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징비록⌟에서 발췌한 조선 멸망의 단초가 된 서원(수정)
저자 박종인은 ⌜대한민국 징비록⌟의 부제를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징비를 ‘과거의 잘못을 경계해 미래를 삼가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대한민국 징비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그 이전의 나라였던 조선 왕국이 멸망으로 이르게 된 시발점과 원인을 세계정세와 일본과 대비하며 치열하게 파악하고 분석하여 우리에게 망할 길을 답습하지 말고 살길을 택하라고 호소한다. 그는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주장하는 친일파니 을사5적이나 경술 8적이니 하는 마녀 사냥하는 식의 선동으로 조선 멸망을 몇 사람에게 떠넘기는 그래서 사대주의, 소중화를 주장하여 기득권을 지키며 멸망하는 순간까지 사리사욕으로 백성을 수탈했던 모든 왕들, 성리학자, 조선의 관료들, 조선의 양반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선비들이 각처에 사원을 세우고 성리학, 주자학을 정치이념의 철학으로 받아들여 숭명배청하며 소중화를 자처하기 시작하였을 때 조선이 이미 멸망에 길로 들어섰다고 본다.
아래 글은 ⌜대한민국 징비록⌟ 74쪽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성리학에 갇힌 지식사회
사원(사립 서원, 최초 사립 서원은 백운동서원) 설립은 조선을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억압하는 지식 독재와 학문 탄압의 나라로 만든 신호탄이었다.
송나라 주희가 꺼낸 성리학에는 군사학도 없었고 재정학도 없었고 세무학도 없었고 외교와 경제에 대한 각론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울 때(1543년) 이미 대륙(명나라)에서는 주자학을 폐기하고 실용적인 양명학이 지식사회와 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 폐기된 철학을 조선 정치에 도입해 500년 동안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 지식인은 서원에서 공부한 성리학으로 과거를 치러 관리가 되었다. 관료는 성리학을 통해 자기 권력을 넓혀 정치인이 되었다. 정치인은 고도로 세련된 어법으로 고차원적이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논쟁을 벌이며 권력을 유지했다. 어법은 세련되었으나 어법 속에 품고 있는 논리에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향한 살기(殺氣)를 품고 있었다.
그 살기가 점잖은 어법을 뚫고 벌인 일이 붕당(당파)이었고, 사문난적 처단이었다. 그 살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나온 논리가 ‘사대事大’와 ‘중화’였다. 지식을 통해 권력을 잡고,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지식을 독점한 참 특이한 정치 체제가 성리학에 의해 잉태된 것이다. 당시 한 문명에서는 인간과 신이 자리를 바꿨다. (서구 세계,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면서 로마 카토릭의 세력이 붕괴된 것을 뜻한다.)한 문명세계에서는 무기에 이어 새로운 문명이 들어왔다.(1543년 9월 23일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시마에 도착하였을 때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상인들에게 철포 두 정을 샀고 그 후로 역설계를 통해 제품을 대중화시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1543년에 도키타카가 총포를 산 것이 일본을 강국으로 이끌었고 결국은 일본이 명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 침략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모든 조선적인 가치를 옭아내는 철학, 성리학이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 모든 것이 1543년, 그해에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징비록⌟ 74쪽
1543년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과 조선은 위치가 역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며 무시하였다. 소속된 당파가 달랐기 때문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 온 황윤길의 보고와 김성일의 보고가 달랐다. 그러나 선조는 황윤길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조사해보지도 않고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며 무시하였다. 그 결과가 1년 후에 임진전쟁이 발발하여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긴 것이다.
조일전쟁을 겪고 조청전쟁을 겪었어도 성리학에 목숨을 걸은 조선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효종 때 제주도 앞 바다에서 표류하여 붙잡힌 네덜란드 출신 하멜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1653년 6월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로우 호크가 타이완을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양력 8월 16일에 배는 악천후 속에 제주도 대야수 해변에서 난파했다. 서기 헨드릭 하멜을 비롯한 64명 중 살아남은 선원 36명은 제주목 관아를 거쳐 1654년 7월 서울로 압송됐다.
유럽 최강 해양국 네덜란드에서 최고급 인력 36명이 조선에 굴러 들어왔다. 몸만 온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첨단 항해술, 무기술과 고급 기술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들 중에 대포 전문가(10명), 천문가 (1명), 창틀 전문가(2명), 조총(철포) 전문가(1명)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배의 난파가 하멜 일행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조선에게는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러나 제주목 대정현감 권극중은 그들이 가진 문물과 기술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들이 준 포도주에 취했고 그들에 대하여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병자호란 치욕 이후, 북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집착해서 국고를 탕진하고 성리학의 예법에 근거한 예송논쟁으로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으며 헌종 즉위와 함께 온 나라가 흉년과 기근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였다. 효종은 입으로는 북벌론을 주장하며 청나라에 당한 설욕을 풀기 위하여 강병에 관심을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방법도 몰랐고 아젠다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불가능한 구호와 헛된 선동을 일삼을 뿐이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후 처음, 하멜 일행은 효종의 관심으로 신무기 제조를 위해 특별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은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신지식, 부국강병의 기술을 뽑아낼 인재가 없었다. 효종은 그들보다 먼저 난파해서 조선에 귀의하고 훈련도감에서 총포 제작에 참여하였던 박연(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을 통해서 조선 문물을 가르치며 귀화를 권하였지만 그들은 효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당사자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곤장을 맞고 전라도 지방으로 각각 유배를 당하였다. 그들은 강진, 여수, 좌수영 등지를 떠돌며 온갖 수모를 당하다 난파한 지 13년 20일째 되는 날에 나가사키로 탈출하였다.
