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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읽기(4. 9.) 자료입니다.
L. 트로츠키: [영구혁명 및 평가와 전망], 정성진 역, 신평론 1989.
제5장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 독재”는 실현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인가?
레닌에 호소하면서, 라제크는 민주주의 독재가 이중 권력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때때로−더욱이 조건부로−레닌은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였으며 나도 그것은 인정한다. “때때로라고?” 라제크는 분개하면서 내가 레닌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라제크가 분노하는 것은 단지 그가 틀렸기 때문이다.(영구237)
「10월의 교훈」에서, 나는 민주주의 독재의 ‘실현’에 대한 레닌의 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적 연합은 진정한 권력을 획득할 수 없는 미성숙한 권력 형태로서 나타날 수 있었을 뿐이다.−그것은 구체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단지 경향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영구237)
내가 왜 “때때로”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였는가? 그것은 문제 자체가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독재가 이중 권력이라는 형태로 (“어떤 일정한 형태로 또 일정 정도까지”) “실현”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레닌의 언급은 모두 1917년 4월과 10월 사이의 시기, 즉 민주주의혁명이 실제로 수행되기 이전의 시기에만 이루어졌다. 라제크는 이것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평가하지도 못했다. 오늘날의 속물들과의 투쟁 속에서 레닌은 민주주의 독재의 “실현”에 대해서 극히 조건부로만 이야기하였다.(영구238)
레닌의 말이 의미했던 것은, 이중 권력의 비참한 유산 이외에 다른 어떤 민주주의 독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존재하지도 않으리라는 것,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을 ‘재무장’할, 즉 슬로건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멘셰비크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이,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볼셰비키를 사냥했던 부르주아지와 연합했던 사실이 볼셰비크 슬로건을 “실현”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흑과 백을 속이는 짓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영구238)
멘셰비키에 대해서는, 레닌이 카메네프를 반박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한 논거가 제시될 수 있다. 즉, “당신들은 부르주아지가 혁명 과정에서 ‘진보적’ 사명을 완수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 사명은^ 이미 실현되었다. 로지얀코, 구치코프, 그리고 밀류코프의 정치적 역할은 부르주아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케렌스키 체제는 독자적 단계로서 실현될 수 있었던 민주주의 혁명의 최대치이다.”(영구238-239)
레닌은 카메네프에게 이중 권력 체제내의 민주주의 독재의 퇴화기관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고, 이들 퇴화기관으로부터 새로운 기관이 발생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어떤 경우보다도 더 깊이 있게, 더 결정적으로, 더 순수하게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민주주의 독재가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영구239)
만일 2월에서 4월까지에 걸친 시기에 민주주의 독재가 실제로 실현되었다면 몰로토프조차도 그것을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라제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당과 계급은 민주주의 독재가, 군주제의 낡은 국가 기구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장원제적 토지 소유를 완전히 청산해 줄 그러한 체제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케렌스키 시대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영구239)
그러나 볼셰비키 당에게, 문제는 혁명적 과제를 실제적으로 실현하는 것이지, 어떤 사회적⋅역사적 ‘퇴화기관’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닌은 반대자들을 이론적으로 깨우쳐 주기 위해, 발달하지도 못한 이 특징들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던 것이지,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라제크는 이중 권력, 즉 무권력의 시기에 ‘독재’가 존재하였으며 민주주의 혁명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매우 심각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레닌의 온갖 천재적 재능들을 필요로 하는 그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영구239)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은 러시아나 중국의 무지한 농민들 모두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형태학적 특징들로 본다면 문^제는 좀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카메네프가 제공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독재가 (국민당을 통해서) 레닌이 말하는 의미에서 “실현”되었으며 더욱이 이중권력 상태의 우리나라보다도 보다 완벽하고 보다 완성된 형태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라제크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저히 구제불능의 바보만이 중국에서 ‘민주주의’의 제2개정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영구239-240)
만일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 독재가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던 케렌스키 체제라는 형태로 실현되었을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역사가 볼셰비즘의 전략적 슬로건을 잔인하게 마음껏 조소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사실로서−형태학적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극히 위대한 역사적 현실로서−실현되었다. 다만 그것은 10혁명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야 비로소 실현되었다.(영구240)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농민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했던 것이다. 두 계급간의 협력은 10월혁명을 통해서 거대한 규모로 실현되었다. 동시에 무지한 농민들도 누구나, 레닌의 해설이 없었다 해도, 볼셰비키의 슬로건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지할 수 있었다. 또한 레닌 자신도 10월혁명−그 첫단계−을 민주주의혁명의 진정한 실현으로, 또한 그럼으로써−비록 변화되긴 했어도−볼셰비키의 전략적 슬로건의 진정한 구현으로 평가하였다.(영구240)
레닌: “(…) 혁명의 실제 경로는 우리의 추론이 올바름을 확인시켜 주었다. 처음에는 농민층 ‘전체’와 함께 군주제, 지주, 중세적 유제에 반대(그러한 한에서 혁명은 부르주아적,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다)한다. 다음에는 빈농, 반프롤레타리아트, 모든 피착취계급과 함께 도시 부유층, 쿨락(부농), 투기꾼을 포함해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그러한 한에서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된다.”(영구241)
이것이 바로 10월혁명을 포함해서 혁명에 대해 결론적인, 일반화된, 완결된 평가를 내릴 때, 레닌이−“때때로”가 아니라 항상 혹은 보다 정확하게 변함없이−이야기했던 내용이다. “결과는 우리가 말한 그대로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제휴로서 실현되었다. 케렌스키 시대에? 아니다. 10월혁명 이후의 최초의 시기에였다. 그것이 정확한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로 실현되었다. 그와 함께 낡은 대수적 정신의 필요 역시 소멸해 버렸다.(영구241)
만일 카메네프를 비판했던 1917년 레닌의 조건부의 주장과 10월혁명에 대한 그 이후의 완전한 레닌주의적 특징규정이 무비판적으로 병렬된다면, 러시아에서는 두 번의 민주주의 혁명이 “실현”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결론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봉기라는 점에서 첫 번째 혁명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영구241)
「평가와 전망」: “봉건제의 철폐는 억압받는 계급으로서의 전체 농민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누진소득세제 역시 대다수 노인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를 보호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입법은 어느 것이든지 농민 대다수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소수 농민의 적극적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쩔 수 없이 계급투쟁을 농촌에까지 끌고 들어가게 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비록 비교적 좁은 한계 내에서이긴 하지만, 전체 농민들 속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발견될 수 있는 이해관계의 일치를 파괴시킨다. 권력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빈농과 부농 사이의,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업 부르주아지 사이의 적대관계 속에서 지주(支柱)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영구242)
이 모든 것들은 농민에 대한 “무시”나 레닌과 나의 노선 사이의 완전한 “적대관계” 따위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앞에서 제시되었던 레닌으로부터의 인용문은 그의 저작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닌의 경우에는 항상 그러하듯이, 사실들을 보다 명쾌하게 밝혀주는 새로운 정식들이 전기간에 걸쳐서 그의 연설과 논설들의 기축이 된다. 1919년 3월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1917년 10월에 우리는 농민 전체와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농촌 지역에서의 계급투쟁이 아직까지 발전되지 못하고 있었던 한에서는 이것은 하나의 부르주아 혁명이었다.”(영구242)
1919년 3월의 당대회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프티부르주아 혁명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우리의 혁명은 빈농위원회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즉 1918년 늦여름 내지는 가을까지는 상당한 정도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영구242-243)
