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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 사람의 진짜 능력
드라마 <무빙> 중에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봉석이가 한 행동은 하나도 멋있지 않아.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가족애’에서 ‘공감’으로 ‘무빙’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서로를 구하려 고군분투하죠. 하지만 초능력자들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고, 악당들도 가족애는 있기에, 마지막에는 각성한 봉석이 타인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매듭짓습니다. 작가 강풀의 액션만화 시리즈가 ‘무빙-브릿지-히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후속작은 본격 공감 활극이 되겠죠.
공감은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주제라 아무리 대사를 멋지게 쳐도 시큰둥해지는데, 제가 요즘 하는 유튜브에 은유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미현의 위 대사가 귀에 꽂히더군요. 은유도 공감 능력이고 인류는 은유 능력을 발휘해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은유가 히어로인 셈이죠. 드라마를 볼수록 은유와 겹치는 요소들이 보여, 도덕책에 나오는 공감 말고, 이 공감 아닌 공감 능력이 왜 인간의 진짜 능력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이 글을 씁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면,
은유 능력의 발굴자이자 정신적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징표’라고 일컬었습니다.
은유 능력자들의 모토는 1871년 랭보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나는 타자이다.”(불: Je est un autre, 영: I is another.)
이것은 은유 능력자들의 문장紋章입니다.
은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장을 보고 어떤 도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셨나요? 그렇다면 자격이 되신 겁니다. 인류의 마스터키, 사람의 진짜 능력인 은유를 향해 날아오르시죠.
1. 은유는 문학적 장식물? 속임수?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은유를 배웠지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A와 B를 연결하여 빗대는 비유법. 대표적인 예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상을 내재된 속성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서술해야 하며 단지 거기에서 부가적으로 가상, 거짓의 세계인 문학, 예술 등에서 재미를 위한 장식으로 은유, 비유가 사용된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무방한 것.’
학문의 세계에서 진지한 학자들은 은유를 기만이라며 비난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은유를 속임수라고 지적한 것처럼요..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니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Boris Margo, <Ignes Fatui>, 1945.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 전제가 일단 세상의 모든 개념은 은유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아래의 문장들을 보시죠.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다.”
“시간을 벌었다.”
“미래가 다가온다.”
“그는 과거에 갇혀 산다.”
“이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 돼.”
위 문장들은 ‘시간’에 대한 서술들로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특별한 비유 없이 자연스럽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시간’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습니다. 이 말들이 속임수일까요?
2. 은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
개념 체계 -> 행동(활동방식,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 -> 의사소통
개념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방식과 인간관계 등을 구조화합니다. 의사소통도 동일한 개념 체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면 개념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개념 체계는 언어로 드러납니다.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국인….. 될 뻔.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라고 발화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간은 물’이라는 개념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강물처럼 내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지나쳐 뒤로 흐르는 것, 강물처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에 때로는 덧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거나, 떄로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서 아쉬움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라는 식의 언어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시간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다가온다’는 시간을 ‘움직이는 물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살다’, ‘한 시간 안에 푼다’라는 표현은 시간을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고요.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고, 돈이 아니며, 물체나 공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할까요?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서의 은유>
1980년 레이코프와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책은 ‘개념적 은유’를 제시하여 기존의 은유 이론을 획기적으로 바꿔났습니다. ‘개념적 은유’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유隱喩라는 한자어는 ‘은밀히 비유’한다는 뜻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타포metaphor를 번역한 단어이지요. 메타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말로 ‘건너서(meta. across) + 옮기다(phor. to carry)’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은밀히(hidden) 건너서(bridge) 이동(moving)??? 강풀 시리즈 제목들 보고 ‘아니 세상에 은유를 주제로 히어로물을??’ 싶었습니다.)
