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斗巨飛 歸國報告 臥龍洞大會(떡두꺼비 귀국보고 와룡동대회) 전말기
떡두꺼비(德斗巨飛), 미국서 돌아오자 밀린 진료로 허위적거리기를 일주일,
어제 아침에야 겨우 급한 불을 껐다. 그리고 오후부터는 공연히 시계만 드려다 보면서
초조해 하다가 퇴근 때 葛普道水(Calvados) 큼직한 병 둘러메고 한방에 튀어날라
얼씨구나 기어들어간 곳이 비원 앞 와룡동의 [臥龍洞]이다.
원래는 이 집 길 건너가 와룡동이고, 이 집은 경운동(慶雲洞)에 속한다.
비원은 창덕궁 뒤뜰을 말하는 것이고, 이 창덕궁 앞뒤가 떡두꺼비의 어린시절 놀이터였다.
1947년 서윤복(徐潤福)이 보스턴 마라톤에서 일등을 하고 돌아온 뒤 돈 들지않는 운동이라 해서
동네마다 꼬마들이 저녁 먹은 뒤 삼삼오오 비원 담을 낀 골목에서 기어 나와 ‘동관대궐’
(그때는 창덕궁을 이렇게 불렀다) 앞에서 쭉 남쪽으로 달려 종3지나고 수표교(水標橋)까지
뛰어 갔다 오는 것이 방과 후 일과였다. 큰 길에도 차(車)가 없으니 우리는 아스팔트 차 길로만 뛰었다.
어른들도 좋아 하였다. 다만 운동화를 너무 닳게만 말라는 당부를 부치기는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루마다 란닝구에 맨발로도 뛰었다. 그리고는 창덕궁 기둥들 사이에서
‘집 지키기’ 놀이를 하였다. 그 시절에는 여름 밤이 더워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때라
어른들도 저녁 먹고는 으레 무더기로 여기 나와 앉아 부채질을 하고 지냈다.
그래서 집 지키기 놀이에서 아이들은 몸을 숨기고 있을 곳이 많았다. 뒤에 미국 가 보니
할렘 흑인들 빈민굴생활이 그러했다.
뛰다 보면 한 두 곳 라디오 집 길에 내놓은 왕왕거리는 라디오에서는 아직 이북에 넘어가지 않고 있던
신불출(申不出)이의 만담, 이방울이의 경기민요, 김래성(金來城)각색 ‘진주탑’(‘몬테크리스도 백작’의 번안)과
‘똘똘이의 모험’이 흘러 나오곤 했다. 물론 사람들이 그 집 앞에 쫙 모여 있었다.
[臥龍洞] 여주인 張女史는 인물중의 인물이다. 우리보다 한 해 아래인 이 분은 여고시절 명륜동
혜화동 일대에 소문난 才色겸비 소저(少姐)로, 흠모하던 버스통학 여드름쟁이들이 꽤 있었다.
이 집은 현대 한국을 주름잡는 애기 할망구들이 자주 나들이를 나오는 집이다.
‘와룡동 불고기’와 두툼한 ‘피양식 빈대떡’, 그리고 ‘옛날 된장찌개’는 언제 먹어도 맛이 있다.
거기다가 우리 동문 某 화가의 백호짜리 그림 둘이 홀에 걸려 있다. 요컨대, 여러 모로
우리 51회 동문들의 안성맞춤 집인 것이다.
동문들 특징 하나가 시간을 잘 지키는 버릇이다. 언제 만나보아도 시간들은 정말 잘 지킨다.
대개가 5분 전에 오고, 늦어도 5분이다. 얄밉도록 시간들을 잘 지킨다. 이런 강박증을 가졌으니
그 완벽성 추구 성격에 힘 입어 왕년에 공부들을 잘 했을 것이다. 어제도 어김없이 모두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예외였던 사람도 어제는 정각도착 이었다.
김해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올라 온 山公 강신표는 두어 달 사이에 수염을 길러 같은 경상도
바닷가 사람인 具常시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점잖은 너털웃음까지도 老시인과 흡사했다.
