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겔 15:1-8절
제목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일시 : 2019년 7월 31일
1.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나무로 본다면, 무화과도 있지만, 그래서 두 나무가 비등비등하게 부각되지만, 그래도 포도나무도 대표라는 점에서 달리 토를 달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당신의 평가서를 우리에게 제출한다.
13장에서 종교 지도자, 14장에서 평신도 지도자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이용해 처먹는 작태를 까발렸다. 그럼 이야기의 전개 상 어떤 것이 이어져야 할까? 나도 나름 저자인지라 저자의 자리에 서서 생각해 본다. 당연히 모두 썪었다, 모두 죽었다, 일 것이다.
일반 대중은 좀 나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엉터리 예언자들이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것들은 거짓 예언,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예언자를 환호한 그들도 결코 다르지 않다. 똑 같다(14:10). 누가 더하고, 덜하고, 그런 것 없다. 위에서 아래까지,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 없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너희들 모두, 너희 사회 전체는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최종 선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게 15장이다.
2.
오늘 본문은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평 이한 내용이다. 포도나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도 한 두 번이라도 직접 보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나무를 보았다면, 이 본문을 읽는데 지장은 없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목재로 쓸 만하지 않다. 그걸로 뭔가를 장식할 때 사용 가능해 보인다만, 땔감 외에 용도가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열매를 잘 맺는 건강한 나무도 별 쓸모가 없거늘, 난로와 화로에서 타던 나무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무용지물이다. 꺼내지도 않는다. 타던 나무를 꺼댄다는 걸 굳이 말하는 까닭은 그만큼 무익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이다. 원래 쓸 데 없는 나무를 타던 불 속에서 꺼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3.
에스겔의 타버린 포도나무 이야기는 아마도 이사야의 것에 대한 패러디일 것이다. 이사야 5장에는 유명한 포도나무 이야기가 나온다(1-7). 땅을 개간하고, 거름을 주고, 흙을 기름지게 만든 다음, 그곳에 극상품 열매를 맺는 최고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정성스레 가꾸었다. 그랬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최하품 열매가 맺혔다. 동네 사람들 다 안다. 그 농부가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는지. 제대로 농작물을 키우려고 틈틈이 공부까지 해 가면서 고생했는데, 가을에 추수한 것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다. 팔 수 없는 포도이다. 그 농부는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친 것이다.
에스겔의 것과 이사야의 비유는 소재와 결론이 같다. 그러나 주목하는 지점은 다르다. 이사야는 열매에, 에스겔은 나무에 초점을 둔다. 이사야는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또는 최상품이 아니라 먹지도, 팔지도 못하는 들포도 맺은 이스라엘을 규탄한다. 에스겔은 나무 자체가 쓸모 없다고 공략한다. 그러니까 이사야의 말대로 열매도 변변치 않아 농부로 하여금 헛수고, 개고생 시켰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 자체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그야말로 쓰레기만도 못한 거라. 기가 찬기라.
그러니까 에스겔은 대선배의 것을 자기화해서, 더 심화해서, 더 근원을 파고들어가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뿌리 자체가, 나무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뿌리가 문제니까, 나무 자체가 문제니까 극상품인 줄 알고 심었더니 최하품, 아니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더 돈이 들고 품이 드는 그 따위 열매를 맺은 거다. 한 마디로 나쁜 나무, 못된 나무이었다.
하나님은 모르고 심었을까? 길고 긴 16장의 비유를 보면, 알고도 그리했다.
4.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7장을 생각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리 없고,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고, 콩을 심으면 콩을, 팥을 심었으면 팥을 거둔다. 나쁜 나무는 나쁜 것을 심었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을 자꾸 주니까 좋은 열매를 맺은 거다.
이것을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성품 윤리학’(character ethics)라고 한다. 또는 덕 윤리(virtues ethics)라고도 한다. 이전에는 인간이 도덕적 선택을 하는 메커니즘, 또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해 많이 토론했다. 공리주의라면, ‘수’를 기준으로 삼았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도덕적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의무를 제시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을 만인의 행동 준칙이 될 수 있는가를 물으라고 했다. 그러면 답이 나온다는 거다.
그러나 저 윤리학은 도덕적 선택을 하는 행위자(agent)를 주목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칸트나 공리주의자처럼 사고하지 않는다. 드라마의 주연이나 악역을 주목해 보라. 그는 자신의 캐릭터(character)에 따라 일관된 행위를 한다. 물론 약간의 예외적 행동을 하고, 그래야 드라마가 박진감 넘친다. 허나, 너무 자주 바뀌면 시청자들이 욕을 바가지로 해댄다. 일관성 없는 캐릭터라고, 재미가 없다고,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등등. 한 사람은 자신의 캐릭터, 즉 성품을 따라 행동을 하게 마련.
나는 개인적으로 character를 윤리학적인 의미를 살리는 가장 좋은 번역어는 ‘됨됨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양 갈래 길의 기로에 서서 내리는 그의 도덕적 선택은 결국 그의 됨됨이를 반영하고, 그의 됨됨이에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착한 주인공은 착한 주인공답게, 악역은 악역답게 선택한다. 그리하여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같은 윤리학자는 교회를 성품 공동체라고 말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대표되는 인격을 갖추도록 훈련하고 연습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5.
새번역의 7절, 개역개정의 8절에 이 단락의 핵심 주장이 숨어 있다. 개역개정은 ‘범법함’이라고 했는데, 새번역을 따라서 ‘배신’이라고 해야 적절한, 바로 그것이다. 배신이라 함은, 상호간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고,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말이다. 저쪽이 약속을 깨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약속을 어기면, 그걸 배신이라고 하는 거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내게 베푼 호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시리 악으로 되갚는 것을 배신이라 한다.
문자적으로는 신실하지 못함(unfaithful)이다. 상황과 상관없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상황이 어렵다고, 어기면 안 될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결혼 관계이다. 그래서 16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인관계로 설정하고, 호의와 신뢰를 깨버린 이스라엘의 음란함을 신랄하고도 통렬하게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됨됨이의 표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됨됨이는 숙명이고 결정론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훈련과 연습이 왜 필요하겠는가. 회심과 회개는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링 위에서 상대하기 만만한 어떤 것이 아닌, 도무지 급이 맞지 않는 하나님께서 친히 스파링 상대가 되어 주셨다. 처음에는 슬슬하시더니, 꼼수를 쓰는 우리를 가르치려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전을 치른다. 그렇게 옴팡 깨져야 정신 차릴까 싶어서다.
나름 괜찮은 나무라고 뻐겼는데, 그 땅에 심긴 모든 나무를 다 뽑아서 불태워버리니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가진 것 다 털리고 나서야 내가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가진 것이 언제까지 내 수중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를 눈물 줄줄 흘리며 타령조로 처량하게 부르면 가망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새찬송가 28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