 이성적이지 않거나 과학적이지 않은 것들을 성경에서 제거시켰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 동정녀 탄생, 재림, 기적, 그리고 대속적 속죄와 같은 신조들이 희생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일에 무슨 의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제기하였다. 그러한 사상은 그들에게 불합리한 것이었다. 20세기의 첫 20년 동안에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1920년대에 이르러 그 진영은 근본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근본주의자들이 강조한 교리들과 쟁점들은 근대주의자(자유주의자)들이 부인했던 것들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의 신조들은 각 그룹들마다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이 대속적 속죄, 육신의 부활, 그리고 기적의 확실성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세대주의자들과 같은 몇몇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중심 신조 목록에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신앙을 추가했으며, 아울러 진화론의 대안으로 창조론을 매우 강조하였다. 근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많은 이슈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적 권위의 문제야말로 다른 모든 문제들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결국 “자유주의자들이 인간의 이성의 권위를 내세워 성경의 권위를 거절함으로써 기독교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이 성경에 대한 개념, 즉 성경을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논쟁의 핵심적 사안으로 삼았다.
어떤 논쟁에나 종종 나타나듯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과도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해 과도하게 대응하는 나머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원본은 예언자의 펜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낱말 하나하나가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것이었고 실제적인 오류의 가능서이 전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에서도 존재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양극화는 항상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다. 기독교 역사에는 반대자에 대항하는 신학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신학적 견해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던 사례들이 가득 차 있다. 재림교회에서도 1888년의 위기 속에서 그러한 후유증들이 나타났다. 재림교회가 1920년대에 영감론과 관련된 교리적 스펙트럼의 극단인 축자영감과 성경무오의 입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던 경우라 할 것이다. (상게서, 159)
2. 재림교회 신앙이 영감론에 대하여 완고한 입장으로 나아감: 재림교회 안에는 항상 축자영감과 성경의 무오성을 지지하는 하나의 그룹이 있었다. 윌리엄 화잇이 1928년에 쓴 글에 따르면, 프레스콧에 의해 1880년대 후반에 축자영감론이 재림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견해가 “해스켈장로를 포함하여 배틀크릭릭 대학 학생들과 많은 재림교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우리 사업에 여러 가지 의혹과 혼란이 가중되었다.”(3SM 454). 그런데 이때가 축자영감론이 재림교회 신앙에 들어온 때였다는 위릴엄 화잇의 견해는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재림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축자영감설을 믿는 재림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윌리엄 화잇이 1920년대 말에 이르러 그 이슈로 인해 교회가 겪어야 했던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지적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재림교회의 지도자들 전부가 영감에 대하여 근본주의적 입장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초창기 몇몇 지도자들은 더욱더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엘렌 화잇도 그 그룹에 속해있었다는 점이다.
화잇부인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해서 “내가 비록 주의 영에 의지해 받은 이상들을 기록하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내가 보았던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낱말들은 나의 것이다. 천사가 내게 말해준것들을 나는 항상 인용부호로 표시해 두었는데, 만일 그렇게 표시된 것이 아니라면 그 낱말들은 모두 나의 것이다.”(RH, Oct. 8, 1867, 260).
재림교회는 사상영감론과 축자영감론의 문제에 있어서 엘렌 화잇이 지지했던 입장을 1883년 대총회 회의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채택하였다. 그 결의문의 일부분은 이렇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주신 빛은 정신의 계몽의 의한 것, 즉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사상에 의한 것이요 그 사상을 표현한 낱말에 의한 것이 아니다.”(RH, Nov. 27. 1883, 741).
엘렌 화잇은 축자영감론을 거절 했을 뿐만 아니라 무오설도 함께 부인했다. 그래서 그녀는 1911년에 각시대의 대쟁투를 개정할 때 그 책 안에 있는 실제적인 오류들을 기꺼이 수종했다. 그 개정판은 재림교회의 진영에 있던 축자영감론자들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164)
3. 유일한 성경의 백성인가? 성경적인 여러 책의 백성인가?: 1920년대에 영감론의 영역에서 두 번째 문제는 엘렌 화잇의 저술에 기초하여 신학을 세우고, 그녀의 책들을 성경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권위를 지닌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속적인 유혹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분명히 그녀가 평생토록 권면해온 내용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죽었고, 많은 재림교인들은 그녀의 저서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을 내세웠다.
