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일생 잊을 수 없는 기념일, 어굴한 일, 속터지는 일 등. 많은 기억해야하는 사사건건 없는 사람
없겠으나, 나 만큼 뼈에 사모치는 졸업식을 맞아본 사람도 흔치않으리라 생각하고, 망각의 은총 주신 하나님께 송구스러움
금할 길 없어도 이제 이세상 떠날 날도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이 경험을 기록으로 세상에 남겨두고 싶은 못 된 충동에서 못 쓰는 글이나마 간략히 여기 게시판에 등재함을 용서바랍니다.
가진 서로움과 고통속에서 남한에 일가 친척이라곤 거이 없는 고아 아닌 생 고아로, 고학 해서라도 졸업을 꼭 하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의학공부에 뚜어 드렀다 해도, 돈도 문제이지만 공부에 드는 그 정성과 노력이 다른 전문분야에 비해 힘들기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공부하는 그 정신자세도 자기위함 아니고 남을 위함이요, 그래 자기희생의 고귀함이 점차로 배양되도록 노력함이 대단히 주요함을 감안하다면, 참으로 어려운 것이 의성 희포크라테스의 성서로 십자가 지는 그 태도인것이다. 그런 각오도 없이 무턱대고 누구나 사정은 있겠지만 자기분수도 모른채. 재력, 명예, 생활보장, 등에 눈이 어두어 의학을 특히나 고학하면서까지 이 야망을 쟁취하는데 무모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부터 머리속에 넣어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밭의 이길을 끝내 이탈 안 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얻은 기쁨도 잠시동안, 나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준 잊지못할 하나님의 졸업선물은 의사면허증이 아니고 허영심과 화려함과 성취감의 교착의 난무함이 였음을 고백하는 바다.
8.15해방전에 하얼빈에서 대학1년의 의학공부 하다, 해방과 더불어 부득 단신으로 귀국하여 나의 가족을 위하고 내 꿈을 실현하기위한 의대 편입에 성공함으로 시작된, 가시밭 길은 내 따나 굳은 의지력으로 목적은 달성했지만, 병약 했던 어머님의 병을 고치기위한다는 작은 한부분의 그 목적도, 불쌍한 내 어머님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이 된 결과가, 퍽으나 가슴아프게 지금도 내 불효가 부끄롭기 이를데 없지만, 그 어려웠던 해방직후의 남한 실정에 비추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하는 것은 여러분이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이라하겠지요만,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약하고, 고 여해 강모 목사님의 고학생 모여 하나니 섬겼던 야곱 전도관(지금의 경동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장학금을 위시하여, 교회창고방(6척인간 한사람이나 누우면 꽉차는)에서, 혹은 공제회라는 귀신 나올것 같은 험한 고학생 수용소같은 곳에서, 자취하거나 남몰래 하루 한 두기 굻고 산 것은 예사로하고, 작은 장사나 알바 을 가림 없이 해 나가던 고학 그 자체도, 자살이나 이북 고향으로 월북할까 까지 생각하면서도 오로지 기도로 밤내내 하나님께 원망과 긍휼의 뒤섞인 기도로 교회서 눈물짓던 일들!! 노트한권사기 힘들어 강의를 휴지얻어서 필기하거나, 버려진 장부책들을 싼값에 구해서 여백 빈자리에 필기하는 등,
학교서 일터서 밤늦게 돌아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호롱 불 밑의 공제회관 방에서, 종이에 필기한 강의내용이 잘 안 보여 눈물흐리던 일, 노상서 양담배 판매하다 경찰관에게 가짜 학생으로 오인받아, 귓방마이 얻어 터지고 경찰의 학교조회서 풀려나는 등, 요리집 기생에게 화장품 팔다 도리어 손님에게 받은 그 팀을 그자리에서 건너면서 자기 동생도 고학하는 대학생인데 동생 생각나서 주는 것이니, 고학에 보태 쓰라고 넝짓이 건너주는 기생의 눈에는 ^^,,,
예거할 에피소트가 넘무 많아 졸업식 이야기가 빗 나가고 있음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런 이 고학생이 마지막 4학년 졸업반에서야 같은 교회 교인 가정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내는 등, 피 눈물나는 서러움과 초조와 배고픔과 외로움에서, 그나마 주님 의지하는 믿음 아니면 이미 무슨 끝장을 보았을 터인데. 대학서 주는 장학금과 교회서 준(졸업무렵)장학금 등이 각고의 내인생에 큰 보탬 되어 턱거리로 이런 위기를 탈출?, 상처뿐인 내 대학생활에 종지부를 찍게될 바로 49년7월16일이 밝아온 것이었는데..
