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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함께-죄와벌 -죄성>
synopsis
저승 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쳐야만 한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김자홍(차태현 분) 씨께선 오늘 예정대로 무사히 사망하셨습니다.“ 화재 사고 현장에서 여자아이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소방관 자홍 그의 앞에 저승차사 해원맥(주지훈 분)과 덕춘(김향기 분)이 나타난다. 자신의 죽음이 아직 믿기지도 않는데 덕춘은 정의로운 망자이자 귀인이라며 그를 지켜 세운다. 저승으로 가는 입구, 초군문에서 그를 기다리는 또 한명의 차사 강림(하정우 분). 그는 차사들의 리더이자 앞으로 자홍이 겪어야할 7개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아줄 변호사이기도 하다.
염라대왕(이정재 분)에게 천년 동안 49명의 망자를 환생시키면 자신들 역시 인간으로 환생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삼차사들 그들은 자신들이 변호하고 호위해야하는 48번째 망자이자 19년 만에 나타난 의로운 귀인 자홍의 환생을 확신하지만, 각 지옥에서 자홍의 과거가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예상치 못한 고난과 맞닥뜨리는데 누구나 가지만 아무도 본적 없는 곳 !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는 이 영화는 인간의 원죄와 자범죄를 성경적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 교회(담임목사 임성택)은 지적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인간을 죄의 사슬에 묶어놓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최악으로 실수한 이야기가 원죄론 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 실락의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까지 손댈까 봐서라고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기술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사람 (아담의 하나님에 대한)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 이를 원죄 !라고 정의한 것이라 볼 때, 첫 조상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법으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속성이 바로 '죄'입니다. 이렇듯 '죄'란 죄를 알지 못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시킨 핵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죄로 인하여 끊어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관계를 다시 화해하게 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危害 되거나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 말, 욕망, 행동 등을 '죄'라고 일컫고 있지요.”
“성경에서 죄는 다른 말로 불법, 범죄, 허물, 빚, 불순종, 반역, 거역, 실족, 완고, 무지, 위선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말에서는 죄가 ‘과녁을 벗어난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23)고 말함으로써 죄가 곧 하나님의 영광에서 벗어난 것임을 보여 주는 것“ 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의 지적은 죄는 모든 범법의 사악한 원천으로서 우리의 첫 조상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부패이므로 원죄라 규정짓고 성경은 죄를 가리켜 육 혹은 육신, 죄와 사망의 법 등이라 한다(롬8:1-2; 요일3:4; 5:17)를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이 땅에 죄가 들어왔음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죄의 형벌과 권능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이 사탄의 가장 큰 무기인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길뿐이라는 것.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온 인류를 오염시킨 것과 죄의 본성, 형태, 효과 등에 대해서는 창6:5; 시51:5; 마15:19; 롬5:12; 약1:14-15 등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본 영화도 결국 죄의 형벌은 사망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이 죄를 지으면 죽으리라고 말씀(창2:17) 했던 것처럼, 죄를 짓는 혼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면 원죄와 자범죄는 어떤가 ? 이에 대해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한탄 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편 51 5)
자범죄(自犯罪, actual sin, peccatum actualis)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는 죄의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흔히 생각 한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보면 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50문답은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모든 범죄들이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고, 어떤 죄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몇 가지 더 가중된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들보다 더 극악하다"고 하였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 한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48).
주님은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표현하셨다(요 19: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로 한다(롬 2:6). 죄책의 정도에 따라 알지 못하거나 연약하여서 짓는 죄, 고의적으로 짓는 죄로 나눌수 있다. 전자는 비교적 가벼운 죄요, 후자는 무거운 죄이다. 물론, 모든 죄는 지옥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구원받은 신자는 결코 후자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원죄가 죄의 뿌리라고 한다면 자범죄는 죄의 열매이다. 죄의 열매는 무엇인가? 미움,시기, 질투, 분냄, 살인, 원수 맺는 것, 원한을 풀지 않는 것 등 하나님을 대적하여 생긴 모든 것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원죄와 자범죄를 다 해결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전한 것이며 다 이루신 것이다. 더 보탤 것이 없다. 그러나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자범죄 해결)인 것이다. 죄는 그 자체로써 벌이 포함되어 있다. 벌은 이미 죄의 행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도스트에프스키의 죄와 벌의 시각
빗나간 신념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후회와 갈등을 그린 죄와 벌은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음산하고 지저분한 골방에 틀어박혀 기묘한 착상에 입각한 논리를 창작해 낸다. 인류는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대충 두 부류로 범인은 법률을 따르는 대중이고, 비범인은 법률을 만드는 선택된 소수이기 때문에 혁파를 위해서는 걸리적 거리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한다며 이는 일종의 현존하는 자들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것. 이 기상천외한 논리에 따라 그는 ‘경제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공헌한다면 ‘이(蝨)’ 같은 노파를 죽이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 나에게는 그럴 권리이자 의무가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만으로는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가미된다. 심한 노이로제와 생활고, 여동생의 약혼(오빠를 위한 희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편지,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의 만남, 세상의 부정에 시달린 불쌍한 민중의 상징과도 같은 그 가족의 이야기, 술집에서 듣게 된 학생과 사관의 대화 등 거의 그의 생각과 완전히 같은 내용의 이야기 들로 하여 헴리트적인 우유부단함에 젖게 된다.