레닌은, 10월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말한다. 단지 그랬기 때문에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이것이 올바른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 즉 실제로 전제정치 체제와 농노제를 파괴하고 봉건 영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했던 독재는 10월혁명 이전이 아니라 혁명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맑스의 표현에 따른다면, 농민전쟁에 의해 지지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몇 달 후에 사회주의적 독재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영구243)
라제크에 의하면, 영구혁명론은 부르주아적 단계와 사회주의적 단계를 혼동함으로써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계급적 동력이 이들 두 단계들을, 우리의 형이상학자들이 더 이상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혼동”, 즉 결합시켰다.(영구243)
야코블레프: “농민 봉기(1917년 3월부터 10월)에서 우리는 이중의 한계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농민 전쟁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면서도, 봉기는 그러한 제약을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인근 지주의 괴멸이라는 당면 임무의 한계를 타파하지 못하였으며, 스스로를 조직적 혁명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으며, 농민 운동의 특징인 초보적 반란의 성격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농민 봉기 그 자체−그 목적이 인근 지주의 근절에만 국한되는 초보적 봉기−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며, 지주를 떠받치고 있고 농민에 적대적인 국가권력을 파괴할 수도 없다. 농업운동이 그에 상응하는 도시 계급에 의해 지도될 때에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나라의 중심부에서 부르주아지에게 치명적 일격을 가했던 노동계급만이 농민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도시에서의 노동계급의 승리만이 수천만의 농민들과 수만의 지주들 사이의 초보적 충돌이라는 한계로부터 농민 운동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끝으로 오직 노동자계급의 승리만이, 빈농과 중농을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계급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농민 조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농민 봉기의 승리 문제는 도시에서 노동계급의 승리의 문제였다. (…) 농민 혁명은 1917년에 부르주아 혁명으로서는 승리할 수 없었다.(맞다!−트로츠키) 두 가지 길만이 가능했다. 즉,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의 공격에 의해 패배하거나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함께 전진하며 그것을 보조하는 운동으로서 승리를 거두느냐였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부르주아지가 담당했었던 사명을 떠맡음으로써, 그리고 농업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을 지도할 임무를 떠맡음으로써,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을 획득하였다.”(영구244-245)
야코블레프의 주장에서 기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농민은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도시 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필연적이라는 것,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농업 혁명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것, 농업 혁명의 지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농민 전쟁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는 것 등이다.(영구245)
이것은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적’인가 혹은 ‘사회주의적’인가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 제기를 뿌리째 파괴시켜 버린다. 문제의 핵심은 부르주아 혁명의 토대를 이루는 농업 문제가 부르주아지의 지배 하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농업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된 이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성취되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으로서 등장하였다. 한 마디로, 야코블레프의 이러한 회고적 도식 가운데에서, 우리는 내가 1905년에 정식화했던 영구혁명론의 기본적 요소들을 모두 발견하게 된다.(영구245-246)
그러나 영구혁명론에 대한 야코블레프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혹은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모든 스탈린주의자 관리들에게 썩 잘 어울리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 경우 야코블레프는 10월혁명의 추동력에 대한 그의 분석과 자신의 반“트로츠키주의” 투쟁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매우 간단하다. 그는 그러한 조화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영구246)
볼셰비크 슬로건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레닌 자신의 전체적 평가는, 두 가지 노선, 즉 영구혁명론과 레닌의 노선 사이의 차이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의미밖에 없는 데 반해 양자를 결합시키는 것은 매우 근본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또한 10월혁명에 의해 융합된 양 노선의 이러한 원칙은 스탈린의 2~3월 노선이나 카메네프, 르이코프, 지노비예프 등의 4~10월 노선뿐만 아니라, 또 스탈린, 부하린, 마르티노프의 중국 정책뿐만 아니라, 현재 라제크의 ‘중국’노선과도 화해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다.(영구247)
레닌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은 그의 ‘대수적’ 정식으로부터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서 그것을 혁명의 실제의 발전에 대립시켰다.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러시아 볼셰비키의 최고 지도부는 반혁명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만일 레닌이 때맞추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훗날 중국 혁명을 교살하였듯이 반트로츠키 투쟁의 기치 아래 10월혁명을 교살할 수 있었을 것이다.(영구249)
매우 신앙심 깊은 태도로, 라제크는 당 지도층 전체의 그릇된 입장을 일종의 “우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스탈린, 몰로토프, 르이코프, 칼리니, 노긴, 밀류친, 크레스친스키, 프룬제, 야로슬라프스키, 오르죠니키제, 프레오브라젠스키, 스밀가, 기타 많은 “고참 볼셰비크”들의 천박한 민주주의적 입장에 대한 맑스주의적 설명으로서는 라제크의 “우연”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영구249)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본능과 그때까지의 볼셰비즘 활동에 의해서 준비되었던 당 하부의 혁명적 압력이, 레닌으로 하여금 당 최고 지도부와의 투쟁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최단시간내에 당 정책을 새로운 노선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했던 것이다.(영구249)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오늘날 중국, 인도 등의 나라에 대수적 형태의, 즉 매우 애매한, 레닌의 1905년 정식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가? 또한 우리가 중국판 혹은 인도판 스탈린들이나 르이코프들(潭平山, 로이 등)이 그 정식을 프티부르주아적인 민족⋅민주적 내용으로 채우도록 용인해 두었다가, (중국판⋅인도판) 레닌이 적시에 출현하여 4월 4일의 필수적 정정을 수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가? 중국이나 인도에 대해 그러한 정정이 보증되어 있는가? 그것보다는 이 정식에,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그 필요성이 입증된 그러한 구체적인 정정을 가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영구250)
포병부대에서 목표물을 사격함에 있어 계속적으로 표적에 접근해 나가는 방법을 협차포격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방법은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실수는 실수라는 것을 즉시 인정하고 지체 없이 필요한 정정을 가하는 것이다.(영구250)
레닌의 정식의 위대한 역사적 의의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라는 조건 하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정치적 문제들, 즉 다양한 프티부르주아 집단들, 특히 농민이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끝까지 탐구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의 완벽함 덕분에 1905~1917년의 볼셰비키의 경험은 ‘민주주의 독재’에 대해서는 문을 굳게 닫았다. 레닌은 그 문 위에 스스로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써붙였다. 그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식화했다. 즉, 농민은 부르주아와 함께 나아가거나 아니면 노동자와 함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물들은 볼셰비즘의 과거의 정식에서 도출되는 이러한 결론을 완전히 무시하였으며, 이 결론과는 반대로 잠정적인 가설을 강령 중에 삽입함으로써 그것을 성전화해 버렸다.(영구250-251)
제6장 역사적 단계의 비약에 대하여
스탈린에 이어서 라제크도 역시 나에 대해 역사적 단계의 비약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계몽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어야만 한다. 즉, 만일 1905년의 나에게 ‘사회주의 혁명’만이 문제였다면, 왜 내가 선진 유럽보다도 후진 러시아에서 먼저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 서구에서보다 여기에서 먼저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오직 역사가 부르주아 혁명의 주요 내용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를 결합시켰기−그들을 혼동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시켰기− 때문이다.(영구252)
단계를 비약할 수는 결코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전체로서의−즉 완전한 범위에서 고찰된−발전과정을 이론적으로 분해함으로써 도출되는 분리된 개별적 “단계”들을, 살아 있는 역사과정은 항상 비약한다. 이것은 결정적 순간에서의 혁명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혁명가와 천박한 진화론자의 첫 번째 차이점은 그러한 순간들을 인지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영구252-253)