가졸업 제도로 4월에 이미 서울대학병원 제1외고 교실 무급조수로(지금의 인턴)합격되어 주임교수님의 배려로 입원실을 임시 숙직실로 배정 받아, 집없는 병아리 의사가 만년 당직에 자기 거처로 사용도 한 바 됬지만, 그곳에서 신사복 커녕 제대로 된 학생복도아닌 헌옷을 그대로 입고 오로지 이제 나도 당당한 한 의사로서 내 삶을 주님 위해 바친다는(그런 믿음 이라도 있었기에)그 열정으로, 오늘의 상처뿐인 영광(어느 서양 권투선수의 영화제목과 같은)을 얻게되는 이 흥분을 누가 알아주랴만, 나는 일단 입원환자의 용태를 점검하여 의국장에게 보고할 준비 부터 하고는, 만년 당직의 덕으로 식권을 각과 선배들에게서 받고있기에, 홀아비, 베비 닥타의 애칭으로 삶의 체면유지와 함께, 내 새출발의 이 아침을 축복받으며 졸업식 시간을 기다렸던것,
오늘 서울대 제3회 전체합동졸업식이 물리대에서 거행하게된 것은, 당시 대통령 이시던 이승만 국부님의 문리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이 함께 거행되기때문이다. 그 찬란한 졸업식에 나는 먹고 자는 것 해결위해, 새벽에도 잠 제대로 못자고 환자 진료를 하고 식장에 와야 했지만,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되고 자랑스럽고 인간승리를 외칠 수 있는 이 날인데, 무슨 불만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흥분되어, 오로지 고동치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던 것 이해되시라 믿는다
.
그런데 나는 흰 까운을 벗고 의대 강당에 졸업생들과 함께 모였을 때, 내 초라한 모습에 부끄러운 생각이 앞섬을 몸소 느끼면서도, 태연한 척 정신을 차리고는 힘께 모인 졸업예정자들의 정열된 한 줄에 끼여들어, 바로 길 건너에 있었던 당시 물리대 관장에 들어서서 안으로 들어가 이에 준비된 우리 의과대학의 좌석에서 대기하고있었다. 나같은 북한인이 월남해서 편입하여 졸업하는 중의 고학생 몇사람이, 그 복장은 나같이 초라한 낡은 신사복 차림들이 었으나. 화난 미소에 그래도 꽃다발 든 애인들에서, 카메라 멘 가족, 친척들의 극진한 축하속에, 그 얼골엔 기쁨의 웃음꽃이 활작 피었고, 기념촬영에서 열열한 포옹까지하는!,,,. 아아~~근데 나는?
나는 아무리 두리벙 거려봐도 교회교우들도 한 분도 안 보이고, 만주 하얼빈에서 귀국한 하얼빈 지인들도 몇분 연락은 되나 뭐 잘 낫다고 초청할 처지도 안 되기에 그들 올리가 만무했고, 간접적으로 교회 강 목사님이 오신다는 소식 듣고 있었으나. 바쁘신 몸 이신 그 분의 참석은 별 기대도 안하였기에, 오로지 그 기뻐해야 할 와중에서도 여러가지로 당하고 보니, 외로움과 초라함이 갑자기 온 몸을 뒤엎는 기분!! 사진 한장 찍어주는 분도 안계셔(그래서 졸업사진이라곤 전 졸업생들의 단체사진 이 덜렁 한잔있네요) 멍하니 부러운 마음에서 구경만 하다가, 졸업식 대략 끝날 무렵까지 외로움과 초라함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왜 깨랅지 못했을까하고 내 믿음 약함을 이제와서 참회하니 무슨 소용) 엄청난 패망감만(왜 장하다고 생각못하고 말이다) 남모르게 눈물로 소리없이 흐느꼈던 기억이 난다만, 지금 이시간에도 다시 흐느끼면서 아내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느냐고 더둠거렸던 것 늙으면 주책 없이 논다더니. 참~~.
