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데반의 설교 3
사도행전 7:17-22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행 7:17-22 / 17-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하신 때가 가까워졌을 무렵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엄청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에는 요셉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자가 왕이 되어 19) 우리 조상들에게 포악한 정치를 하고 부모들을 강압하여 아이들을 내버리게 하였습니다. 20) 모세가 태어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그 아기를 숨겨 키웠습니다. 21) 그러나 도저히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 아기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곧 바로의 딸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22)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건장하며 웅변을 잘하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 될 때의 일들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 약속의 때는 몇 가지 측면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때입니다. 창세가 15장 13절에서는 그 시간은 400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구적인 측면입니다. 창세가 15장 5절의 말씀에서처럼 이스라엘은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진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종노릇 하는 이스라엘의 괴로움이 하늘에 닿았음(출 3:9)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고 하나님의 계획의 때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18-19) 새로운 왕조(주전 1584년경 18왕조)의 등장으로 애굽 왕조와 요셉에 의하여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이민은 협력적 관계에서 적대적 관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400여 년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의 자손은 번창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왕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경계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것(출 1:22)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면(마 2:16)이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때가 더 가까이 온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창 15:13).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세(20-22)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라는 것은 단지 외모적인 아름다움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아름다움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아름다움입니다. 즉 모세의 아름다움은 그 태어난 때의 용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거의 완벽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서 성장하며 훗날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리더십과 모든 지혜와 통치력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는 모세의 말이 능하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자기 증언(출 4:10)과는 상반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의 자기증언은 하나님의 사명을 피하기 위한 자기변명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14절에서의 하나님의 노하심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적 용 :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번성은 항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대로 되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아주 심한 역경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인내하며 참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성도의 지혜일 것입니다.
< 설 교 >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1. 요셉에서 모세 때까지 히브리인의 번성
본문은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설교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앞서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점을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민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은 주인공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잘 난 조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자손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다른 어떤 법률보다 우선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모독했다고 야단이지만, 모세의 율법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법은 구원의 언약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아브라함 언약보다 앞세운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이어지는 두 번째 부분입니다. 모세를 통해 구원받고,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했는가? 광야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평가입니다.
스데반은 출애굽기 초반에 나오는 얘기, 즉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번성한 얘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7:17)
숫자적 번성은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70여명의 야곱 가족이 약 400년 만에 장정만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인들까지 합치면 족히 200만 명은 되었을 겁니다. 400년 만에 약 3만 배로 늘어났습니다. 한 세대를 약 20년으로 치면, 20대 동안에 3만 배가 된 셈입니다.
세계 교회 역사를 보면 성도들이 늘어난 시대는 융성(隆盛)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줄어들고 위축된 시대는 괴로운 시대였습니다.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회교도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기독교 인구는 감소합니다. 하나님은 번성케 하시려는데, 기독교인 스스로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사람들 마음이 강퍅한 시대에 한 사람을 온전하게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다면 자식을 낳아 제자 삼는 것이 옳은 일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책임이 있습니다. 적어도 세 자녀 이상 낳으세요. 악인은 늘고 의인이 주는 것은 사회의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자식을 기르기 힘들어서 낳지 않는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였습니다. 그래도 힘써서 낳아 길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어요. 이스라엘의 번성 얘기는 여기서 맺겠습니다.