모두들 葛普道水 주연을 반가워 했다. 거기다가 朴贊亨이가 미국에서 가져 온 시바스리갈
큰 놈 하나, 九雲筆仙 김윤배가 책임진 것 외에 또 가져 온 대짜 대나무 통에 든 중국명주,
이 떡두꺼비 역시 따로 버무스 하나를 내 놓았으니, 모임은 질퍽질퍽 하였다.
海龍 김대영이는 아직도 장군의 몸 자세를 지닌다고 놀림을 받았지만 그 꿋꿋한 자세가
허물어지지 않았다. 평소 술을 입에 잘 대지않던 南崗 목영민이지만 어제는 술마다 조금조금씩
맛을 꽤 보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앞으로 두꺼비가 살살 꼬여 술을 늘려 長老직 박탈을
도모해 봄 직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난데없이 전화가 울렸다. 독일의 九公 이희우부부가 걸어 온 것이다. 괴팅겐 숲 속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내와 눈을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면서 정확히 시간에 맞추어 걸어 온 것이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질렀고,
돌아가며 새 해 인사들을 나누었다. 특히 心山 최낙규는 독일어로만 인사를 나누고,
無號舞湖 유춘박이 이들을 위해 전화에 대고 ‘로레라이’를 독일어로 불러 주었고,
一山 김정대는 독일어 詩 한 수를 읊어 주었다.
걸어 오고 나서 우리가 또 답례로 다시 걸기까지 하였다. 미국의 凡草 송효섭과 김영철,
고병철, 전원상, 배명승이에게는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하고들 싶어 했으나 그 곳 시간이
새벽이어서 애써 깨우지 말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웃고 떠들고, 떡두꺼비 미국방문담을 듣고, 羅城 韓(Hahn)府尹과 劉좌부윤이 우리에게 공손히
보내 온 인사장과 선물을 뜯어 보고 좋아들 했다. 뉴욕 金榮哲이가 고맙다고 보내 온 ‘메시아’ 합창
씨디도 주문한 사람인 湖山 김재욱이와 山公에게 전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이들은 입이 벌어져
두꺼비 큰 입이 무색할 지경이다.
불행하게도 가장 중요한 인물인 北村 오도광이 이 날 빠졌다. 나온다 하다가 갑자기
서울 사무실 운영에 대한 긴급회의가 있어 거기에 꼼짝 못하고 참석하게 되어서 였다.
미국 동문들이 그 중 고마워 하던 친구인데, 어쩌랴! 우리는 나성 부윤의 선물이 마땅히
북촌에게 가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일치하였다.
참석자는 강신표, 김대영, 김윤배, 김재욱, 김정대, 목영민, 박찬형, 유춘박, 조두영, 최낙규였다.
사진은 디지털이 아니라서 안심하고 박았다. 九雲筆仙이 박았다. 나오면서 보니 비원 앞 步道가
새 단장 중이었다. 월드컵대회를 앞두고 신경을 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떡두꺼비, 이 자리를 빌려 미국에서 환대해준 이홍순, 유동화, 방석훈 민병래 김장옥 이충익 추정엽
홍기충 박용목 강화석 김원세 김동일 이창범 백충현 김광신 김영철 안동국 박성유 김윤배(2)
이덕원 배병진 박규창 나성연 동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댓글:
유동화
이글도 처음 대한는 글이네.
다시 읽혀 조야겠네.
그릭고 낵가 다시읽으려 찾고있는것은
"나성시청 방문기" 이외다.
한번 찾아보시이소. 13·07·10 12:2
첫댓글 겸산 조두영, 이러한 익살스런 글들도 좀 쓰고 하시요. 홍현이 요즘 두 곳이라서 길을 못찾아
그러나... 청송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은 알텐데 그렇챦소? 옛날 얘기요. 그동안 몇 친구들도 가고..
유동화가 간지 막 일년이 넘었구려.
길을 못 찾을 수야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진 올리는 것을 잊어서 들어 오지 못 한다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