그는 우연찮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노파를 찍어 죽이는 범죄를 결행하고, 약간의 금품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논리는 무너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두 측면의 내면 심리의 싸움이 갈등으로 노정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와의 지적 결투이고, 긴박한 대결이 세 번 이루어진다.
포르피리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거로 미루어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다(확신 범에 대한 증거 불충분)는데 비해 라스콜리니코프는 표면으로는 도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저의를 예의 주시 한다. 최후 수단으로 포르피리는 체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자수를 권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논리구조의 핵심인 개혁자가 현행 질서에 백기를 두는 것이고, 자신의 정립한 사상을 스스로 파탄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적 결투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에 균열이 생겼고 그것을 더욱 부추긴 사람이 스비드리가일로프 였다. 자기 욕망을 위해 도덕을 무시하는 절망적인 니힐리스트의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논리의 추악한 허구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갈등은 소냐와의 대결로 범행 직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제 완전히 고독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괴롭혔다. 촛불이 하나 밝혀져 있을 뿐인 어두컴컴한 빈방 안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읽는 창녀 소냐의 목멘 음성.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살인자인 자신의 갈등.
이것은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 다음 “당신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키스를 했다”고 변명하는 모습된 모습을 보인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해 자기가 가진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으려 하지만, 소냐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영원한 고독을 뜻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결국 소냐의 사랑에 굴복해 자수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죄수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그 죄수들이 소냐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는 사이에 드디어 자기 사상(논리구조)의 패배를 인정하고 소냐의 진실에 굴복하게 된다.(구원론)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 소냐
창작 노트에 소냐는 “저는 죽은 나사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되살려 주셨던 것입니다”라는 고백의 글이 있다. 이는 소냐의 비밀(신앙)을 푸는 키워드 다. 한 번은 죽었고 이는 곧 자기 의지대로 자신을 죽였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생명의 영생을 부여 받았다. 그리스도 사랑에 의한 구원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소냐가 살 길이자 그녀의 사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론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부와 권력이 없고 사랑과 형제애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로 이어지는 영생의 길이 때문이리라....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해 부와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그 또한 부와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예루살렘, 곧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 이다.
그는 ‘나사로의 부활’을 낭독할 때 보여 준 소냐의 태도에서 그 비밀(신앙)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보고 있는 방향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도 하나이고 목적도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두 가지 진실의 결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를 죽인 것이다!” -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조 섞인 독백은 작품 속의 명문장이 되었다.
Hot Issue
1) 상상초월한 신세계 ! 본적없고 볼 수 없는 저승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2) 전 세대 공간을 얻을 한국 신화바탕 !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감동 드라마 !
3) 웹튼계 신의 스크린 ! 환생! 웹튼 {신과함께 6년의 기다림, 끝에 영화가 되다}
4) 연기신들의 스크린 강림 ! 최고이 배우들, 저승에 생명력을 불러 넣다 !
5) 원죄와 자범죄 ! 죄와 사망 ! 환생과 부활 ! 구원 !
6) 이성과 영성의 절묘한 결합 ! 그리고 환생과 부활 !
메시지
[천국편] 제31곡 79~90행
1.하나님나라를 정의하실 분 있나요!
2.복음이란 무엇일까요?
3.복음을 성경말씀 또는 하나님 , 예수님 말씀이라고 말씀하시는분 중 어떤 말씀이 복음인지?
4.성경 전체가 복음이다 ! 성경을 잘못이해하시는 분은 이 영화를 보라.
