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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Gervase
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35)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말씀의 초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다. 사랑과 용서를 나누어야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 된다(제1독서).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신다. 율법에 따라 비둘기 한 쌍을 예물로 바치셨다.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뵙고 감격한다.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앞날을 예언하며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 구세주의 출현을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뵙고 감격합니다. 그는 구세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러한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서 신앙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봉헌 - 김혜림 수녀-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 우리 5남매를 두고 늘 “자식 다섯 중에 한 명쯤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막내인 내가 봐도 언니?·?오빠들 중에는 별로 수도나 사제성소의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새벽을 열며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요.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빠다킹신부 운전을 하면서 -조명연 신부- 운전을 하며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구원의 목격자 -허영엽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한테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콜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한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콜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콜베 신부는 스스로 희생과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었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일정기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정결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더불어 아이는 할례를 받습니다. 또한 첫아들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다시 주님께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주님께 봉헌토록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의롭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 표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이 말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께서 시메온의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점입니다. ‘과연 죽기 전에 꿈(메시아를 직접 뵙는 일)을 이루기나 할 것인가?’ 의심하던 시메온에게 성령께서는 '꼭 그렇게 될 것이다’고 확증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성령께서 시메온을 성전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인간’ 시메온이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시메온은 드디어 그가 평생에 걸쳐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아를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평생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인생의 최종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감격의 정도, 감개무량의 정도가 지나치면 할 말을 잃습니다. 메시아를 자신의 품에 안은 시메온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겨우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시메온은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기쁨,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지요. 그저 그렇게, 물에 물 탄 듯이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은총입니다. 시메온이 어떤 연유로 이런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웠습니다. 한 평생 성전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열렬히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또한 메시아 오심을 늘 깨어 기다렸습니다. 이런 시메온이었기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령께서 시메온과 늘 함께 하셨기에 그는 독실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의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한 평생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직접 뵙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소원의 성취는 꽤 늦게야 이뤄졌습니다. 거의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뜻은 끝까지 기다려봐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상당히 더디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회개합니다. 임종직전에 이르러야 하느님께 돌아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이 너무나 미미한 듯 보일지라도 인내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답답할지라도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간 그 이후에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할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그 시점에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성령 안의 삶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전 안으로 발길을 옮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시메온처럼 가까이 느끼게 되길 간구합니다. -강영구 신부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김정용 신부 - ◆”제 아들은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은 초등학생 자폐아를 둔 어느 어머니의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얼마 동안은 그 사실을 모르다가 나중에야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마다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통해 삶을 배우고 인생을 알게 됐다고 할 정도로 예전의 시각과는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이제 마음의 그늘이 아니라 삶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경규봉신부- 율법에 의하면 자녀를 낳은 산모는 일정한 기일(레위 12,1-5 : 남아 40일, 여아 80일)이 지난 후 사제에게 가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렸고, 출산으로 인한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로 바쳤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번제로 바쳐야 하는 양 대신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레위 12,1-8). 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부유한 자나 〕??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하느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율법에는 가축의 수컷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는데(탈출 34,19; 신명 15,19), 사람의 경우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레위 지파를 성별하심으로써 대신하도록 하셨다. 이때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수보다 많을 때에는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민수 3,11-13.40-51; 8:16-18).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장자이시므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열심히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하여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 그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어 위로를 받을 때가 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의 강림을 위해 기도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성령을 통해 메시아를 보게 되리라고 계시하셨다. 성령께서는 시메온을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시메온은 성전에 온 많은 아이들 - 그 중에는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뜨기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미리 보았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에 구원은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세상 끝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총을 찬양한다.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만방으로 확장될 것을 미리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조그마한 어둠도 없으신 참 빛으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예수님님을 찬양한다. 시메온은 온 삶을 바쳐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 사랑과 공경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 5,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3,24)는 말씀처럼 계명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우리 눈앞에 빚어지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말고, 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까지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도 시메온처럼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면서, 온 삶을 바쳐 주님을 기다리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 정성훈신부- 제가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뿐만 아니라 이제는 2천 년 전에 보았던 아기의 모습으로 구세주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기다림의 미학 -심종민 신부- 오랜 기간 시험을 준비한 사람들은 마음 고생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 황지원 신부- 요즘 세상을 보면 마치 육상 선수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듯이 빠른 것이 미덕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디지털 기계는 물론이고 일상 전반의 문화가 ‘빨리 더 빨리’라는 구호 아래 숨을 헐떡이며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빠른 성장과 발전 아래에 더 풍요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습은 예전보다 더 행복하고 편안한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두 팔에 받아 안고 -장재봉신부- 성탄의 축복을 거듭 전합니다. 생각하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던 어릴 적 성탄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귀한 기다림의 자세이며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꼽아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께 무엇을 얻으셨는지 여쭙겠습니다. 어떤 선물을 받으셨나요?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평생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 시메온을 만납니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특별한 대림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조건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기다려야 했던 시메온의 평생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해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초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자꾸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연로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더 깊고 멀게 여겨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직 믿고 기다리는 자세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렸던 시메온을 통해서 진지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배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의로움은 끝없이 기다리는 자세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르시는 독실함이란 흔들림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새깁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시메온에게 머무르시며 힘을 돋워 주신 이유라 믿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오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이 갖고 오신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림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할 까닭입니다. 우리 품에 안긴 그분이 곧 구원이시니 그분을 안은 두 팔에 힘을 돋웁니다. 아멘 -박태정신부- 한 신비가가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주님은 문을 열지 않고 닫힌 문 안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네, 제게는 저의 덕행이 한 자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그는 또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네, 주님 저의 좋은 행실과 거룩한 공적이 한 자루 있습니다.” “아주 고무적이야.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네.” 다음에 그 신비가가 또 주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의 명상과 간절한 기도가 한 숟가락 있습니다.” “너 참, 생각이 깊어졌구나.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구나.” 신비가는 며칠을 지나 다시 주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발 들여보내주십시오.” 주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그러자 신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주님 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오너라.” 나의 덕, 나의 선행, 나의 기도 이 모든 것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교훈을 알려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고 일치하는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십니다. 나의 뜻, 나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첫째 독서도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 5.)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랑을 완성시켜가야 하겠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내세우기 보다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멘. 자신의 눈으로 구원을 보다. -박상대신부-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은 경우 80일 동안 불경하다. 해서 그 불경을 벗는 정결례(레위 12,1-8)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야 하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예식(출애 13,1-16; 민수 18,15-16)을 출생 30일 안에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을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가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인데,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가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즉, 루가의 관건은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이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顯顯, Epiphania)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같은 의도를 동방박사들의 예방사건(마태 2,1-12) 안에서 다루고 있다. 루가는 이러한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을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신 것이다. 그러나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구세주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렸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