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닷컴> 칼럼
신무문관: 암환주인(巖喚主人)
[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62.
성찰배경: 최근 덕산선감(780-865)-설봉의존(822-908)의 법을 이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를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한편 선종(禪宗)이 오종칠가(五宗七家)로 분화하며 전승되는 과정을 보면
덕산 선사 문하에서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이 창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덕산 문하 가운데 운문 선사와 동시대를 호흡하며 선종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던,
설봉의 사형인 암두전활(827-887)의 법을 이었으며 <무문관>에 등장하는 서암사언(瑞巖師彦, 850-910) 선사와
설봉의 법을 이었으며 <벽암록>에 등장하는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와
경청도부(鏡淸道怤, 864-937) 선사의 공안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합니다.
특히 매년 불제자들이 보리수 아래에서 누구나 참 주인공을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음을 몸소 보이셨던
석가세존의 탄생을 기리는 부처님오신날에 즈음해, 비록 우연이기는 하지만
순서에 따른 서암 선사의 ‘주인공’ 공안 제창은 매우. 시기적절하다고 사료됩니다.
◇ 신무문관: 암환주인巖喚主人
필자가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니 종달 선사 문하에서 점검받았던 공안들이 모두 다
서암 선사께서 제창한 ‘주인공(主人公)’과 맞닿아 있음을 온몸으로 인득(認得)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칙(本則): 서암 화상께서는 매일 스스로 “주인공(主人公)아!” 하고 부르고, 즉시 “예!” 하고 응낙했다.
[瑞巖彦和尙 每日自喚主人公 復自應諾.]
또 이내 “(지금처럼 늘) 깨어 있거라![惺惺著]”라고 이르고는, 스스로 “예!” 하고 대답했다.
[乃云 惺惺著 喏.]
이어 곧 “언제 어디에서든 늘 남에게 속지 말아라!”라고 이르고는, 역시 스스로 “예! 예!” 하며 자답(自答)했다.
[他日異時 莫受人瞞. 喏喏.]
평창(評唱): 무문 선사께서 제창(提唱)하셨다.[無門曰]
서암 늙은이가 마치 장사하는 이가 스스로 팔고 사는 것처럼,
매일같이 일인다역(一人多役)의 가면놀이를 했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瑞巖老子 自買自賣 弄出許多神頭鬼面 何故 聻.]
같은 이가 한 번은 부르고 한 번은 대답하고, 또 한 번은 깨어 있으라고 하고 한 번은 남에게 속지 말라고 했다.
[一箇喚底 一箇應底 一箇惺惺底 一箇不受人瞞底.]
그러나 이런 짓들을 인정(認定)하면 종전(從前)처럼 역시 그릇된 일이다.
[認着依前還不是.]
그러니 만약 서암 화상을 따라 단지 흉내만 낸다면 이는 완전히 들여우의 견해를 쫓는 것이다.
[若也傚他 總是野狐見解.]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도를 닦는 수행자[學道人]들이 참나[眞我]를 모르는 것은
다만 종전처럼 분별심을 일으키는 놈을 진짜로 알고 있기 때문이네.
(아! 애석하구나!) 한량없는 세월 내내 생사윤회의 근본인 이놈을
어리석은 이들은 ‘주인공[本來人]’이라 부르고 있구나.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군더더기: 돌이켜 보면 필자는 2대독자로 태어나 형편없는 마마보이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철들기 시작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1974년] 무렵,
어렴풋이 ‘주인공’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약 1년 간 방황기를 거쳐 1975년 9월 서강대 불교동아리인 혜명회(慧命會)에 가입했습니다.
곧 이어 동아리 선배님의 권유로 1975년 10월 평생의 스승이셨던 종달(宗達) 이희익 선사 문하에 입문해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동아리를 통해 학부 시절 1976년 12월 선운사 수련회, 1977년 6월 마곡사 수련회,
1977년 12월 금산사 수련회에 참가하며 두루 수행에 요긴한 가르침들을 익혔습니다.
이어 학문에 매진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도 수련회의 중요성은 잊지 않고 있었기에,
1978년 6월 송광사 여름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구산수련(九山秀蓮, 1910-1983) 방장 스님으로부터 ‘주인공’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마는
이 몸은 언젠가는 한줌재가 아니리
묻노니 주인공아 어느 것이 참나이련고?”
참고로 이 게송을 듣자마자 뼛속 깊이 새기고 지금도 틈날 때마다 깊이 음미해 오고 있는데,
이 게송은 이 공안의 핵심인 ‘주인공’을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돕는 요긴한 노래 형식의 화두라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필자는 비단 선 모임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년퇴직 때까지 수십 년간 매 학기 필자가 맡은 강좌마다
대학생들에게 한 번은 꼭 이 노래를 들려주며 ‘각자 자기의 진짜 주인공을 찾아라!’고 권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된 이유는 저의 선적(禪的) 체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만일 수강생들 가운데 극소수라도
어느 날 문득 이 게송을 떠올리며 틈날 때마다 되새길 경우, 종교를 넘어 따로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 삼종병인(三種病人)의 교화
<벽암록> 제88칙의 본칙(本則)에는 삼종병인(三種病人)의 교화에 관한 현사 선사의 제창과 후에 사제(師弟)인
운문 선사가 의학도(義學徒, 머리로만 헤아려 깨치려는. 수행자)와 주고받은 선문답이 다음과 같이 담겨있습니다.