수공업, 매뉴팩처, 공장이라는 맑스주의의 3단계 도식을 알지 못한다면 러시아의 근대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 알아서도 역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러시아 역사는−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몇몇 단계를 건너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적 단계구분은 러시아의 경우도 역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비약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또한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영구253)
러시아는 맑스의 3단계 모두를−처음 두 단계는 극히 집약된 맹아적 형태로−거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퇴화기관”들, 즉 수공업과 매뉴팩처 단계는−말하자면 단순히 점으로만 표시되지만−경제적 과정의 발생학적 단일성을 확증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계의 양적인 축약은 그 나라의 사회구조 전체에 전혀 새로운 성질을 각인시킬 만큼 중요한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성질’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이 10월혁명이다.(영구253)
이러한 논의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스탈린의 “이론”화인데, 그는 그의 이론적 전재산을 구성하는 두 가지 장신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균등 발전의 법칙’과 ‘단계의 비약 불가능’이다. 스탈린은 단계의 비약(혹은 한 단계에 정체하는 것)이야말로 불균등 발전의 내용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영구혁명론에 대항하여 스탈린은 독특하게 진지한 자세로 불균등 발전의 법칙을 정립하였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러시아가 선진 영국^보다도 먼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은 전적으로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의존하고 있다.(영구253-254)
역사적 ‘단계’의 변증법은 혁명적 고양기에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반대로 반동기는 필연적으로 천박한 진화론의 시대가 되어 버린다. 이데올로기적 천박성의 극치이자 당 반동의 훌륭한 소산인 스탈린주의는 정치적 추수주의와 누더기를 둘러싼 승강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단계에 의한 진보라는 독자적인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냈다.(영구254)
이론적으로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이 이러저러한 단계가 있다. 또한 역으로, 이론적으로는 ‘불가피한’ 단계라고 해도 특히 혁명과정에서는 발전 동력에 의해 압축되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 불리는 것은 이러한 연유인 것이다.(영구254)
중국에서의 현재의 반혁명적 단계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패배의 조직자로서 역사에 남을 스탈린과 부하린의 파멸적 정책의 직접적 결과이다. 기회주의의 결과들은 혁명 과정을 오랫동안 저지할 수 있는 객관적 요소가 되었다.(영구254)
대중의 발전에서 실제적, 즉 객관적으로 조건지워진 단계들을 건너뛰려는 어떠한 시도도 정치적 모험주의이다. 노동자 대중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자들, 국민당 혹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그들 앞에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전복이라는 과제를 제시할 수는 없다. 대중들이 그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준비는 하나의 매우 오랜 ‘단계’임이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이 그들의 지도자들−그 동안 우리가 우정을 다해 지지해 왔던−에 환멸을 느낄 때까지는” 우리가 “대중과 함께” 처음에는 국민당 우파로, 다음에는 국민당 좌파로 머물러야만 한다든가 혹은 파업 파괴자인 퍼셀과의 제휴를 유지해야만 한다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추수주의자들뿐이다.(영구254-255)
1919년 4월 레닌: “러시아의 후진성과 러시아가 보다 고차적 형태의 민주주의로 비약하였다는 사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 소비에트 민주주의 혹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비약하였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특히 서구에서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늦어지게 했던 이유들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영구255)
레닌은 여기서 러시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 비약”하였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확실히 레닌의 진술에는 필요한 단서들이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결국 변증법은 모든 구체적 조건들을 매번 반복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쓰려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 독자 자신도 역시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는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선 비약은, 레닌의 정확한 관찰에 따르면, 온갖 교조주의자들과 도식주의자들이−‘서구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에서도−소비에트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영구255-256)
「1905년」: “이미 1905년에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프롤레타리아 정부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명법은 당시에는 일상적 언어에 속했으며 권력 쟁취를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의 강령 속에 완전히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제정에 반대하여 주도면밀한 정치적 민주주의 강령(보통선거, 공화제, 민병제 등)을 제출하였다. 우리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근로대중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필수적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경우에는 이 단계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지만 다른 어떤 경우에는 혁명적 상황이 대중으로 하여금, 심지어 정치적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현실화되기도 전에,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한다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붙는다.”(영구256)
앞에서 인용했던 레닌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이러한 말들은 국민당의 독재에 반대하여 “주도면밀한 정치적 민주주의 강령”을 제출할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라제크가 좌선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혁명적 고양기에는 그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탈당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반혁명적 독재의 시기에 그는 민주주의적 슬로건 아래 중국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여름에는 모피옷을 입고 겨울에는 벌거벗고 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영구256)
제7장 오늘날 동양에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 ‘단계’에 대한 스탈린주의적−혁명적이 아니라 진화론적이고 속물적인−개념 속에서 길을 잃은 결과, 라제크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동양 전체에 대해 정당화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레닌이 특수한 나라의 발전 과정에 적용시켰던 볼셰비즘의 ‘작업가설’−레닌은 그것을 변화시키고 구체화시켰으며 일정 단계에서는 그것을 버려 버렸다−로부터 라제크는 초역사적 도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영구257)
라제크: “이 이론과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전술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전의 사회⋅정치 구성체가 유산으로 남겨 놓은 제문제를 부르주아지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나라들⋅에 적용될 수 있다.”(영구257)
이 정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것은 1917년 카메네프의 입장에 대한 엄연한 정당화가 아닌가? 2월혁명 후에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농업 문제를 포함하여 그것들 모두가 미해결로 남았다. 왜 레닌은 옛 슬로건이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까? 왜 그는 옛 슬로건을 철회했을까?(영구257)
이것은 케렌스키 체제가 이룰 수 없었던 것임이 명백하다. 이로부터, 오늘날의 가장 첨예한 문제인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제크가 우리나라의 과거를 탐사했던 것 역시 전혀 불합리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검토되어야 했던 것은 1905년에 트로츠키가 이해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17년 2~3월에 스탈린, 몰로토프, 특히 르이코프와 카메네프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나는 당시 라제크의 입장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중 권력 하에서 중심적 슬로건의 즉각적 변동을 초래할 정도로 민주주의 독재가 “실현”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는 국민당 정권을 통해, 즉 담평산이 식객으로 붙어있던 장개석과 왕정위의 지배를 통해 보다 완전하고 완벽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영구258)
그런데 “이전 사회⋅정치 구성체의 유산”이 아직도 중국에서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아직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고참 볼셰비키”의 상층부 전체에 대해 투쟁을 선언했던 1917년 4월 4일에, 그것이 청산되었던가? 라제크는 절망적인 자기모순에 빠져서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구성체들의 유산”이라는 복잡한 표현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봉건제 혹은 농노제의 유물’이라는 보다 명확한 용어를 명백히 회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영구259)