벤슨은 1919년의 성경대회에서 “우리는 지역교회에서 성경보다도 예언의 신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으며, 우리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다니엘스도 동일한 취지에서 “우리가 성경의 이해에 대하여 우리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취하는 그리스도인적 태도로 엘렌 화잇의 증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우리와 다른 입장을 가진 형제들을 대한다면” 재림교회 신앙 안에 상당한 진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레스콧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바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되지만, 만일 그가 엘렌 화잇의 증언에 대하여 축자영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가 빗나간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나는 이러한 입장은 건전치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언이 신을 성경 이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 8:13의 ”매일“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프레스콧, 다니엘스, 윌리엄 화잇 등과 더불어 논쟁을 벌였던 홈즈와 와쉬번같은 사람들은 반대 진영에 서 있었다. 사실 엘렌 화잇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이 자신의 저서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쉬번과 홈즈는 엘렌 화잇의 저서에 대한 무오와 축자영감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들의 무리 속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한 위험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을 확실하게 해결해야만 한다. 그 위험은 바로 화잇 자매에게는 역사적인 권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화잇의 저서들은 모두 성경이었다.“ 그들은 엘렌 화잇의 영감에 대한 다니엘스의 온건한 입장을 문제 삼아 1922년에 그를 대총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상게서, 169)
엘렌 화잇의 저서들을 재림교회 신앙의 중심자리에 놓는 일은 홈스나 와쉬번과 같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사만은 아니었다. 재림운동의 중심에 있던 지도자들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윌콕스는 1921년에 화잇의 저서들이 ”성경에 대한 영적인 주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또 1946년에는 화잇의 저서들이 성경에 대한 영감 받은 주석”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은 갈라디아서의 율법을 둘러싼 1888년의 논쟁이나 “매일”의 논쟁과 관련해서 엘렌 화잇이 추구했던 입장보다는 1890년대에 존스가 취했던 입장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많은 재림신자들은 그 주제에 있어서 교단의 역사로부터 많은 교훈들을 배우지 못했다.
다니엘스는 계속해서 올바른 관점을 피력했다.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성경 자체를 탐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몇 몇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언의 신이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에게 모든 가르침을 베풀고 모든 교리들을 주었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매우 고통스럽다. ... 그런 것은 예언의 신 자체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서 이 성경 말씀들을 연구했고, 그 말씀으로부터 가르침과 교리들을 얻을때까지 그들이 얼마나 기도했는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그는 “엘렌 화잇의 증언에서 한 가지 진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뒤지면서도 심도 있는 성경연구에는 시간을 쓰지 않으려는 재림교인들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했다.”(1919 BC, July 30, 9-11).
1920년대에 재림교회가 경험한 가장 큰 비극의 하나는 다니엘스가 기초를 다져놓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타당한 입장을 그 후에 대다수의 재림교인들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대를 지배했던 것은 오히려 홈즈, 와시번, 윌콕스가 지지했던 입장이었다. 재림교회의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은 모두 그러한 입장에 따라서 너무도 자주 “더 작은 빛”을 실제로는 성경보다 “더 큰 빛”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엘렌 화잇의 저술들을 사용했다. 축자영감과 엄격한 무오성을 따르는 사상적 경향은 192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재림교회의 신학을 지배하였다. 원래 성경의 백성으로 출발했던 재림교회는 점점 더 “책들”의 백성이 되었다. 재림교인들은 그 주제에 대하여 자신들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망각하였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171)
♦ 적용하기
1.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나의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조명을 의지하며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2.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펜’처럼 축자영감된 것이 아닌 기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사상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통해 무엇을 느낍니까?
3. 나는 예언의 신을 성경과 같은 혹은 더 높은 권위를 두고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적은 없습니까?
4. 나는 성경을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 기도시간
1. 날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체험하도록
2. 큰 빛인 성경과 작은 빛인 예언의 신을 적절하고 균형지게 사용하도록
3. 오늘 깨달은 내용과 함께 개인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