5.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구세주=그리스도= 예수=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하나님!
6.구약(여호와)은 그림자이고 신약(예수)은 실제이다!
7.구약(여호와)은 모형이고 신약 (예수)은 실체이다!
신곡/신과 함께 대비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신앙인인 알리기에리 단테가 쓴 <신곡>은 주인공인 단테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과 연옥(지옥과 천국의 중간 단계, 정죄의 공간)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상상의 답사기이고 르포지이다. 단테의 존경하고 흠모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천국으로 오르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 서사시로 세계 성인들을 역설적으로 연옥에 처 넣는 편견을 수반하지만 <신곡>은 명실상부 지옥 안내서의 고전이자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과 함께>와 비슷한 듯 또 매우 다르게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 쉽게 시선이 가는 책은 아니지만 <신곡>을 통해 불교 사상이 아닌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지옥, <신과 함께>와는 다른 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신곡>에서는 본격적인 지옥에 이르기 전에 '지옥의 안뜰'에 해당되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곳에는 태만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고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일에만 몰두했던 이기적인 자들로 세상의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곳에서 파리와 벌 떼에 시달리고 있다. 이 곳을 지나면 '아케론 강'이 나타나는데 이 강을 지나고 나면 비로소 아홉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지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 이곳 지옥의 입구에는 유명한 글귀가 섬뜩하게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구조
먼저 제 1원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아이들의 영혼과 그리스도 이전의 위대한 시인과 철인들의 영혼이 떠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지 못한 상태로 죽었으나 생전에 선행을 행한 자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갈망한다 한들 이 갈망 이성자체이기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갈급이어서 이 구간을 벗어날 수 없다.
본격적인 지옥은 제 2원부터다. 제 2원의 문턱에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이며, 막강한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정복한 '미노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반인반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친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그의 뒤편 제 2원에서는 애욕의 죄를 범한 자들의 영혼이 고통 받고 있다. 죄를 지은 영혼들은 불교 사상의 지옥에서와 마찬가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고통을 받게 된다.
이어지는 제 3원은 탐욕가들, 제 4원은 낭비를 하거나 인색했던 자들, 제 5원은 분노한 자들, 제 6원은 이교도들, 제 7원은 폭력을 사용해 죄를 지은 자들, 제 8원은 사기꾼들 그리고 제 9원은 배반자들의 영혼이 극도로 끔찍한 형벌을 받으며 고통 받고 있다. 다만 매 지옥마다 말 그대로 '지옥'을 겪어야 했던 망자 김자홍과 달리 <신곡>의 단테는 여행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벌을 받는 영혼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옆을 지나쳐 나아 갈 수 있다.
끝으로 모든 원의 중심이자 지옥에서 가장 깊은 곳에는 지옥의 마왕인 루시퍼가 있다. 그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입도 세 개다. 각각의 입에는 유다(예수를 배반한 죄)와 브루투스, 카시우스(카이사르를 배반한 죄)가 물려 있고 루시퍼는 이들의 영혼을 잔혹하게 물어뜯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벌을 받고 있는 자는 유다인데 '등 껍데기가 홀랑 벗겨진 채 남아 있었다. 그의 대가리는 안으로 다리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단테는 3일간의 '지옥' 답사를 마치고 다시 3일에 걸쳐 정죄와 희망의 왕국인 '연옥'을 지난다. 그리고 그 끝에 '천국'에 다다른다. <신과 함께> 김자홍의 지옥 여행이 49일이었다면 단테의 여정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7일인데 하나님의 창조가 7일만에 이루어진 성경의 완전수 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과 함께>에서는 주인공 자홍이 죽은 후 49일째의 심판을 무사히 통과하여 환생의 문을 지나기 때문에 제 7 지옥 까지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신과 함께>의 바탕이 되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에 따르면 지옥은 원래 10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죽은 후 49일을 잘 넘기지 못하면, 3년이 되는 날까지 더 끔찍한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 불교에서 49재를 지내는 이유다.
또 영화에서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를 심판하는 제 5 발설지옥을 맨 마지막 단계에 배치시키며 자홍과 어머니의 스토리를 부각하는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제 5 지옥은 그 유명한 염라대왕이 관장하는데 영화에서는 이정재가 그 역할을 맡아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카리스마 넘치는 염락대왕 이정재. 정작 촬영장에서는 고운 분장 덕(?)에 '염라언니' 라 불렸다고 한다.