번성의 결과는 탄압으로 다가왔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18-19)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의 왕조는 제15-16 왕조인 힉소스 왕조로 추측됩니다. 이 시기는 이집트의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에 있는 두 번째 과도기(intermediate period)입니다. 제13왕조에서 제17왕조(BC 1750 -1570)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는 외부 세력이 이집트 왕조를 무너뜨리고 다스리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모세 시대는 신왕국 시대입니다. 제18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 연대적으로 보면 BC1570-1150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대의 왕들로는 아멘호텝1세, 투트모세1세, 2세, 하트셉수트, 투트모세3세, 아멘호텝2세 등이 있습니다. 모세를 건진 바로의 공주는 하트셉수트이거나 혹은 람세스2세의 딸로 추측합니다. 출애굽 시절 애굽 왕은 아멘호텝 2세(BC1490 -1445)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들은 과거 다른 왕국 시절에 요셉이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현재 이스라엘 자손들이 숫자적으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숫자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줘서 부부생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숫자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임산부가 출산을 할 때, 남자 아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도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아이를 낳은 후에 갖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불법적인 인구 억제책입니다. 이런 괴로운 상황이 바로 모세가 태어나던 시대의 역사적 상황입니다.
2. 모세의 실패와 하나님의 소명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원자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20-22)
모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왕명을 거역하고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모세를 버렸습니다.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 가에 놔뒀습니다. 이 모세를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왔다가 발견하고 데려갔습니다. 모세를 데려간 바로의 딸은 흔히 하트셉수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왕권을 이어받을 만큼 권세 있는 딸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공주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왕위 계승자로 자라난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학문과 지혜를 배웠습니다. 당시의 애굽은 대수학, 기하학, 천문, 지리, 시, 철학, 의학, 통치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첨단을 가는 지역이었습니다.
40세가 될 무렵에, 모세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23)
돌아본다는 말은 그들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에 동포애를 가진 것은 특이합니다. 그는 젖먹이 시절부터 애굽 왕실에서 자랐습니다. 애굽 사람으로 처신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의 모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세가 공주의 집에 입양된 때부터 모세는 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친 어머니가 유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 섭리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어린 모세에게 히브리 사람의 내력이나, 신앙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40년이 지나도록 애굽 왕자로 자라던 모세가 갑자기 히브리 사람을 위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 백성을 구해내야 하겠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24-25)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26-28)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자기 동족을 구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다음 날 나가 보니 히브리사람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놈은 아주 나쁜 놈입니다. 형제를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충고했습니다. 너는 왜 형제를 해치느냐? 노예가 된 것도 억울한데, 왜 같은 노예 신세의 동족끼리 싸웁니까?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인간 사회의 비극입니다. 한국 전쟁이 그랬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 그랬고, 과거 이스라엘 역사도 그랬습니다. 아무튼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너를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웠는가? 요즘 버전으로 말한다면 “친일파인 네가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여지껏 애굽 왕실에서 호의호식 하다가 갑자기 백성을 위한다고 나타났으니? 이로써 백성의 지도자가 되려고 자원하여 나섰던 모세는 보기 좋게 배척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위험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29) 전날 모세가 죽인 애굽 사람은 상당한 신분인 것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공주의 아들이 두려워 할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이때에 모세가 단순히 살인죄 때문에 도망쳤던 것은 아닙니다. 공주의 아들로써 사는 것보다 하나님 자녀로 사는 것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넷째 아들 자손, 아라비아 서북지역)에서 40년간 목동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30-34)
시내 산이란 이름은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던 月神 “신”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산에서 모세의 율법을 받습니다. 우상의 산이지만 하나님이 임하시면 거룩한 곳이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지금 시내산은 아랍인의 손에 있습니다. 어느 장소가 신성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순전히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주제는 본문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마치 형들이 버렸던 요셉을 다시 형들 앞에 세웠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모세가 누구인가? 본문의 중요한 쟁점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모세는 율법을 전해준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유대인이 생각하는 단순한 율법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입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33-36)
이 말씀에 보면 모세의 직함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① 관리와 재판장입니다. 행정적인 지도자, 곧 왕권을 의미합니다.
② 속량하는 자입니다. 속량이란 말은 풀어준다는 뜻으로, 곧 구원자(lutrwthv"=deliverer)란 뜻입니다.
③ 선지자입니다.(37-38절)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을 계시하는 인물입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모세의 직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십니다. ① 왕이십니다. ② 제사장이십니다. ③ 선지자이십니다.