본칙(本則): 현사 선사께서 대중들에게 ‘제방 총림의 노사(老師)들께서 온몸을 던져 제자[衆生]들을 지도[提接]하며
이들을 이롭게 하는 법문을 통해 교화(敎化)한다고 하지만, 만약 눈먼이[患盲者]나 귀머거리[患聾者]나
벙어리[患啞者]가 찾아와 갑자기 가르침을 청했을 때 어떻게 지도해 교화할 것인가?
눈먼 이에게 몽둥이[槌]나 먼지떨이[拂子]를 들어 올려. 보여도 그는 결코 볼 수 없고,
귀머거리는 ‘청산유수처럼 설법[語言三昧]’을 해도 들을 수 없으며,
벙어리[患啞者]는 말을 하도록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생략)
군더더기: 보다 넓은 안목으로 보면 우리 같은 중생들 대부분은 비록 육신은 멀쩡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깊이 중독되어, 볼 때는 ‘온몸이 눈[通身是眼]’이고 들을 때는 ‘온몸이 귀[通身是耳]’이고
말할 때는 ‘온몸이 입[通身是口]’인 그 작용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통렬하게 일깨우고자,
현사 선사께서 제창하시고 사제인 운문 선사께서 이를. 멋지게 활용하셨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종달 선사께서는 저서 <벽암록>(상아, 1988년)에서 불교의 존재 의의는
마음의 병이 깊은 이런 이들까지도 교화하는데 있다고. 제창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선사께서는 마음의 삼종병(三種病)에 걸린 종교인들을 향해 “보통 사람들의 돈을 우려내는 일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요즈음 떠들썩한 공신력 있는 금융기관과 결탁한 사기꾼들을 포함해) 온갖 종류의 직업인들도 가능한 일이다!”라고 일갈(一喝)하시며,
정신 차려 종교인으로 바르게 거듭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침은 부정과 부패와 사기 등이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 아직도 유효하다고 사료되며,
남 탓만 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깊이 돌아보게 하네요.
◇ 줄탁동기(啐啄同機)
<벽암록> 제16칙의 본칙(本則)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설봉 선사의 법을 이은 경청 선사와
얼빠진 승려와의 선문답이 다음과 같이 담겨있습니다.
본칙(本則): 어느날 한 승려가 경청 선사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톡톡 쪼고 있는 것처럼
저는 이제 대오(大悟)할 준비가 됐습니다. 그러니 부디 선사께서 껍질을 탁하고 쳐주십시요.[學人啐. 請師啄.]’하고 간청했다.
그러자 경청 선사께서 ‘아직 수행이 미흡한 자네가 과연 그런다고 살아날 수 있겠는가?’라고 응대하셨다.
이에 이 승려가 다시 ‘만약 제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살활자재(殺活自在)한 수완이 없는 선사께서는
뭇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경청 선사께서 ‘이 얼빠진 놈[草裏漢]아!’라고 일갈(一喝)하셨다.
군더더기: 교수신문에서는 매년 말 그해의 시대 상황이 반영된, 한국 사회의 새해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를 발표하곤 합니다.
그런데 2006년 말 교수 208명에게 사자성어를 추천받은 결과 올해의 사자성어는 <맹자(孟子)> 공손추 편에 나오는
‘남 탓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기에서 찾을 따름’이라는 뜻의 ‘반구저기(反求諸己, 43.8%)’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교수들이 많이 꼽은 사자성어는 줄탁동기(啐啄同機, 23.6%)였습니다.
그런데 경청 선사의 이 공안에는 절묘하게도 수행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스승과
남[스승] 탓을 하며 빨리 깨치게 해 달라고 조르는 제자를 통해 이 두 가지 관점을 함께 드러내고 있네요.
한편 학문의 세계를 통해서도 줄탁동기의 가르침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학위 과정의 제자가 지도교수에게 아무리 빨리 졸업을 하고 싶다고 안달해도 스스로 새로운 연구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면,
이를 꿰뚫어 보고 있는 지도교수는 부실한 제자를 배출할 수 없기에 다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뿐 속수무책입니다.
(생략)
참고로 경청 선사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임제의현(臨濟義玄,?-867)-흥화존장(興化存獎, 830-888) 선사의 법을 이은,
임제종(臨濟宗)의 남원혜옹(南院慧顒, 860-952) 선사 두 분 모두 ‘줄탁동기[또는 啐啄同時]’에 대한 선문답을 남겼다는 것은
선사들이 스승들의 종풍(宗風)에 매몰되지 않고 두루 폭넓게 교류하며 더욱 안목(眼目)을 넓히며 다졌다고 사료됩니다.
기사 원문자료:
<불교닷컴> 칼럼 62. 신무문관: 암환주인(巖喚主人)
https://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5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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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선도회(선도성찰나눔실천회) 누리집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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