라제크: “중국 혁명의 원천은 1905년 우리 나라의 혁명에 뒤지지 않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1905년의 우리의 경우보다 중국에서 더욱 강고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이 두 계급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만 대결할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영구259)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과 함께 단 하나의 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봉건제의 유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대해−투쟁하는 경우에, 도대체 그러한 혁명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아마도 민주주의 혁명이겠지? 라제크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1905년이나 1909년이 아닌 바로 1927년 3월이라는 사실만을 기억해 두자. 이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매우 단순하다. 1927년 3월에 라제크도 역시 바른 길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영구259)
중국에는 지주 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지주들은 제정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자본가들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농업 문제의 특수한 비중은 중국의 경우가 더 작다. 하지만, 반면에 민족해방의 문제가 매우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결과, 민주주의적 변혁을 위한 중국 농민들의 독자적인 혁명적 정치투쟁의 역량은 러시아 농민들보다 확실히 크지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1925년 이전에도 그리고 중국 혁명 3년간에도 농업혁명의 깃발을 내건 나로드니크 정당이 생겨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났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1925~1927년의 경험을 겪은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은 2월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반동적인 함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영구259)
라제크: “맑스에게는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이 없었으나, 레닌에게는 그것이 1905년부터 1917년까지에 걸쳐 정치적 기축이었으며, 초기적(?) 자본주의 발전 상태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에 대한 그의 인식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는 것이었다.”(영구260)
레닌이 쓴 몇몇 구절들에 기초하여 라제크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독일 혁명의 중심적 과제는 민족 통일이었던 반면에 러시아에서 그것은 농업 문제였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대비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균형감각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떨까? 농업 문제와 비교할 때, 민족 문제가 갖는 특수한 비중은 반식민지 중국의 경우가 심지어 1848~50년의 독일보다도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중국의 경우에 그것은 통일의 문제임과 동시에 해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맑스가 영구혁명의 관점을 정식화했던 것은, 독일에서 모든 왕권이 여전히 확고부동했고 융커들이 토지를 보유하였으며 부르주아 지도자들은 정부의 대기실에서만 묵인되던 그러한 때였다. 중국에서는 1911년 이래 군주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지주 계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 부르주아적 국민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농노제적 제 관계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부르주아적 착취와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따라서 라제크가 했던 맑스와 레닌의 관점의 대비는 중국에서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완전히 반박해 주고 있다.(영구260)
그러나 라제크는, 맑스가 아직까지 농민을 프티부르주아적 도시 민주주의의 본래적 동맹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1850년의 유인물에만 스스로를 한정함으로써, 맑스의 입장조차 진지하게 흡수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우연적으로, 그리고 에피소드적으로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당시 맑스는 독일에서 독자적 단계의 민주주의 혁명, 즉 농민의 지지를 받는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적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일시적^ 권력 장악을 기대하였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중반에 프티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세력은 그 자신의 독자적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폭로하였다. 맑스는 이러한 교훈을 고려하였다. 6년 후인 1856년 4월 16일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독일에서의 모든 사태는 농민전쟁의 제2판 같은 것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뒤를 받쳐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사태는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영구260-261)
라제크가 완전히 잊고 있는, 이 주목할 만한 구절은 10월혁명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정말로 값진 열쇠가 된다. 맑스가 농업 혁명을 건너뛰었는가? 그렇지 않다. 주자하는 바와 같이 그는 그것을 건너뛰지 않았다. 그는 당면한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는가? 그렇다. 그는 혁명에서 농민의 지도적 역할, 아니 최소한 독자적 역할의 가능성만이라도 인정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민주주의 혁명 속에서 (농민들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결함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원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원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는 출발하였다.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사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라제크는, 바로 이것이 10월혁명에서 일어났으며, 그것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음이 분명하다.(영구261)
중국에 관해서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다. 논쟁은 동맹자로서의 농민의 결정적 역할에 관한 것도, 농업 혁명의 중요성에 관한 것도 아니며, 다만 중국에서 독자적인 민주주의적 농업 혁명이 가능한가 아니면 ‘농민 전쟁의 제2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원조하게 될 것인가를 둘러싼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문제이다.(영구261)
동양 여러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에의 길을 열어 나가기 위해서는, ‘단계’와 ‘국면’에 관한 스탈린과 마르티노프의 현학적 반동적 이론이 뿌리째 제거되어, 폐기되고, 파괴되고, 일소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볼셰비즘은 이러한 천박한 진화론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성숙해 왔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설정된 진군 노선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실제적 과정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야만 한다. 스탈린과 쿠시넨의 관념−다양한 발전단계에 있는 나라들에게 미리 혁명에 관한 상이한 배급카드를 할당해 줌으로써 혁명의 승계 순서를 고정시킨다는 관념−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계급투쟁의 실제적 과정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안내자가 레닌이다.(영구262)
1919년에 레닌이, 특히 코민테른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지난 시대의 여러 가지 결론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에 훨씬 더 완전해진 이론적 정식화를 부여하였을 때, 그는 케렌스키 체제와 10월혁명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계급 적대가 이미 발전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건 은폐되건 간에, 부르주아 독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중간적 체제란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다. 모든 민주주의, 즉 모든 “민주주의의 독재”(아이러니한 인용부호는 레닌의 것이다)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위한 베일에 불과하다. 이는 가장 후진적인 유럽 국가인 러시아의 경험이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에, 즉 “민주주의의 독재”에 가장 유리했던 시기에 이미 보여 준 그대로이다. 레닌은 이러한 결론을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테제들−이들은 2월혁명과 10월혁명의 경험을 총괄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졌다−의 기초로서 여겼다.(영구262)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라제크 역시 민주주의의 문제를 민주주의 독재의 문제와 기계적으로 분리시킨다. 이것이 대실수의 근원이다. “민주주의 독재”는 혁명 동안의 부르주아지의 은폐된 지배일 수밖에 없다. 1917년의 “이중권력”의 경험과 중국에서의 국민당의 경^험은 모두 우리에게 이 점을 가르쳐 준다.(영구262-263)
속물 아류들의 절망감은, 그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독재와도 대비시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극히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 독재가 중간적 성격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참여한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다양한 계급 노선들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산술적 평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부르주아 독재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아니라면, 프티부르주아지가 규정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세 번의 러시아 혁명과 두 번의 중국 혁명에 의해서 실천적으로 이미 해답이 얻어진 문제와 동일한 문제로 우리를 후퇴시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즉, 오늘날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라는 조건 하에서 프티부르주아지가, 아무리 아직까지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에 직면해 있는 후진 국가의 경우라고 해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도적인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영구263)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프티부르주아지로부터 분리되었고 또한 자본주의 발전−이는 프티부르주아지를 무력화시키고 농민으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에 직면하게 한다−에 기초하여 대부르주아지와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 아무리 후진적인 부르주아 사회라 할지라도 현대의 생활을 프티부르주아지가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농민이 표면상으로 프티부르주아적으로 보이는 정당을 선택할 때, 그들은 항상 실제로는 금융자본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영구263)
