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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멱은 우리나라 불고기의 옛날 이름이다. 한자로 눈 설(雪), 밤 야(夜), 찾을 멱(覓) 자를 쓰는데 눈 내리는 밤, 친구를 찾아가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얼핏 듣기에 무척 낭만적일 것 같지만 사실 시적인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고사의 배경은 이렇다.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신하이자 친구이며 장군인 조보를 찾아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두 사람은 밤하늘에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긴 것이 아니라 반란군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혹시 모를 첩자의 눈과 귀를 속이려고 숯불에다 고기를 구워 먹으며 한담을 나누는 척한 것이다.
그런데 조상님들은 왜 우리나라 숯불구이 불고기에다 전혀 관계도 없는 중국 송 태조의 고사를 끌어다가 설야멱이라 부른 것일까?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겠는데 고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눈 오는 날 친구들과 함께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이 아주 낭만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선비들이 겨울이 되면 친구들끼리 모여 화로에 둘러앉아 숯불을 피워놓고 갖은 양념을 한 고기를 꼬치에 굽거나 석쇠, 또는 전골에 올려놓고 먹으며 시를 읊고 담소를 나누는 풍속이 유행했다. 특히 날씨가 추워지는 음력 10월 1일은 특별히 고기를 구워 먹는 날이었는데, 화로에 불을 피운 후 회식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난로회(暖爐會)라고 했다. 당시 풍경이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의 글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눈 내리는 날 밤, 벗과 함께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난로회를 가졌는데 방 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 마늘, 그리고 고기 굽는 냄새가 온몸에 배었다. 벗이 북쪽 창문으로 가서 부채를 부치며 말하기를 “맑고 시원한 곳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멀지 않구나”라고 했다.
친구와 맛난 음식을 먹으며 속마음을 나누는 것이 바로 신선이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한 것인데, 몇몇 장면만 바꾸면 퇴근 후, 혹은 주말에 가족과 함께 등심이나 삼겹살 구워 먹는 모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면 신선처럼 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숯불구이의 옛날 별명이 설야멱인 것은 송 태조가 먹었다는 숯불구이가 바로 고려의 숯불구이 불고기였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숯불구이 불고기는 옛날부터 중국에서 유명했다. 고려의 불고기는 수출 품목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고려 임금이 원나라에 장가를 들기 시작한 이후부터 탐라의 소고기를 직접 가져간 것은 물론이고 고기를 굽는 요리사도 함께 따라갔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숙수가 원나라까지 가서 본고장 숯불구이 맛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숯불구이가 중원의 입맛을 사로잡은 시기는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숯불구이 불고기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음식이 ‘맥적’으로 1세기 때, 《석명》이라는 한자 사전에는 ‘맥족이 먹는 방식으로 굽는다’는 뜻의 맥적(貊炙)이라는 단어가 실려 있다. 맥족은 고구려와 부여의 구성원이고, 맥적은 지금의 바비큐와 비슷한 통구이니까 고구려식 숯불구이 통구이가 한자 사전에 오른 것이다.
4세기 진나라 때 간보는 《수신기》에서 “중원의 귀족과 부자들이 자기 것을 버리고 너무 외국 음식만 즐겨 먹는다”고 우려했는데, 바로 고구려의 숯불구이와 티베트의 양고기찜을 두고 한 말이다. 요즘 어린이들이 김치를 먹지 않고 치즈만 좋아한다며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2천 년 전 고구려의 한 부족이 먹었다는 맥적을 지금 우리가 먹는 불고기의 원조라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따지고 보면 1세기 때의 맥적이나 고려와 조선시대의 설야멱은 지금 먹는 불고기와는 전혀 다른 음식일 수도 있다. 음식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요리법, 조리 도구의 발달로 인해 진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불고기라는 용어 역시 1920년대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니 불고기와 설야멱, 맥적이 동일한 음식이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지만 불고기의 기원이 맥적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