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초목이 싱그럽고 청량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나? 푸른 잎[綠陰]과 향기로운 풀[芳草]이 우거진 여름이 꽃 피는 시절[花時-봄)보다[勝] 아름다운 때라는 말이다. 봄꽃은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지만, 녹음과 방초는 날이 갈수록 짙어져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는 뜻일 게다.
햇살 또한 따갑다. 땡볕 아래를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늘을 찾게 된다. 풍성하게 핀 꽃이 보랏빛 터널을 이루어 눈과 코를 호강시켰던 등(藤)나무, 이젠 우듬지를 크고 넓게 펼치어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중이다. 등나무 그늘은 워낙 촘촘하여 단 한 줄기의 햇살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크고 작은 공원마다 심어져 관상용이나 차양역할을 주로 하지만, 본디 등나무는 아까시나무처럼 척박한 민둥산이나 황폐한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던 수종이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는 여느 콩과식물들이 그러하듯 씨를 품은 콩깍지 모양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등나무공예’ '등나무가구‘라는 표현이 있다. 자칫하면 등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가구나 공예품으로 혼동할 수 있다. 그 재료가 우리나라의 등나무와는 종 자체가 다른 나무에서 나온다. 말레이시아가 원산인 덩굴식물 라탄(Rattan)이라는 나무다. 그래서 등공예라는 말 대신 요즘 유행하는 ‘라탄공예’라고 하는 편이 낫다.
등나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다른 나무를 줄기를 감아 올라가면서 성장하는 습성이다. 주변에 다른 나무가 없으면 아예 제 몸을 감고 오른다. 칡[갈葛]도 그러하다. 같은 콩과식물로서 습성마저 비슷하다. 다만 등나무가 시계방향으로 줄기를 감는 반면, 칡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줄기를 감아올린다.
그런데 이 비슷한 두 식물이 서로 옆에서 자라면 어떻게 될까? 서로 얽히고설켜 쉽게 풀어낼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을까?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진(後秦)의 고승 축불념(竺佛念)이 여러 경전의 게송과 비유를 가려 뽑아 정리한 《출요경(出曜經)》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애욕이 얽혀지면 떨어져나갈 수 없게 된다. 중생 중에 애착의 그물에 떨어진 자는 반드시 정도(正道)가 무너져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 마치 갈등(葛藤)이 나무를 감아 종말에 이르러 두루 미치면 나무는 고사하게 되고 마니 애욕 또한 이와 같다.”
이 말씀에서 처음으로 갈등(葛藤)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갈등의 최초 의미는, 상대에 대한 지나친 애욕이 집착으로 되어 종국엔 상대를 압박, 파멸로 이끄는 것에 대한 비유였다. 서로 뒤엉켜 있는 칡[葛]과 등(藤)나무를 보고, 신념과 관점이 달라서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를 갈등(葛藤)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였다.
갈등의 최초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몰라도 사는 데 하등 지장없다. 문제는 지금 세상은 온통 각종 갈등으로 소란스럽기만 하다는데 있다. 지역 갈등, 소득계층 간 갈등, 이념 갈등, 종교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요새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없다.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울 뿐 상대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고들 한다.
허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갈등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Hegel)의 말이 꼭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다. 정이 무엇인가? 기존에 유지되어 오던 상태이다. 그런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던가? 정을 부정하며 새로운 상태를 제시하는‘반(反)'이 대두하게 마련이다. 반은 홀로 정의 모순을 대체할 수 있을까? 기세는 꺾였지만 정도 아직 살아 있다. 결국 반은 정과의 합의를 통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데 이것이 합(合)이다.
그 합은 또 완벽할까? 인간사에서 합 또한 모순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합으로서 정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모순이 보인다. 다시 반이 등장하고, 반과 합의하여 또 다른 합을 생산한다. 이렇게 정-반-합을 반복하는 과정을 우리가 갈등이라 표현하는 바, 정과 반이 합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갈등이 곧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이라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데에 갈등이란 필요한 조건이 되는 셈이다.
다만 갈등이 오래 그리고 깊어지면 수레바퀴가 바로 굴러갈 수 없다.정과 반이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단다. 서로의 신념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다름을 적대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저서 《바람, 모래 그리고 별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나 결혼 등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정작 생텍쥐페리가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아니다. 이 말은 제2차세계대전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깨달은, 모든 인류가 갈등과 투쟁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생텍쥐페리가 예로 든 똑같은 방향이란 무엇인가? 설마하니,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일체적으로 통일하자는 뜻이겠는가? 연기론적 삶을 살라는 뜻일 게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하나가 이기고 하나가 지는 승패라는 것이 없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공생원리.
생텍쥐페리는 이를 똑같은 방향이라 하였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늘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갈등을 투쟁이 아닌 조화와 균형의 지렛대로 이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글을 이어간다.
“우리의 목적이 인류와 인류의 염원을 이해하고 인류의 근본적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라면, 결코 한 인간의 진리와 다른 사람의 진리를 적대관계에 놓아서는 안 된다. 모든 신념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표 형님의 글을 읽다 보면 '참으로 해박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지난 20여 년 동안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다 코로나로 인해 부득이 타업을 하게 되었지만(물론 표 형님같은 수준 높은 글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생활에 관련된 글로 돈을 받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었지만)
이런 세련된 글을 읽으면서 '이 내용은 다음에 나도 원용하면 좋겠다'란 생각이 드니까요.
좋은 글,
잘 감상하며 읽었습니다~
시간과 건강이 있을때 많이쓰기
바란다. 그래서 문중에
후손들이 보게 많이 남겨라!!‘
요즘 카톡을 통해 너무도 많은 쓰래기가
돌아 다니는데 자네 글을 읽으니 참신하고 배우는 게 있어 좋다! Fighting!
그리고 자네 글은 종친 계시판에 올리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