모세가 한 일을 보세요. 첫째로 모세는 구원자였습니다. 바로는 마귀의 상징입니다. 바로의 압제 아래 있는 히브리 사람들은 죄와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자기 목숨을 걸고 그 백성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모세는 항상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둘째로 모세는 생명을 말씀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37-38) 모세는 십계명의 전달자만이 아닙니다. “생명의 도”(개역), “살아있는 말씀” 즉, 복음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모세가 전해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막과 제사에 대한 법입니다. 성막과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모세는 백성들의 왕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통치자요 재판장입니다.
모세가 사역한 장소를 본문은 세 곳으로 언급합니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36)
① 애굽입니다. 애굽은 불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② 홍해입니다. 홍해는 세례의 장소를 상징합니다(고전 10:1).
③ 광야입니다. 광야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38절).
모세는 불신 시절부터 구원받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우리의 구원자시며, 왕이시며, 선지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4. 항상 반역적이었던 이스라엘
그러면 이제 본문의 쟁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잡아 법정에 세웠습니다. 죄목은 모세를 모독한 신성 모독에, 성전을 모독한 성전 모독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모세를 모독한 것은 스데반이 아니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세의 뜻을 오히려 거부하고 있습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39-41)
그들은 항상 모세의 지도권을 거부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모세의 재판장이나 관리의 지위를 거부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모세에게 지속적으로 대들었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배고프면 대들고, 목마르면 대들고, 고생스러우면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홍해에서, 므리바에서, 신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유아회귀적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젖먹이 시절 행동을 합니다. 애굽에서 나왔으면 힘들어도 가나안으로 가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항상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노예 시절이 뭐가 그리 좋습니까? 단순히 먹을 것 좀 있다고 노예로 돌아갑니까? 송아지 숭배는 애굽 사람들의 중심 신앙입니다. 모든 지역에서 소를 섬겼습니다. 멤피스 사람들은 아피스란 검은 황소를 섬겼습니다. 헬리오폴리스에서는 므네비스라는 황소의 신을 섬겼습니다. 테에베 부근에서는 바시스라는 검은 황소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저 과거 단련 된 송아지 숭배만 그리워했습니다. 乳兒回歸적 현상입니다. 요즘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평소 멀쩡하다가도 무슨 힘든 일만 생기면 점쟁이 집을 찾습니다. 점쟁이가 뭘 압니까? 그래도 확률은 항상 50%입니다. 병든 사람 찾아 가면 뭐라고 합니까? 죽지 않으면 산다고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 찾아가면 뭐라고 합니까? 성공하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아리송한 말로 합니다. 성공할 점괘인데 마가 끼어 있어서 잘 해결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런 점쟁이한테 무슨 운명을 맞깁니까?
결국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 구원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 자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행7:42-43)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은 광야 시절 여러 가지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하늘의 군대란 말은 천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천체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태양, 달, 별, 행성들을 섬겼습니다. “몰록의 장막”은 구약성경에 “몰렉 식굿” (&l,mo tWKsi, 암5:25)입니다. 몰렉이란 왕이란 뜻입니다. 식굿이란 바빌론 신의 이름인 동시에 “장막”이란 뜻이 있습니다. 레판의 별은 아시리아 사람들이 숭배하던 토성신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조상들은 신실한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지도자를 거역했던 신앙의 전과자들입니다. 이제 그 조상 시대부터 1500년이 지난 시점에 그 후손들이 다시 모세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세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세의 거역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전해 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역하는 스타일이 조상들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거부합니다. 시험만 다가오면 유아기 시절의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한 편에 여호와 한 편에 송아지 숭배를 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시절의 60만 명은 단 두 사람만 빼고 다 죽었습니다.
이제 스데반을 재판하려고 하는 유대인들도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모세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자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요. 그러나 대적자들이라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들이 신성시하던 헤롯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빙자합니다. 때로는 확신에 차서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반역자로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