그것은 10월혁명 이후 여러 나라에서 가능한 모든 형태로 실천 과정에서 새롭게 제기되었으며,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케렌스키 체제의 뒤를 이은 가장 기본적 경험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민당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의 경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거기서는 무장한 프티부르주아지가 구 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였으나 곧 자기의 지도자들을 통해 그것을 금융과두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영구264)
농민은 부르주아 독재를 지지할 수도 있고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지주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중간적 형태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거나 아직 혼란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부르주아 독재(케렌스키 체제, 파시즘, 필수스키 체제)를 위한 가면일 뿐이다.(영구264)
농민은 부르주아지를 따를 수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을 따르지 않는 농민들과 함께 나아가려고 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실상 금융자본을 추수하는 것임이 증명된다. 1917년 러시아에서의 조국 방위자로서의 노동자들, 중국의 국민당내의−공산주의자들도 포함하는−노동자들, 폴란드 사회당의 노동자들, 그리고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1926년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 등이 그 예이다.(영구265)
다음의 구절은 1918년 이후에 레닌이 여러 번 반복했던 것이다. “정치경제학 전체, 만일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다고 한다면, 혁명의 전역사, 그리고 19세기 전체에 걸친 정치 발전의 전역사는 우리에게 농민은 노동자나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른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민들에게는 나는…18~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의 전개 과정이나 19세기의 각국의 정치사를 생각해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이 당신에게 그 이유를 이야기해 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는, 그 사회의 지배 세력은 오직 자본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구조이다. 그 사회의 경제 구조 내에는 그밖에 다른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영구265)
여기서는 근대 영국이나 독일이 문제는 아니다 18~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 즉 후진국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의 교훈에 기초하여, 레닌은 부르주아 독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즉 중간적 독재라는 것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영구265-266)
쿠시넨의 뒤를 이어 라제크 역시 역설적으로 된다. 즉, 트로츠키에게는, “중국 및 인도 혁명의 특수성은 서유럽의 혁명들과 결코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첫 단계(?!)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다.(영구266)
라제크는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서유럽 국가가 아니라 바로 후진적인 동유럽 국가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과정이 러시아의 “특수성”을 묵살했던 것이 트로츠키의 오류인가? 라제크는 또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발전수준이나 사회 구조 혹은 전통 등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즉 모든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보다 중요하게는 금융자본−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이들 특수성에 대한 존경의 결여는 역사적 발전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결코 트로츠키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님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영구266)
그렇다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차이는 매우 크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배라는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형태와 방법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한쪽 극단에서는 그 지배는 강고하고 절대적 성격을 갖는다−미국. 다른 한쪽 극단에서는, 금융자본이 아시아적 중세의 낡은 제도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그것들에 자신이 특유한 방법들을 강제함으로써 스스로를 그것들에 적응시킨다−인도. 그러나, 어디에서나 부르^주아지가 지배한다. 이로부터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사회적 토대나 정치적 형태, 당면 과제, 그리고 활동의 템포 등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 봉건주의자, 그리고 국민 부르주아지의 블록에 대한 승리에로 인민 대중을 이끄는 것, 이것은 권력 장악 후에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전환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헤게모니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영구267)
라제크는, 자기가 인류를 두 그룹−사회주의 독재가 가능할 만큼 ‘성숙한’ 그룹과 민주주의 독재만이 가능할 만큼 ‘성숙한’ 또 다른 그룹−으로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나와는 대조적으로, 개별 국가들의 소위 “특수성”들을 고려한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각국의 특수성, 즉 각국에 있어서 역사적 발전의 다양한 단계 및 계기들의 살아 있는 상호침투에 대한 진정한 탐구로부터 분리시킬 수밖에 없는 판에 박힌 문구들만을 떠들어 왔다.(영구267)
물론 이러한 투쟁의 성공 가능성은 그 나라 경제에서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과 또한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수준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그것의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해결을 위해서는 극히 과감한 혁명적 조치들이 요구되는 그러한 심각하고 시급한 ‘인민을 위한’ 문제가 그 나라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농업 문제와 민족 문제가 있다.(영구267)
식민지 국가들의 첨예한 농업 문제와 참을 수 없는 민족적 억압이라는 조건 하의 미성숙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민주혁명^에 기초하여, 순수하게 사회주의적인 혁명을 기초로 하는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다.(영구267-268)
총체로서의 세계경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회주의가 가능할 만큼 성숙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나라들 각각이 성숙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 등과 같은 여러 후진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역사는 주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기 이전에, 심지어는 광범위한 사회화 정책들이 가능하게 되기도 전에 먼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조건들이 성숙하게 되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다. 사회적 발전의 예정된 조화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스탈린의 다정다감한 이론적 포옹에도 불구하고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법칙은 나라들 상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의 다양한 과정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도 작용한다.(영구268)
경제와 정치의 불균등한 과정들의 조화는 세계적 규모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가 배타적으로 중국의 경제와 정치라는 틀 내에서만 다루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두 가지 서로 배타적인 관점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국제혁명적인 영구혁명론과 민족개량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론이 바로 그것이다.(영구268)
후진적인 중국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국적 한계 내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국유화에 이를 만큼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한 생산력과 마찬가지로, 국민적 경계를 넘어서 발전한 고도의 생산력이 이것을 방해한다. 예컨대 영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면하게 될 것들과 성격은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덜 심각하지는 않는 난관과 모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들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오직 국제적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영구268-269)
여기서 중국의 후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과제를 극히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즉, 역사는 주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중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영구269)