하멜 일행이 유배지에서 한 일은 ‘제초작업과 청소’, ‘땔감 마련’, ‘양반집 구경거리 되기’, ‘구걸하기’, ‘새끼 꼬기’ 가 다였다. 소중화 의식으로 몽상에 “빠진 조선은 저절로 들어온 당시 세계의 최첨단 기술과 지식에 무관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죄인으로 노예로 부렸다. 결국 하멜 일행 중 그 때까지 생존해 있던 16명 중 8명이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해서 일본 규슈 북서쪽 작은 섬 히라도에 도착하였다.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자며 선택한 탈출이었다.
1666년 9월 4일 그들은 히라도에 도착해서 10월 25일 나가사키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나가사키 관리들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일본 관리들은 난파선 규모 및 향해 목적, 조선의 군부대 배치 현황, 경제, 풍습, 종교, 탈출 경위를 포함한 5개 분야 54개항을 심문하여 순식간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기술과 지식은 물론이고 조선 관련 지식과 경험까지도 정보로 입수하였다.
심문이 끝난 후 에도 막부에서는 이들을 1년 동안 데지마(나가사키 앞에 있는 인공섬으로 네덜란드 무역사무소가 있었다)에 억류 시켰다. 그 1년 동안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하여 자신들과 조공국인 아란타(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을 억류하고 일본에 알리지 않은 것으로 외교분쟁을 일으켰으며 조선에 남아 있는 8명의 표류자들 중에 돌아가기 원하는 7명을 위하여 조선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하멜은 그 때를 이용하여 표류기 작성을 시작하였으며 1년 후인 1667년 10월 23일 일본의 허락으로 네덜란드 총독부가 있는 바타비아로 떠난다.
권력자들과 지식인들, 양반들이 주자학이란 잣대를 들고 다른 학문과 종교를 이단 사설로 몰아 버리고 닫힌 사회에서 자기들만의 영광과 특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이미 조선은 조금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 이미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을 이어 민주공화국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이 조선의 사례를 징비 삼아서 모노사회가 아닌 다양한 사회, 닫힌 사회가 아닌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공생공존으로 가는 미래의 문을 활짝 열길 바란다.
2023.1.19.새벽
우담초라하니
부기 : 서원의 융성과 부패 그리고 최익현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시작한 서원은 100년이 안 되어 신흥 정치세력인 사람들의 정치 본거지가 되었다. 국가로부터 공식 지원을 받은 사액서원은 물론이고 일반 서원도 지역민으로부터 기부를 받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지식을 무기로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이 그 내부에서 분열하며 붕당을 이루어 서로 투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서원은 당쟁의 본부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쟁에서 패한 사림파 선비들은 서원으로 돌아와 회합을 하며 정권 참여의 기회를 노렸다.
정치 소굴로 변한 서원은 교육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덕을 숭상하는 의리가 개인들의 사당(私黨)의 의리로 바뀌고 바른 학문은 정체되었다. 선비들은 공립학교인 향교를 업신여기며 문을 숭상하는 뜻을 그르치고 백성을 마음대로 부리고 조석으로 자기들끼리 원수가 되어 싸우며 사치가 심했다. 학교는 향리의 양반 자제들이 술과 고기를 다투어 빼앗는 장소로 변했다. 또 군적에서 이름을 빼는 곳으로 악용되니 사회 교화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에 해가 됨이 심하였다.
한마디로 서원은 부패의 온상이 되어 세금 면제, 군역과 부역의 면제는 물론이고 지방정권처럼 행세하며 착취와 토색질로 서민들을 괴롭혔다.
고종 때까지 공식적으로 파악된 그런 서원의 수는 909개로 한 읍당 3개꼴이었다.
서원의 폐습을 익히 알고 있던 대원군이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철폐한 것은 조선을 근본적으로 살리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이었다. 그러나 서원 혁파에 적개심을 품고 저항하던 선비 최익현과 그 붕당의 사람들은 민비와 민씨들과 모의하여 대원군을 탄핵함으로서 조선 개혁의 물코를 닫아 조선을 죽음으로 몰아 갔다.
최익현은 역사 교과서에서 대마도에 잡혀가 일본의 밥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으로 저항하다 순국했다고 하는 잘못된 레전드로 대쪽 같은 항일 의지로 대변되고 있는데 그는 단지 주자학의 사대주의와 소중화 의식에 입각한 조선 양반의 세상을 유지하고자 하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가 백성을 위하여 절대 권력으로 개혁의 칼을 휘두른 대원군에게 도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조선 역사를 유교의 통치 철학인 충효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서 민(民)의 관점으로 새롭게 정리하게 될 때 우리는 조선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일치와 화합의 새역사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 와이즈맵,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