은유는 직유와의 차별성에, 메타포는 의미의 이동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인지언어학 은유 이론에서는 의미가 이동하는 메타포의 의미로 ‘은유’라는 단어를 씁니다. 직유도 풀어 쓴 은유이고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의인법, 활유법도 은유의 범주에서 다룹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물, 돈, 움직이는 물체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지는 것처럼, 인간은 ‘추상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이거나 친숙한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며 언어적 표현도 이에 의거합니다.
개념적 은유에 따른 언어적 표현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단지 종이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3. 언어는 화석이 된 시
무빙moving의 원형인 move는 라틴어 movere(움직이다, 움직임을 일으키다)에서 나왔습니다. ‘감정’을 뜻하는 단어 emotion도 그렇습니다. ‘e(밖으로 향하는) + motion(운동)’으로 처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소란, 혹은 소요를 의미했고 대기의 emotion은 천둥을 의미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 ‘강한 감정’의 뜻을, 19세기에 감정 일반을 지칭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슬픈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을 접할 떄 감정이 일고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We are moved(우리는 감동받았어.).”
Move, emotion 모두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은유지요.
은유의 주 기능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말하자면 A는 B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은유의 사용 방법입니다. 홉스가 들으면 노할 일이나, 인류는 은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앎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지식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 흔적은 낱말의 유래, 어원에 남아 있죠. 당장 홉스의 글부터가 그렇습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보시죠.
“둘째,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즉 본래의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이다.”
(Secondly, when they use words metaphorically; that is, in other sense than that they are ordained for, and thereby deceive others.)
‘정하다, 임명하다’라는 뜻의 ‘ordain’은 ‘정돈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deceive’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다’를 의미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잡다 또는 덫에 빠뜨리다’를 의미했습니다. 모두 은유로 의미 변화를 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반대로 은유와 무의미하고 모호한 말은 이그네스 패투이(도깨비불)와 같으니, 그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며, 그 끝은 다툼과 선동 또는 경멸이다.”
(And, on the contrary, metaphors, and senseless and ambiguous words are like ignes fatui; and reasoning upon them is wandering amongst innumerable absurdities; and their end, contention and sedition, or contempt.)
‘무수한 불합리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란 표현은 본래의 뜻으로 하자면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불합리absurdity라는 추상을, 헤매며 걸을wander 수는 없죠. ‘무수한 불합리’를 ‘어지러운 미로’ 정도로 은유했다고 봐야 하고, 홉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은유를 경멸하는 이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은유라는 대지 위에서 벌어집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기록된 hot의 첫 용례들도 보시죠.
1000년 – 뜨거운
1399년 – 매운. a hot, or spicy, food
1876년 – (소리와 관련하여) 즉흥적이고 격렬한. a hot musical passage.
1896년 – (색깔과 관련하여) 격렬한. a hot red.
뜨거움이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에서 각각 은유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의 경우도 보실까요?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니 어처구니가 없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평범한 문장에는 3개의 은유가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란 설과 궁궐 추녀마루 장식물이란 설이 있는데 둘 중 무엇이라도, 은유적으로 의미가 변환되어 ‘어처구니없다’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치미’는 원래 ‘매의 꽁지에 달린 주인 표식’이었는데, 이것을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은유적으로 ‘시치미를 떼다’가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 되었습니다.
