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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祭祀) 또는 제례(祭禮)는 천지신명을 비롯한 신령이나 죽은 이의 넋에게 제물(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표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설날이나 추석에 드리는 제사를 차례라고 부른다.
차례(茶禮)는 가정마다 설날과 추석에 아침 일찍이 지내는 약식 제사를 말한다. 일반적인 제사와는 다르다. 가풍에 따라 정월 대보름, 초파일, 단오, 백중, 동지에도 차례를 지내는 집이 있다.
상 뒤로는 병풍을 둘러치고 지방(紙榜)을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를 제사상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이천식천과 비거니즘
글 : 김용휘 선생
2021년 10월 2일
‘이천식천(以天食天)’은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가 하늘이기에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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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내 안에서 그 생명을 도로 살려내는 것이 이천식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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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비록 다른 생명을 먹더라도 그 목숨에 값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생명이 내 안에서 더 크게 살아나게 하는 것, 남의 목숨을 먹은 만큼 나의 삶이 더 거룩해져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권정생의 『빼떼기』
권정생 선생의 그림책 “빼떼기”는 엄마 닭을 따라 아궁이 앞을 지나던 병아리 한 마리가 아궁이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솜털이 모두 타버린 병아리 ‘빼떼기’와 그런 ‘빼떼기’를 식구처럼 돌보는 순진이네의 이야기다.
다른 닭은 성장하여 다 팔려 갔지만, 빼떼기는 흉칙한 모습 때문에 살 사람도 없어서 순진이네와 한 식구로 살아간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모두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이 되자, 순진이네는 빼떼기를 어떻게 해야 할 지로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결국 빼떼기를 잡아먹는 선택을 한다.
권정생 선생은 이 『빼떼기』를 통해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품어주고 챙겨주면서 어우러져 가는 모습을 가슴 먹먹하게 그리고 있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권정생 선생의 이 그림책을 보면서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이 생각났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가 하늘이기에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강자는 약자를 마구 잡아먹어도 된다는 적자생존의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도 하늘이지만, 우리가 먹는 식물과 동물도 모두 하늘이다. 비록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지만, 그 존재도 하늘처럼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먹는 행위 자체를 신성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 이천식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남기고 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 거니까 뭐 기도 드리고 말고도 없이, 이미 하늘이야. 그런데, 우주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락 하나가 안되잖아요. 나락이 작다고 해서 그게 결코 작은 게 아니지. 그러니 생명운동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대소개념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지. 크고 작은 것을 초월해야 하고, 선악을 초월해야 하겠지.
풀 하나도 우주 전체의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엄연히 존재하는 바에야 풀 하나에도 섬김이 가야 되잖아.
귀한 것은 생명이라는 거지. 나락 한알에 우주가 함께 하신다고, 이천식천이라고 그러셨지. 그러니 지금 우리가 다 한울이 한울을 먹고 있는 거란 말이지. 엄청난 영광의 행사를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우리가 식사할 때마다 거룩하고 영광된 제사를 지내는 거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게 천국이 아니고 뭔가1.
이 쌀 속에 햇빛과 바람과 이슬이 담겨 있음을, 심지어는 지렁이와 온갖 미생물의 노고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풀 하나 돌 하나도 하늘이며, 나락 한알도 땅과 하늘이 없으면 여물지 않는다.
해월은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萬事知食一碗)”고 했다.
쌀알 하나가 영글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은 물론, 그 안에 사는 온갖 생명들과 바람, 비 등 전체 우주가 다 관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쌀 속에 햇빛과 바람과 이슬이 담겨 있음을, 심지어는 지렁이와 온갖 미생물의 노고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풀 하나 돌 하나도 하늘이며, 나락 한알도 땅과 하늘이 없으면 여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그 나락 하나가 하늘이다.
그래서 하늘이 하늘을 먹는 이 행위야말로 거룩한 성사(聖事)라는 것이다. 또한 음식을 먹는 행위는 내 안의 한울님을 모시고 봉양하는 영광된 제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천식천은 생명의 순환적인 상호 의존 관계를 알고, 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먹는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먹더라도 독식을 하거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결국 대사 작용을 통해서 번식, 성장, 활동, 변화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대사 작용은 대부분 먹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복잡한 먹이사슬을 통해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 하나가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의 도움과 희생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면 경이로운 생각마저 든다.
길희성은 “이천식천은 모든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거미줄 같은 유기적 관계망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오늘날의 생태학적 원리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2라고 하였다.
생명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하늘의 기운과 그리고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 혼자만 많이 먹겠다고 독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밥그릇을 뺏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이천식천이 아니라 이천역천(以天逆天)인 것이다.
이천식천은 하늘이 하늘 전체를 키우는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해월 선생은 이천식천을 다시 ‘동질적 기화’와 ‘이질적 기화’로 나눠 설명하면서 같은 바탕이 된 자는 서로 도움으로써 기운을 화하게 하고, 다른 바탕이 된 자는 서로를 먹이는 관계를 통해서 기운을 화하게 함으로써, 서로의 성장은 물론 우주 전체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늘은 한쪽편에서 동질적기화로 종속을 기르게 하고 한쪽편에서 이질적기화로써 종속과 종속의 서로 연결된 성장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니,3
동질적 기화와 이질적 기화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성장과 진화는, 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협동과 조화, 연대가 중요한 성장과 진화의 원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같은 진화론자 중에서도 다윈은 경쟁을 강조했고, 러시아의 생물학자 크로포트킨은 협동이 중요한 원리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 맞고 다른 쪽은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둘이 모두 맞는 말이다.