이것이 가장 후진적인 식민지 국가들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능할 만큼은 성숙해 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식민지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겠다.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민족적⋅민주주의적 과제를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다는 이야기가 어디에 적혀 있는가?(영구269)
제국주의 시대라는 조건 하에서 민족⋅민주 혁명은, 오직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 대중의 지도자로서 권력을 장악할 만큼 성숙되어 있을 때에만, 최종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수행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때는 민족해방 투쟁은 단지 극히 부분적인 결과, 그것도 근로 대중에 전혀 적대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영구269)
중국의 경우는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 장악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코민테른 지도부가 제지함으로써, 민족적 과제는 국민당 정^권 속에서 비참하고 불안정하고 빈약한 해결책을 찾는 데 그치고 말았다.(영구269-270)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 하에서 식민지 국가가 자신의 농업 문제와 민족 문제를 진정하게 혁명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될 것인지는 미리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진정한 민중민주주의, 즉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될 것이라는 점은 지금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그러한 도상에도 역시 여러 단계, 국면 및 계기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영구270)
인민 대중의 압력 하에서 부르주아지는 어느 정도 진보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음에 프롤레타리아트를 훨씬 더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중권력의 시대는 가능하며 또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존재할 수도 없다. ‘독자적인’ 민주주의 독재란 기껏해야 국민당과 같은 형태, 즉 노동자와 농민에 전적으로 적대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영구270)
스탈린과 부하린은, 제국주의의 멍에 덕분에 중국에서 부르주아지가 국민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틀림없이 시도는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수령의 도끼 아래 장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곧 민주주의 독재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프티부르주아 독재는 자본 독재의 가면에 불과함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농민은 노동자나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생겨난다. 반대 경우에는 부르주아 독재가 생겨난다.(영구270)
노동자와 농민이 밤을 구워 부르주아지에게 바치기 위해 ‘협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협력의 정치역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달라. 당신네들은 국민당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어떤 정당이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영구271)
레닌이 여러 번, 농민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멘셰비키의 특징이라고 말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들 인용문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가 사회혁명당과 굳게 제휴하여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의 8개월을 허송세월했던 1917년도 있었다. 그 시기에 사회혁명당은 혁명에 의해 각성된 농민의 압도적^ 다수를 대표했다. 사회혁명당과 함께 멘셰비키는 스스로를 혁명적 민주주의라고 불렀으며 바로 자신들이 노동자와 농민(병사)의 동맹에 기초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충고하였다. 따라서 2월혁명 후에는 멘셰비키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볼셰비키의 정식을, 말하자면 수탈했던 것이다. 그들은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전위와 농민을 분열시키고 그럼으로써 혁명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다시 말해 멘셰비키는 레닌이 농민을 무시하거나 적어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영구271-272)
레닌에 대한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등의 비판은 멘셰비키의 비판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현재 라제크의 비판은 카메네프의 비판의 뒤늦은 메아리에 불과하다.(영구272)
1917년에 우리는 체레첼리나 단 등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혁명적 민주주의의 독재를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백 번이나 들었다. 참으로 사람의 기억은 오래 가지 않는 모양이다. 스탈린과 라제크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체레첼리와 단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영구272)
제8장 맑스주의에서 평화주의로
외부로부터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 논의하면서, 라제크는 레닌이, “…1905년 당시의 러시아의 경제발전 수준에서는 이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서유럽 노동자들이 도와 줄 때에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영구275)
레닌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독재(결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는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없이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1906년 스톡홀름 당 대회 당시의 레닌의 논설이나 연설들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플레하노프와의 논쟁, 국유화 문제 등). 당시에 레닌은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적조차 없었다.(영구275)
“1905년 당시의 러시아의 경제 발전 수준에서는”이란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1917년의 수준에서는 문제가 어떠할까? 일국사회주의론은 바로 이러한 발전 수준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다. 코민테른 강령은 전세계를 자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충분한” 발전 수준에 이른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들로 구분하고 나아가 혁^명 전략이랍시고 일련의 절망적인 막다른 골목길을 만들어 냈다.(영구275-276)
그러나 1905년과 마찬가지로 1917년의 경제 발전 수준에서도 독재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이 적절히 도와 줄 때에야 비로소 유지되고 사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적절함’은 선험적으로 계산될 수 없으며 발전과 투쟁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 국제적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비한다면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발전 수준의 차이는, 비록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부차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영구276)
라제크: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독재의 유지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원조 사이의 이러한 연관만을 극단화시키지는 않았다. 반면에 트로츠키의 정식은 그것을 과도하게 극단화하여 국가적 원조, 즉 이미 승리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원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영구276)
스탈린과 달리 레닌은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을 결코 대비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혁명적 원조의 문제를 나보다도 훨씬 날카롭게 정식화하였다. 제1차 혁명 시기에 그는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없이는 민주주의를(민주주의조차!)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쉬지 않고 되풀이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917~1918년 및 이후의 시기에 레닌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던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되지 않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혁명의 운명을 생각하거나 평가해 본 적이 없었다. 예컨대 그는 “독일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없이는 우리는 끝장이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1905년의 “경제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1918년에 하였다. 그리고 그는 몇 십 년 뒤의 미래가 아니라 당면한 시기, 즉 몇 달은 아니더라도 몇 년 간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영구276-277)
레닌: “바로 여기에 러시아 혁명의 최대의 어려움이 있다. …즉 국제적 혁명을 불러일으킬 필요성이다.” 이것이 언제 쓰였는가? 니콜라이 2세가 혁명의 탄압에 관하여 빌헬름 2세와 협상을 벌이고 내가 ‘극단화된’ 정식을 제출했던 1905년이 아니라 1918년, 1919년 그리고 계속되는 해의 일이었던 것이다.(영구277)
레닌: “(…) 다른 나라들, 즉 보다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즉각 혹은 최소한 아주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괴멸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국제 혁명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영구278)
1921년부터 계속해서 사태는 나나 레닌이 (1905년뿐만 아니라) 1917~19년에 예상했던 것처럼 일직선을 따라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국가와 부르주아 세계 사이의 화해될 수 없는 모순이라는 선을 따라 전개되었다. 둘 중의 하나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국가는 오직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적 발전에 의해서만, 이러한 파멸의 위험으로부터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수호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의 입장과 레닌의 입장이라는 두 가지 입장을 발명해 내려는 시도는 이론적 꾀죄죄함의 극치이다.(영구278)