‘감쪽같다’는 ‘감접같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이는 접’을 뜻합니다. 감접을 하면 다른 나무 그루와 감나무 가지가 원래 한나무인 것처럼 자연스레 붙지요. 하도 많이 쓰이는 은유여서 ‘감쪽같다’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감접
시인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이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은유를 꺼낼 때 그것이 효과적일수록 청자는 감탄하고 공감하며 더 많은 언중에게 그 은유를 퍼뜨립니다. 모두가 그 은유를 쓸 정도가 되면 식상하여 감탄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효과적이기에 일상 언어가 되죠. 은유로서의 생기는 사라지지만 문자적으로는 더 진리가 됩니다. 이 퇴적층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지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려진 것을 비교함으로써 증가하고, 그런 지식 증가의 기록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가한다. 사물은 그 특성으로 명명되지만, 그런 특성은 먼저 어떤 다른 곳에서 관찰되었다. 테이블table은 원래 마구간stable처럼 ‘서 있는’ 무언가를 의미했지만, ‘서 있다’의 개념은 첫 번째 테이블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우리 언어의 3/4은 낡아빠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A. H. Sayce <비교문헌학 원리The Principles of Comparative Philology> 중에서.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은유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3. 은유의 작동 원리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모든 대상, 상황을 처음 겪는 것처럼 모든 측면을 하나하나 지각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면 과부하로 터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처음 접한 이래 여러 번 반복해서 접한다면, 이 샘플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뽑아서 이것이 이 개념의 패턴이라며 묶습니다. 즉 패턴은 특징들의 묶음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한 대상을 한 픽셀씩, 세포 하나하나씩 뜯어보며 판단하지 않고 ‘패턴 인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뇌는 패턴의 일부만으로 패턴 전체를 연상하는 ‘자동 연상autoassociation’도 합니다.
4음절로 된 단어가 보인다고 합시다. ‘대한민~’까지 보이면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았다면서 다음 글자를 ‘국’으로 읽으려 광분합니다. 그래서 ‘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흐릿해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어도, 멋대로 ‘국’으로 읽습니다. 설사 글자가 ‘귝’이나 ‘극’이어도 에바라면서 ‘오타지?’ 하고 반문합니다.
패턴 인식은 즉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긋나거나 빈 부분이 있더라도 알아서 교정하고 채웁니다. 그래서 알파벳 ‘A’의 모양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마주한 두 대각선이 가로대로 연결된 글자)과 다소 동떨어진 모양이더라도 아래의 모양들을 모두 ‘A’로 인식하는 겁니다.
A 서체들
앞서 보여드린 문장紋章도 마찬가지이죠. 카니자 삼각형이라 불리우는 그 그림은 실은 3개의 팩맨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벌어진 입 모양이 ‘꼭짓점과 벌어진 각, 그리고 변 일부’로 보여 우리의 뇌가 삼각형의 패턴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사이의 빈 변은 알아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처럼 패턴 인식은 어느 정도의 임계치를 넘으면 같다고 판단합니다. 유추의 근원적인 형태입니다. 유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념들을 비교하여, 유사성이 몇 가지 발견되면 나머지 특성들도 유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울까요? 거칠게 말하면 유추를 이용하여 현재를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일례로 얼마전에 일어난 팔-이 전쟁에서 아기 참수 사진이 공개되었다 철회되고 사진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죠. 이때 사람들은 베트남전의 빌미가 되었던 통킹만 조작 사건,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웠던 거짓말들, 즉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되었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수입하였다 등의 거짓 여론 조작을 떠올립니다. 앞선 역사들과 비교하여 ‘아기 참수 사진’ 사건의 본질을 깨닫고 팔-이 전쟁의 미래를 추측합니다. 유추를 하는 것이죠.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는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생각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돌이켜봅시다.
출근할 때 아이와 성인 여성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패턴으로 읽어 그 여성이 엄마라고 유추합니다. 미팅을 하러 처음 가 본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서슴지 않고 타는 이유는 이미 수없이 타 본 엘리베이터들로부터 패턴을 유추하여 낯선 엘리베이터도 어려움 없이 조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팅을 할 때 몇 번 만난 사람은 유추가 쉽기에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초면일 때는 유추가 어려워 긴장합니다. 퇴근 뒤 TV에서 뉴스를 보며 “쯧쯧, 정치하는 것들이 뻔하지..” 하며 유추로 혀를 찹니다. (유추는 꼰대들의 장난감입니다. 구축해 놓은 패턴이 많아서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다 패턴 유추를 해 냅니다.) 우리의 일상은 유추가 꾸려가는 것입니다.
