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유적지(사인보드)(울주군 두동면 만화리)1
1치산서원 2충렬공 박제상 기념관 3삼모녀상.4효열비 5박제상 추모비 6화장실 7주차장
두동면 칠조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林同과 飛鳥를 합하여 만화리라 불렀고
이 때부터 임동을 율림.옺밭과 비조(칠조)로 불리게 되었다.옺밭과 비조는 신라충신
박제상의 전설이 서려있는 마을로앞에는 정지마을을 두고 임란시 격전지인 마등오도
이곳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1울주군 반구대 암각화(국285호)(울주 언양 반구대안길) 2망해사지 석조부도(보173호)(울주 청량 율리)
3석남사 부도(보369호)9울주 상북 덕현리) 4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보370호)(울주 상북 등억리)
5청송사지 삼층석탑(보382호)(울주 청량 율리) 6두서면 은행나무(천64호)(울주 두서 구량리)
7목도 상록수림(천65호)(울주 온산 방도리) 8가지산 철쪽나무 군락지(천천462호)(울주 상북 덕현리)
9천전리 각석(국147호)(울주 두동 천전리) 10울주 검단리 유적(사332호)(울주 웅촌 검단리)
11언양읍성(사153호)(울주 언양 동부리.사부리)
12서생포 왜성(문8호)(울주 서생 서생리) 13언양 지석묘(기2호)(울주 언양 서부리) 등의 문화재가 있다.
홍살문 鴟山書院(울산기1호)2
치산서원지는 치산서원의 옛터로 박제상.그의부인.두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1745년(영조21년)
건립되었는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곳이다.서원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忠烈廟.부인을 모신
神母祠.두딸을 모신 雙旌閭가 있었다고 전해진다.1990년 복원했는데 구조는 前學後廟型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란 뜻으로 紅箭門 혹은 紅門으로도 불리며 주로 왕릉.묘지.향교.서원.궁궐
관아 등의 정문으로 설치되었다.홍살문 옆에는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걸어 들어가라는 하마비가
있는 경우도 많다.
신라만고충신 박제상 충렬묘 국대부인 신모사지3
삼강문(치산서원 외삼문)4
삼강문 현판5
관설당(박제상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6
관설당(박제상의 호) 현판7
관설당(사진과 서예)8
관설당(사진과 현판)9
동재(경의재-상급생 숙소)10
경의재 현판11
서재(영휘재-하급생 숙소)12
서재(영휘재 현판)13
思孝門14
쌍정려15
쌍정려 현판(딸 아기.아경)16
박제상공(큰딸 阿奇.막내딸 阿慶의 신위와 영정)17
망해문18
망해문 현판19
신모사20
신모사(신라충신 박제상공 국대부인(김씨부인)신위와 영정21
성인문22
성인문 현판23
충렬묘24
충렬묘 현판25
신라충신 박제상공(신위와 영정)26
전사청27
전사청 현판28
굴뚝29
삼모녀(국대부인.아기.아경)상30
망부석 여인31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32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 현판33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34
충렬공 박제상공과 국대부인 김씨35
치산서원 춘향대제36
만고의 충신 박제상과 부인.두딸의 얼을 추모하고 충.효.열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봄이되면 치산서원에서 춘향대제를 지내고 있다.
長沙 伐知旨37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갔으나 재상을 따라잡지
못한채 망덕사 절문남쪽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그래서 그 모래벌을 長沙
친척 두명이 겨우 그녀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썩 다리를 뻗고
주저 앉아버린 그곳이 伐知旨라고 불리워 진다.
望夫石과 隱乙岩38
그후 순절한 재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몸은 망부
석이 되고 넔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다고 한다.큰 딸 아기와 막내 딸 아경도
어머니를 따라 죽어 화석이 되니 망부석 좌우에 두돌이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차녀
아영만은 나마져 따라 죽으면 어미와 동생을 누가 묻어주며 또 동생 문량을 누가 양
육하랴 하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 천년에 으뜸 충신 박제상39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눌지왕의 두아우를 구하고 순국한
충신이다.조선 숙종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 라고 했으며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 라고 극찬했다.부인은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의 산신모가 되니 백성들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치술령곡 이라는 노래를 지어 되새기고 있다.치술령곡은 신라 때 노래로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증보문헌비고(1908년) 유래만은 전하고 있다.
신라 고구려와 왜에 볼모를 보내다40
18대 실성왕은 즉위 직후 402년 왜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데 왜왕은 징표로 17대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청했다. 실성왕11년에는 고구려가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를 삼고자 하였으므로 실성왕은 그를 보냈다.
눌지왕 박제상에게 두 아우를 구해올 것을 청했다41
19대 눌지왕이 즉위하자 두 아우(복호.미사흔)를 구해올 사람을 찾던 중 신하들은
박제상을 천거했다.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17대 내물왕.18대 실성왕. 19대 눌지왕)
고구려 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구하다42
만일 돌려보내 주신다면 대왕을 덕스럽게 생각함이 한량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돌려보내 줄 것을 고구려왕에게 청하니 복호와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않고 왜로 향하다43
이제 두 아우 중 복호만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박제상은 이미 저는 나라에
몸을 맡겼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일본은 입과 혀로 달랠 수가 없
으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신이 왜에 가거든 나라를 배반
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44
신라왕이 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이 정말 신라를 배반한
자로 여겼기에 왜왕은 감시를 소홀히 하자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돌아
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모셨는데 혼자 돌아
갈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자 제상이 말하기를 둘이 가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
까 염려됩니다 하니 미사흔이 혼자 귀국했다.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왜왕은 박제상을 목도로 유배보냈다가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에 목 베었다.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애통해
하며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가족에게 후하게 물품을 내렸다.또 미사흔으로 하
여금 제상의 둘째 딸(아영)을 아내로 삼게하여 그의 충절에 보답하였다.
박제상이 왜로 미사흔을 구하러 떠난다45
신라시대를 표현한 마을풍경46
방안(내부묘사)47
여인들(목화솜)48
신라충신 박제상 추모비49
(2018.06.15)
첫댓글 박제상기념관 대단하네. 언제 삼락회에서 한번 가도록 안내해야겠다.
박제상과 같은 충절이 있으면 이 나라가 반석위에 올라갈 것을...
생각해본다네.또한 국민들도 국가를 위하는 노력을 항상해야 된다고
생각 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