때로는 경쟁이, 때로는 협동이 서로의 성장과 진화를 매개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은 초월(超越)함으로써, 동질적인 것은 내포(內包)함으로써 진화가 이루어진다. 내포하면서 초월한다.
지금까지의 동일성을 포함하면서 현재의 자기 모습을 초월하여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성장·진화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알고 모든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내 안에서 그 생명을 도로 살려내는 것이 이천식천이다.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비록 다른 생명을 먹더라도 그 목숨에 값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생명이 내 안에서 더 크게 살아나게 하는 것, 남의 목숨을 먹은 만큼 나의 삶이 더 거룩해져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천식천은 또한 자기희생과 공생의 의미에 대한 강조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황종원은 이천식천의 의미를 깊이 천착하면서 “최시형이 꿈꾸었던 ‘하늘님’의 뜻에 따라 ‘하늘’이 ‘하늘’을 먹되, 그 먹히는 ‘하늘’을 늘 공경하고, 그에 대한 보답을 부단히 하는”4 자기희생과 공생의 삶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희생이라는 점에서 먹히는 하늘님과 백성, 여성, 어린이, 자연생명은 일치하며, 이들이 경인, 경물의 주된 대상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전희식은 이천식천을 “우리 모두는 이 우주 속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는 또 다른 나이며, 언젠가는 내 몸도 누군가의 먹이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5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내 몸도 누군가의 먹이로 내놓는다는 말은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체의 희생으로 나라는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처럼 이천식천은 생명의 성장과 진화의 원리이면서 더 큰 나를 키우기 위한 자기희생, 공존공생의 생명윤리적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하겠다.
김종철은 무위당 장일순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시형을 ‘이천식천의 사상가’로 명명하면서 “해월에서 장일순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은 한국의 근현대 정신사에서 참으로 희귀한 사상의 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해월 선생의 이천식천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비할 수 없는 심오한 종교적 감수성”6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천식천은 생명의 순환적 원리임과 동시에 하늘 전체를 성장 진화케 하는 원리이다.
생명의 순환이치와 상호 의존성을 알고 모든 존재를 소중하게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먹는 것의 신성함과 공생의 삶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천식천은 적자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몸을 언젠가는 기꺼이 내놓는 자기희생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나라는 개체 생명에 한정된 의식을 벗고 우주의 전체 생명이라는 보다 초월적 시각에서 생과 사를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우주 속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는 또 다른 나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비거니즘을 넘어
비거니즘은 단순히 채식을 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모든 삶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거대 자본에 저항하면서 다른 생명들과 지구을 살리는 적극적인 생태적 삶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이천식천과도 매우 상통한다.
끝으로 이천식천과 관련하여 ‘비거니즘(Veganism)’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비거니즘은 단순한 채식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소비자 운동이다.7
오늘날 MZ 세대 사이에서도 비거니즘이 확산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축산 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면서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식탁 위에 올라오는 고기들을 만들기 위해 공장식 축산의 비인도적 산업으로 많은 동물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분별하게 죽어가고 있다.
때문에 비거니즘은 단순히 채식을 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모든 삶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거대 자본에 저항하면서 다른 생명들과 지구을 살리는 적극적인 생태적 삶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이천식천과도 매우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천식천은 위에서 논했듯이 반드시 채식주의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가급적 채식을 위주로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원리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그 또한 근본주의적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빼떼기’ 이야기처럼,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존재가 거룩한 하늘이라는 자각, 감사와 공경으로 모든 생명을 대하는 마음,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더 거룩하게 살려내겠다는 다짐과 생명 살림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채식주의를 넘어 적극적 비거니즘은 바로 이러한 이천식천의 생명 원리, 지구 살림의 거룩한 마음과 만나, 삶을 수행으로 대하고 소아적 삶을 대아적 삶으로 확장해내는 자기 초월 운동으로 승화되길, 그래서 우리의 문명을 진정으로 품격 있게 만드는 전환적 ‘삶의 기술’로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크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장일순, 「한살림운동과 공생의 논리, (김종철과의 대담)」, 『나락 한알 속의 우주』, 180~182쪽
길희성, 앞의 글, 21쪽.
최시형, 『해월신사법설』, 「이천식천」,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1993), 365쪽.
황종원, 「최시형 ‘식(食)’ 사상의 종교생태학적 의의」, 『신종교연구』제 26집, 2012. 140쪽.
전희식, <프레시안>, “가축=고기? 적게 키우고 덜 먹어야 산다” 2011-03-14.9
김종철, 「나락한알 속의 우주」, 『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 1999, 217쪽. ; 이용포 지음, 『생명사상의 큰 스승, 무위당 장일순』, 작은씨앗, 2011, 23쪽.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
김용휘
동학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천도교한울연대 공동대표, 방정환한울학교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 대표. 대구대 교수. 2018년부터 2년간 인도 오로빌공동체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경주에 정착해서 두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천식천과 비거니즘 by 김용휘
지혜의 다르마, 불살생과 채식을 말하다
박정규 · 2021년 10월 02일
불교는 말한다.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처럼 관계를 통해 존재하며, 고정된 실체없이 조건에 따라 끝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되면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연결된 한몸, 한생이기에 자비의 마음으로 상생의 삶을 살게 된다. 필요한 만큼 소욕지족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한다. 나 한사람으로부터의 깊은 자각에서 시작하여 서로 소통과 연대, 다양한 실천을 통해 공동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