만약 김자홍이 일곱 번째 지옥에서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 지옥으로 떠돌아야 했다면, 그가 만났을 마지막 제 10 지옥은 '오도전륜대왕'이 관장하는 흑암(黑闇) 지옥이다. 이 곳이 바로 죽은 지 무려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흑암지옥은 인간세상에서 남녀 구별을 못하고 자식 하나 보지 못한 죄인을 벌주는 곳인데 죄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끔찍한 지옥에 갇히게 된다. 어찌 보면 이 흑암지옥은 칠흑 같이 어두운 루시퍼의 입속에 머리를 처박혀야 하는 <신곡>의 마지막 지옥과 닮았다.
<신과 함께> vs <신곡> : 지옥의 안내자
무시무시한 지옥이지만 <신과 함께>의 자홍과 <신곡>의 단테에게는 든든한 '지옥 안내자'가 있다. <신과 함께> 지옥 여행 가이드 '강림, 덕춘, 해원맥' <신곡>의 지옥 여행 가이드 베르길리우스. Mosaic by Monnus 먼저 자홍을 도운 강림, 덕춘, 해원맥은 원작보다 적극적으로 자홍을 돕는다. 그 이유는 염라대왕에게 천년 동안 49명의 망자를 환생시키면 자신들 역시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원작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설정이다. 하지만 이 과감한 각색 덕분인지 자홍을 환생시키기 위한 삼차사들의 고군분투는 더 큰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고, 자홍과 삼차사들 사이에는 더 끈끈한 '동맹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반면 <신곡>의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체험 중 혼절하기 까지 하는 단테를 묵묵히 이끌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지옥의 제 1원인 '림보'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환생을 눈앞에 둔 영화 <신과 함께>의 삼차사들 보다는 원작의 삼차사들과 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이미 예전부터 존경하던 시인이었고, 지옥과 연옥을 지나면서 단테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며 더 큰 존경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 둘은 자홍과 삼차사들과 같은 일종의 동맹관계라기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신과 함께> vs <신곡> : 만나고 싶은 여인
영화 <신과 함께>는 원작의 사상관을 충실히 재연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감한 각색을 통해 스토리의 중요 부분을 완전히 다르게 풀어나갔다. 그중 가장 극적인 부분으로는 원귀와 원귀의 어머니를 자홍과 가족관계로 엮으면서 영화 전체를 가족애와 효도의 감정선으로 이어나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신파'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자홍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 더욱 간절히 지옥을 헤처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 관객들은 그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또 그에게 깊이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설정은 <신곡>의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떠올리게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신곡>은 단테가 자신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대상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지옥을 통과하여 천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지옥의 다음 단계인 연옥의 끝에서 그를 안내해주던 베르길리우스를 떠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리고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오른다.
물론 단테의 사랑(이성애)과 자홍의 사랑(모성애)은 그 속성이 다르다. 하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상으로서의 여성이 지옥 길에서 등대 역할이 되어준다는 점은 어느 정도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나간 자홍이 시장 골목 어귀에서 몰래 어머니를 바라보던 장면은 영국의 화가 헨리 홀리데이의 작품의 연민어린 장면이 떠 오르게 하여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전한다.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 (1883) by 헨리 홀리데이
또한 <신곡> 중 [천국편]에는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바치는 시구가 있다. 다시 읽어 보면 환생의 문 앞의 자홍이 그의 어머니에게 들려줬음직하다.
오, 여인이시여. 그대 안에 내 희망이 힘을 얻고 그대 나의 구원을 위해 저 지옥 속에 발자취를 남기시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내 보아 왔던 그 많고도 많은 것들을 그대의 힘이며 그대의 선에서 온 은혜와 덕으로 나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 모든 길과 그 모든 방법으로써 나를 속박에서 자유로 이끄신 그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하시어 그대가 건강히 치유해 준 나의 영혼이 그대의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Behind story
결국 한국 신화의 각기 다른 지옥과 7개의 재판 내용은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으로 각각의 죄에는 어떤 형벌이 뒤따를 지! 사실 원작 웹툰에 그려진 이미지들만 가지고는 이처럼 인물들의 동적인 지옥 체험 과정과 디테일한 지옥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은, 지옥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참고했었다고 털어 놓았다. <신곡>은 서양 문화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불교와 한국의 토속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신과 함께>를 영화화하는 작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신앙자들에 대한 메시지는 강렬했다는 평가를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