뇌는 논리가 아닌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여 과부하를 덜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개념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고, 그 패턴의 일부 특징이 다른 개념에서도 보이면 그것을 다른 개념에도 공유하려 합니다. 재활용하면 그만큼 뇌는 또 일을 덜 수 있겠죠. (이렇게 뇌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꺼이, 미루어 짐작(유추)해 보려 합니다. 엄마라는 개념의 패턴에는 낳다, 기르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편하다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 일부가 다른 개념에도 발견되면 뇌는 엄마의 패턴을 다른 개념에 공유합니다. ‘모국어’나 열정적인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맘’ 같은 은유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한 원영맘의 글
은유는 유추의 결과를 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A는 B이다’라고 할 때 B의 모든 특징을 A가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죠. 원영맘이 장원영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주장을 처음 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면 ‘참신한 은유’가 되는 것이고, 이 참신한 은유가 오랜 기간 기능을 인정받아 이제 사람들이 은유인지 인식도 못하고 자연스레 쓸 정도면, ‘개념적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 은유는 오랫동안 쓰여져 왔기 때문에 누가 처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으로 짧은 기간임에도 개념적 은유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으로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한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빈둥거리며 겨우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5실링을 지출한 것, 즉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충고> 중에서, 1748.
그 유명한 ‘시간은 돈이다’ 은유가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랭클린 이전에는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돈’ 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비유였고, 기회비용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에 더없이 걸맞은 경구였지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나라마다 퍼져 전 세계의 신성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프랭클린은 이 은유를 돈의 ‘낭비’라는 특징이 시간에도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다 보니, 돈의 특징에는 ‘낭비’ 말고도 ‘지출’, ‘수입’, ‘저축’, ‘투자’ 등이 있는데 시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랬더니 더욱 찰떡이 되었습니다.
- 시간을 쓰다
- 시간을 벌다
- 시간을 아끼다, 절약하다
-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이 ‘돈’의 특징을 많이 공유할수록 ‘시간은 돈이다’ 은유는 더 견고해졌고, 지속적으로 쓰였으며, 마침내 참신했던 은유는 개념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래도 돈의 모든 특징을 시간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대출하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은유를 하지 않고 그 본래의 뜻에 맞는 서술을 하려면 수많은 하위 개념들을 발명하고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창조해야 하겠지요. ‘시간을 낭비하다’ 대신 ‘시간을 쐤홍하다’ 같은 새로운 하위 개념을 만들고(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뜻을 언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을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뇌는 터질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을 본래의 뜻대로 하위 개념을 창조하지 않고, 설명과 이해가 쉬우면서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면 대체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의 주요 속사정입니다. ‘뇌의 효율성’이 ‘패턴 인식 -> 유추 -> 은유’의 동력이며 이 효율성으로 우리는 더 많은 개체를 앎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고 싶었던 ‘창의력’ 관련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끊고 다음편에 왜 은유를 알아야 하는지와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교육, 과학, 정치, 사업 등 각 분야에서 창의적 은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에 대해, 즉 ‘은유의 최전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본 글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은 거의 없고, 아래 자료들의 이야기를 대신한 겁니다.
G. 레이코프/M. 존슨,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수정판, ㈜박이정, 2006.
SURPRISER, 「패턴 인식 마음 이론(Pattern Recognition Theory of Mind)」, 2022.
https://surpriser.tistory.com/1027
더글러스 호프스태더/에마뉘엘 상데, 김태훈 역, <사고의 본질>, 아르테, 2017.
레이몬드 깁스, 나익주/김동환 역, <메타포 워즈>,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제29권 제4호, 2019.
불비, 「인지인문학을 향하여2」,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kimbooks5
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역, <아이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온라인 어원 사전(영어 어원 관련)
https://www.etymonline.com/
제임스 기어리, 정병철/김동환 역,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 경남대학교출판부, 2017.
퀄컴 코리아, 「신경망도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22.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676012&memberNo=20717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