여하 간 아렇게해서 대열을 정돈하여 졸업생 일동이 의과대학 강당까지 돌아온 나는 꽃다벌 하나 없는 빈손의 나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이 느껴졌고 남들의 눈을 의식했다면~~응응~(왜울어. 주님게시는데~)
.나종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교회 몇 청년하고 강 목사님이 꽃다발 드시고 늦게 찾아오셔서 나를 찾았는데, 이미 대학병원으로 철수한 후 라 못 맞나고 떠나셨다는 이야기 듣고,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눈물로 위로 받기도 했지요.
내 숙소인 숙직실로 돌아와 그동안 참았던 서글픔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소리내서 울고있는데, 문 두두리는 소리가나서 급히 눈물 딱고 문 열고보니, 우리 경동교회 교인이고 이곳 우리 의대 대학부속 고등간호학교 졸업반의 4명의 간호학생이, 예쁜 꽃다발과 큰 성경책에 각자의 이름을 새겨서 들고 드러와서, 우울한 상태에 있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얼마나 고맙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 받은 기억이 생생한데, 이들이 돌아간 후에 나는 역시 평양 의전서 편입하여 홀어머니와 고생하며 공부하던 친구 불러서, 그와 함께 졸업 자축 위해 명동으로 향했다
.
내가 고학하면서 어려워할 때 우연히 하얼빈에서 나의 선친과 전하얼빈 동양교향악단원인 조선인들의 관현악 동호인 이던, 남한 교향악단에서는 첼로로 이름이 좀 알려저 있던 분으로, 모 음악다방을 명동입구에서 경영하면서, 여러 좋지않은 소문의 첼로리스트를 만나(그후에 모 여대음대교수까지하시던 분)곁으로는 친구의 아들이여서 고학중이기에 도와주려고 자기 자녀의 가정교사로 취업케함을 자랑으로 삼고, 내적으로는 다방지기와 자기의 경호원(제가 유도 유단자거든요.ㅎㅎ)으로, 레지아가씨 퇴근 후엔 저를 레지대신으로 손님 받게하는 등, 용돈커녕 본급도 없고,침구도 안주면서 추은날에도 불도 못 피우게하고, 찬 마루 바닥에서 쑈리와 자게하는 몰인정한 기업인?이 어디있었으며, 쑈파 위서 잔다고 스프링 만가진다고, 참아 나보고 뭐라 말 못하고 15세된 불쌍한 쑈리를 새벽에 다방으로 급습하여 증거잡아 쑈리를 마구 빳따로 두둘겨 패는 등, 결국 실컨 나는 밥만 먹여주고,쑈리와 레지들은 인권유린 당하는 등(그 행패는 상상에 마낌), 결국 이 다방을 튀쳐 나온바 있는 분통 터지던 생각이 나서 분을 못참고 이 분을 찾아간 것, 다방이 래스트랑이 된 내가 가정교사아닌 고용인으로 인권유린 당한곳에서, 친구와 식사중에, 그 교수라는 분이 나타났기에, 지난 당한 모욕을 분풀이 하려다가 그래도 어른이신 이분에게 믿는자로서의 행위 아님을 니우치고, 지난날에 잘 봐주신덕에 무사히 오늘 졸업식 끝내고 인사차 들였으니 감사함을 받아줄것을 요청한바, 그는 달다 쓰다 아무말 없이 뻔뻔스러히 자리를 피하였지만, 내 가슴속은 그 간의 그의 비신사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가 미운것이지, 사람까지 미워할 수 는 없었던것이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지나온 내 생애에 대한 사회적 도전의 적그리스도적인 내용을, 일일히 열거치 않은 것도, 내 이 상처뿐인 영광?에 대한 상이 하늘에서 클 것을 기대하면서, 망각 이란 잊어서 내보내는 것 임을 명심 하고, 하늘 나라의 진리가 우리의 모든 것임을 다시 알아야 하겠다고 7.16졸업 기념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해보는 귀한 날로 삼고져 한다. 감사합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