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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봄이 된 것 같다가 또 다시 겨울이 된 것 같다가 왔다 갔다 하죠. 엊그제는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고 밑에는 꽃이 피어 있고 이 계절에 여러분들 더욱더 영육 강건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난 주간 이제 셋째 날 벌써 3일이 지났는데요. 어떻게 여러분들 지내고 계시나요? 지난주 주일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이번 한 주간 우리는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 각각 결단하고 다짐하셨을 텐데 여러분 한 번 남은 며칠 이제 남지 않았지만 그 남은 시간마저도 조금 더 더 여러분들 집중하셔서 이번에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소망함으로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오죠. 여기서 우신다고 하는 그 표현 속에서는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큰 소리로 울부짖는 통곡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근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지금 오늘 본문에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여러 장소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 또 겟세마나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강구의 소원을 올려드렸던 예수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이렇게 세 번이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내내 정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자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또 안타까운 상황들 속에서 내내 눈물을 흘리셨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우리는 보통 나약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생각하는데요. 예수님의 이 눈물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도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눈물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흘린 눈물은 메시아로서 흘린 눈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입니다. 곧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할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아서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성으로 사람들은 흥분합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제 자기들에게 참된 자유를 줄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그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무지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는 그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마음이 괴로우셨습니다. 지금 자기 눈앞에서 환호하고 있는 이들이 며칠만 지나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칠 사람인 걸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죠. 그것도 모른 채 새까맣게 모른 채 희희낙락거리며 예수님 앞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군중에서 쓸데없이 빠져나와서 감람산 기슭 중턱에서 예루살렘 성을 물꾸러미 바라보시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 통곡하며 우셨다고 하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내 눈에 숨겨졌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고 하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로마 제국에 의하여 짓밟힌 바 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이 죄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니 이스라엘은 늘 약자로서 강대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오히려 그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제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수님마저도 그들은 곧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거죠.
이는 내가 보살핌 받는 나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그들은 심판을 자초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이렇게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 이 가운데 담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심판을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4,344절에 보면
날이 이를지라 내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을 가두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내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수많은 그 로마의 군대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이 굶주림 속에서 전염병 속에서 죽어가게 했습니다. 정말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는 처참한 패배를 감당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될 결말을 이미 내다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앞에서는 희희낙락거리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 거야라고 기대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셨던 거죠. 그러니까 마음이 찢어질 듯한 그 마음을 통곡으로 표현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죄인인 이스라엘과 그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과 사랑, 비통의 눈물입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각오와 그리고 비장한 사랑에 가득한 눈물입니다.
근데 여러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은요. 그냥 그 시대의 예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고편과 같은 사건입니다. 우리들도 또한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거예요. 죄인이고 우리도 심판을 당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예수님이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인 것처럼 착각하여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그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즐길까 그런 데만 정신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한지 계시록 20장 13절 14절에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최후의 심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하면 둘째 사망, 지옥의 불못에서 고통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겪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지옥 형벌을 겪어야 하는 그 눈앞에 있는 사람들, 그들을 불쌍한 마음으로 품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겁니다.
지금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죠. 그런데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은 아마 이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 성품을 따르면 여전히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실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분명히 내어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지옥불을 향하여 나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면서 마치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실지 모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먼저는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믿고 그 과정 속에 우리 안에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성으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장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천국은요 죄인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이 갈 수 있는 곳인데, 그 의인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의인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고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인 되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누가복음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돌아오면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더불어 잔치가 베풀어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좌충우돌, 또 죄악 가득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 그때에 이 회개의 눈물을 다시금 기억하고 우리의 죄를 통해 자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회개함으로 일어나고 자복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며 점점점점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 그게 바로 성화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이 통회의 눈물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 통회의 눈물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에 우리의 심령이 더욱더 깨끗해지고 주님 안에서 온전한 치유와 축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또 우리가 흘려야 할 두 번째 눈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흘리는 감사의 눈물입니다. 여러분 지금 육신의 연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 지금 연약한 부위보다 더 건강한 부위가 훨씬 더 많지 않으실까요? 아프고 힘들지만 그 과정보다 또 앞으로 살아갈 그 인생을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기억하고 믿습니다.
넉넉하든 빠듯하든 여러분들에게 의식주를 공급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호해 주시는 것도 그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이 고난 주간 여러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더욱더 깊이 발견하길 원합니다.
감사가 깊어지면요 감사의 눈물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칠 수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고백했죠. 시편 116편 12절에 보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서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찬송가 143장 아이자와츠가 작사 작곡한 이 찬양인데요. 1절에 보면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이렇게 고백하면서 마지막 4절에 보면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아멘 여러분 감사의 눈물이 있는 사람은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그러한 그릇이 준비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감사의 눈물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난주간과 부활주의를 통해서 우리 안에 감사가 더욱더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하나의 눈물은요. 헌신의 눈물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흘린 눈물과도 닮아 있는 눈물인데요.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영혼을 향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하면서 내 가족들, 내 자녀들, 나 때문에 막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흘렸던 그런 눈물도 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기억합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요. 한결같이 이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기억하시죠? 예레미야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려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별명이 붙었습니다. 죄악으로 멸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밤에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요, 내 눈이 눈물을 애상하여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
예레미야의 고백 아닙니까? 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강팍하여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가두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여러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향하여 긍휼의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 가운데 지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 속에는요. 그 누군가의 눈물의 기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뭔가 큰 문제도 없어 보이고, 하지만 여러분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보십시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멸망을 향하여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단에 빠져서 또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를 그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이들까지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내가 한 명의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을 긍휼히 여김으로 더욱더 눈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그 눈물의 기도를 예수님이 분명히 기쁨과 웃음으로 변화시켜줄 그 날이 곧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마지막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내가 어떤 눈물을 회복해야 할지 주님 안에서 다시금 기억하는 귀한 시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