레닌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순한’(본질적으로 개량주의적이고 퍼셀적인) 원조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트로츠키는 국가 원조, 즉 혁명적 원조만을 “과도하게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발명하고 나서, 라제크는 계속한다. “경험은 이 점에 관해서도 역시 레닌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권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지만, 간섭기 동안에 세계 부르주아지가 우리에 대해 실제적 힘을 쏟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본주의 세계 자체의 적대 관계와 함께, 노동운동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개입이 끝날 때까지 8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 준 중요한 힘이었다.”(영구278-279)
라제크의 말에 따르자면, 레닌은 1905년에 그의 팜플렛 「두 가지 전술」(이것이 라제크가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저작이다)에서 1917년 이후에 국가와 계급들간의 세력관계는 우리에 대한 대규모 군사 개입의 가능성을 오랫동안 배제하는 그러한 것이리라고 예언했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트로츠키는 1905년에 제국주의 전쟁 이후에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될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였으며 강대한 호엔촐레른가의 군사력, 매우 강력한 합스부르크가의 군사력, 막강한 파리 증권거래소 등과 같은 당시의 현실만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영구279)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시대착오이며, 더욱이 그것 자체의 우스꽝스러운 내적 모순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되고 있다. 왜냐하면, 라제크에 따를 때 나의 주요한 오류는 “1905년의 발전 수준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전망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 오류는 명백해진다. 즉, 나는 1905년 혁명의 전야에 내가 제시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전망을, 1917년 이후에야 비로소 생겨났던 국제적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영구279)
최악의 것은 라제크가 맑스주의와 기회주의, 혁명적 입장과 평화주의적 입장을 구분해^주는 경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참으로 전쟁 반대투쟁의 문제, 즉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전쟁을 회피하거나 근절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즉,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인가 아니면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기 위한 내전인가?(영구280-281)
코민테른 제3타대회에서 당시의 극좌파들(지노비예프, 탈하이머, 텔만, 벨라 쿤 등)은 소련을 구하기 위해 서구에서의 폭동주의 전술을 주장하였다. 나는 레닌과 함께 그들에게 가능한 한 평이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즉, 그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원조는, 우리를 위해 즉흥적으로 혁명적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고 권력 장악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일 것이다라고. 당시,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라제크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편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의 편에 섰다.(영구28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닌은 제3차대회가 끝날 무렵 대의원들의 대규모친목회에서 수동적 대기주의적 경향을 직접 반박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교훈으로 끝을 맺는 일장연설을 하였던 것이다. 즉, 모험하지 말라, 하지만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지체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압력’만으로는 우리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라고.(영구280-281)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이 우리의 파멸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이 제국주의 전쟁의 극히 심각한 결과들 및 그것에 의해 악화된 국제적 적대 관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 것이 보다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제국주의 진영내의 투쟁인가, 경제적 붕괴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인가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문제를 그런 식으로 처박아 둘 수도 없다. 평화 요구 압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은,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던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너무도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일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의 결정적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이 충분히 효과적이었음이 증명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당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압력 행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또한 이 투쟁은 대개 내전의 형태를 취한다−의 문제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영구281)
1918년에도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은 호엔촐레른가가 발트해 지역과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이 모스크바에까지 진군해 오지 못했던 것은 오직 군사력이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리고 왜 우리가 브레스트강화을 체결해야만 했겠는가?(영구281)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압력’만을 소망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독일에서의 혁명이 없이는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거듭 주장했다. 휴지기가 길기는 했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옳았다. 환상을 버리자. 우리는 기약 없는 유예 상태에 있을^ 뿐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잠시 숨돌릴 여유’라는 조건 하에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영구281-282)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부르주아지가 전쟁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는 그러한 상태는 불안정한 계급적 균형 상태의 고차적 표현이다. 균형이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불안정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 쪽으로건 기울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하느냐, 아니면 부르주아지가 일련의 탄압 조치들을 통해 활동의 자유, 특히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의 활동의 자유를 회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혁명적 압력을 약화시키느냐일 뿐이다.(영구282)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을, 영원히 증대하는 요인으로 또 개입을 저지하는 보증서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개량주의자들뿐이다. 세계 부르주아지의 “중립화”에 기초하여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라는 이론(스탈린)이 생겨났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인식에서이다.(영구282)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정부에 대한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혁명적 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평화주의적’ 효과는, 그 개량주의적 효과와 마찬가지로, 권력 쟁취를 위한 혁명적 투쟁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것들은 상대적인 힘에 불과한 것이므로 쉽게 반대물로 전화될 수 있다. 즉, 그것들은 부르주아지를 전쟁에의 길로 몰아갈 수도 있다.(영구282-283)
라제크가 그토록 일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공포는 모든 사회평화주의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소망이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공포’만으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결정하는 것은 혁명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닌은 1905년에 군주제 복고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혁명적 승리라고 말했던 것이며, 1918년에는 자본주의의 재생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문제 해결 방식이다. 비록 “잠시 숨 돌릴 여유”가 길어지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정식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유효하다.(영구283)
제6차대회의 기본적인 오류는, 바로 스탈린과 부하린의 평화주의적 민족적 개량주의적 전망을 구하기 위해 반전 투쟁을 권력 투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전쟁 위험에 반대하는 혁명 기술적 처방을 추구했다는 사실에 있다. 제6차대회의 고취자들, 즉 일국사회주의의 가공할 건설자들−본^질적으로는 겁에 질린 평화주의자들−은 ‘압력’ 강화책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중립화’를 영속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일련의 나라들에서의 자신들의 지도가 혁명의 패배를 초래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전위를 후퇴시켰다는 것을 그들도 알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의 문제와 전쟁의 문제를 불가분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맑스주의의 소위 “극단화된 정식”을 방기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반전 투쟁을 자기완결적 임무로 만들어 버렸다.(영구283-284)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부르주아 체제의 수단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체제가 전쟁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코민테른의 반전 투쟁은 의례적 정식의 체계로 변질되어, 어떤 경우에나 자동적으로 반복되었으며 효력을 완전히 잃고 온데간데 없이 증발해 버렸다. 스탈린의 민족 사회주의는 코민테른을 부르주아지에 대한 보조적 ‘압력’ 수단으로 전화시키려고 하고 있다.(영구284)
제9장 에필로그
이미 1928년 2월에, 투항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라제크는 중국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전원회의(1928. 2)의 결의를 즉각 옹호하였다. 이 결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패배를 패배라고 불렀고, 중국의 승리한 반혁명을 중국 혁명의 최고 단계로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청산주의자로 규정하였다. 이 2월 결의에서는 무장봉기와 소비에트라는 방침이 선언되었다. 정치적 감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거나 혁명적 경험에 의해 단련된 사람들은 누구나 이 결의를 구역질나고 무책임한 모험주의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라제크는 그것을 옹호했다.(영구286)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1928)의 모험주의적 결의에 대해, 나는 이미, 중국에서 제헌의회 슬로건을 포함하는 민주주의적 슬로건 아래 중국 노동자들을 동원한다라는 방침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불운의 3인조는 바로 여기서 값싸고 무책임한 극좌주의로 빠져 버렸다.(영구287)
부르주아 반동의 시대에 소비에트라는 슬로건은 어린애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즉 소비에트에 대한 우롱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혁명의 시대, 즉 직접적 소비에트 건설의 시대에조차 우리는 민주주의적 슬로건을 철회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제의 소비에트가, 즉 이미 권력을 장악한 소비에트가 대중들의 눈앞에서 민주주의의 현실적 제도들과 충돌할 때까지 민주주의적 슬로건을 철회하지 않았다.(영구287)
민주주의적 강령−제헌의회, 8시간 노동제, 토지 몰수, 중국의 민족적 독립, 중국 인민들의 민족자결권−없이는, 중국공산당은 손발을 묶이고 중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수동적으로 자신의 진지를 넘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탈린, 라제크 및 그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의 지위를 떠맡게 될 것이다.(영구287)
케렌스키 혹은 장개석 정권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 어중간한 중간적 혁명 정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한 내용 없는 슬로건을 제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끄럽게도 동양의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새로운 재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영구288)
제10장 영구혁명이란 무엇인가? 기본 정식들
2. 부르주아적 발전이 지체된 나라들, 특히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들에 있어서 영구혁명론은,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성취라는 그들의 과제가 오직 종속된 민족−특히 그 농민 대중−의 지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순수하고 완전한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영구289)
3. 농업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 문제 역시 농민−후진국 인민의 압도적 다수−에게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이 없이는,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는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심각하게 제기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들 두 계급의 동맹은 오직 국민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영구289)
4. 개개의 나라들에서 혁명의 최초의 에피소드적 단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프로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동맹은 오직 공산당으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정치적 지도력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가, 오직 농민과의 동맹에^ 기초하면서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영구289-290)
5.(…) 농민의 혁명적 역할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결코 독자적 역할일 수는 없으며 하물며 지도적 역할일 수는 더욱 없다. 농민은 노동자를 따르거나 부르주아지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오직 뒤따르는 농민 대중을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영구290)
6. (…) 케렌스키 체제와 볼셰비키 권력 사이에, 국민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 단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존재하지 않는다.(영구290-291)
7. 동양의 국가들에게, 이미 역사에 의해 오래전부터 완전히 낡아빠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강요하려는 코민테른의 노력은 오직 반동적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 슬로건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슬로건과 대립적으로 제시되는 한, 그것은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프티부르주아적 대중 속으로의 용해를 초래함으로써 국민 부르주아지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들을 창출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붕괴시킨다. 이 슬로건을 코민테른의 강령에 도입하는 것은 맑스주의와 볼셰비즘의 10월혁명 전통에 대한 직접적 배반이다.(영구291)
8.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로서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불가피하게, 그리고 매우 급속하게, 부르주아적 소유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와 긴밀히 결부될 수밖에 없는 임무들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주의 혁명은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하며 그럼으로써 영구혁명이 된다.(영구291)
9.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쟁취는 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국내적 및 국제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을 토대로 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 전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조건 하에서 이 투쟁은 불가피하게 폭발, 즉 대내적으로는 내전, 대외적으로는 혁명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주 최근에야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한 후진국이건 이미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시대를 거친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이건 상관없이,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영구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영구291)
10. 일국적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사회주의 혁명은 국민적 무대에서 시작되어 국제적 무대에서^ 전개되고 결국에는 세계적 무대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보다 새롭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영구혁명이 된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새로운 사회의 궁극적 승리에 의해서만 완결된다.(영구292)
11. (…) 특정 조건 하에서 후진국은 선진국보다 먼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것은 선진국보다 늦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과 단결하여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후진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국가는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완결지을 수 없다. 이와는 바대로, 민주주의 혁명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독재와 사회주의의 앞으로의 운명은 결국 국민적 생산력뿐만 아니라, 그리고 국민적 생산력이라기보다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발전에 달려 있다.(영구292)
12. (…) 국제주의적 입장과의 단절은 항상 민족적 메시아주의를 초래한다. 즉, 자신의 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능히 해낼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우월성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만다. 세계적 노동분업, 외국 기술에 대한 소비에트 공업의 의존, 아시아의 자연 자원에 대한 유럽 선진국 생산력의 의존 등등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독립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불가능하게 한다.(영구292)
13. 러시아 혁명의 경험들과 배치되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이론은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과 기계적으로 대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국 혁명을 국제 혁명과 단절시키고 있다.(…) 민족 사회주의론에 의해서 코민테른은 기껏해야 군사적 개입에 반대하는 투쟁에나 유용한 보조적 무기로 전락해 버렸다.(영구293)
14. 부하린에 의해 기초된 코민테른 강령은 완전히 절충주의적이다. 그 강령은 일국사회주의론과 맑스주의적 국제주의를 융화시키려는 가망 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주의는 세계혁명의 영구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코민테른에서 올바른 정책과 바람직한 체제를 요구하는 공산주의 좌익반대파의 투쟁은 맑스주의적 강령을 위한 투쟁과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다. 또한 강령의 문제는 서로 배타적인 두 이론, 즉 영구혁명론과 일국사회주의론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구혁명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낡아빠진, 레닌과 트로츠키의 에피소드적 의견 차이라는 틀을 이미 오래전에 넘어서 버렸다. 그것은 한편으로 맑스⋅레닌의 기본적 사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도주의자들의 절충주의 사이의 투쟁이 된 것이다.(영구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