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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우리의 구원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이 됐다. 설정된 이 안에는 천지창조와 세상 끝이 있는데, 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고 아담 하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성경이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서는 타락된 지식, 타락된 지혜, 타락된 의, 타락된 도덕성, 타락된 능력과 타락된 행복이 나오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 믿어졌던 그 영이 중생이 됐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이 계속 유전으로 내려오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의 십자가의 보혈로 통해서 영이 중생이 됐다. 중생이 된 이 영은 안 죽고, 세상 끝 날에 세상이 불에 타더라도, 또는 내 육신이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그 천국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영 중생은 나로 하여금 천국, 아버지 나라에게 살게 한다는 이게 성경이다.
그러면 영을 중생시킨 후에 그 좋은 하늘나라로 왜 빨리 안 데리고 가느냐 하면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영능의 믿음실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령세계에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능의 능력을 입은 실력대로 산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많이 입었으면 많이 입은 대로, 적게 입었으면 적게 입은 대로 천국에서 영광중에 산다.
인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누리고 계시던 그 세계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표현으로는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던 그 나라가 곧 장차 우리가 가서 살 곳인데, 이 신령세계에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닦은 신앙실력대로 차등적으로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무리 적게 입었어도,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그 나라를 누리는 누림성은 불탈 세상의 모든 행복이나 영광과는 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인격의 온전,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 하나님의 지혜지식의 온전, 하나님의 도덕성의 온전, 하나님의 옳음으로 내가 온전히 성장이 된 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질과 단일성이라. 이질이 아니라 단일성이다. 이 세상에 인간의 의가 있지만 이 의는 하나님의 본질의 의와는 같은 게 아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옳다. 선하다’ 해도 하나님의 의나 선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다.
인간들이 아무리 선과 의라고 해도 이건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것이다.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에서 나오는 의이고 선이고 사랑이고 행복이다. 이거는 이 세상에만 국한되는 거다. 세상이 불에 타면 이 모든 것은 끝이 나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늘나라의 의가 들어있다.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신령세계의 의, 선, 사랑, 진실, 거룩, 하나님의 옳은 게 내 속에서 실력적으로 성장되고 자라야 하는데, 문제는 영이 중생이 됐고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여전이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지식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질이 다르기 때문에 신령세계에는 해당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의 개념으로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 해도 이것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것뿐이다.
신령세계에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것만 들어간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들고 선이나 의나 거룩이나 진실이나 사랑을 말을 해도 세상의 개념과 지식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되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일을 크게 많이 이뤄놔야 믿음이 좋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것은 그 어떤 것을 아무리 크게 이뤄놔도 결국은 불에 탄다. 이거는 시간 안에 들어있는 거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데, 아직까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신령한 세계를 누리고 다스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이것은 전혀 모른 채 이 세상의 행복과 부요와 행복과 명예 영광을 찾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신령한 세계에서의 누림의 실력을 만들어가는 것임을 모른 채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으니,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아드려야 하겠다고 해서 몸과 시간으로 돈으로 나타나는 뭘 만들어 놓겠다고 한다. 이런 신앙을 세상적인 기독교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은 세상 쪽으로 속화가 된 것이다.
성경에 바리새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건설해 나갔다. 성경을 가지고 사람이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되겠는데 그렇게 만들어지지는 않고, 속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고 행동과 활동으로 종교적인 건설을 해 나갔다. 예수님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속은 썩어있으면서 겉모양으로 자꾸 거룩한 척, 믿음이 좋은 척 하는구나.
외식자가 되면 앙화가 된다. 재앙이 온다. 여기서 화가 온다는 말은 안 믿는 사람에게 화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게 화가 온다는 것이다. 사실 안 믿는 사람은 우리가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런데도 거론을 할 경우에는 왜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의 것을 자꾸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믿는 자기가 안 믿는 사람들의 정신과 똑같다는 것을 비교를 시켜서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다.
무조건 힘을 쓰면서 이 세상에 종교적인 업적을 남겨놓겠다고 하면 예수님은 ‘난 너를 모른다’ 하신다. 아무리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이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둔 신앙이라면 예수님은 ‘난 너를 모른다’ 하신다. 이 말은 지옥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은 중생이 됐으니까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천국은 들어가겠지만 사람이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자꾸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날려보겠다고 하면 얻어맞게 된다는 것이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선하다. 악하다’ 하는 그 개념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이다. 이 지식은 사람의 속은 못 본다. 예수님을 닮은 그 속은 못 본다. 영은 죽어있고 영의 눈은 멀어있기 때문에 못 보는 거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국법을 어기거나,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악하다고 한다.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면 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보는 눈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악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 천국의 사람으로 안 만들어졌으면 악하다고 한다. 이 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공자나 석가를 일반사람들이 선하다고 보느냐, 악하다고 보느냐? 신성시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들을 악하다고 보신다. 왜냐? 우리가 볼 때 이들은 교리적으로는 영 중생이 안 되어있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되어있지를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악하다고 하신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꿔지지 않으면 이건 악한 거다. 하나님의 본질로 바꿔진 사람은 이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자기의 모든 이해타산 평가성, 자기의 행복 명예 영광성 부요성, 자기의 능력성이 어디에 들어가 있는 거냐? 천국이다. 누가 이렇게 살았느냐? 예수님이.
예수님께서는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 천국에서 오셨다. 그러면 왜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느냐? 우리에게 신령세계를 주려고 오셨고, 그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모본의 삶을 사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으신 그 살으심이 눈동자 하나하나 굴림이, 밥 먹고 활동하심 하나하나가, 당신의 마음 씀씀이 전부가 나의 천국의 누림을 염두에 두고 그 면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라들은 남을 두들겨 패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면 악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원 전서부터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고 그 천국을 누리게 해 주시려고 하는 주님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안 믿는 사람이건 믿는 사람이건 그 목적에 맞춰서 사람을 보는 거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도, 사람의 정신도, 사람의 속도, 사람의 목적도 그 중심 사상의 향방이 어디로 되어있는가를 보는 거다.
말세에 거짓된 종들이 많다고 했는데 거짓 종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의 소원 목적성이 천국에 있는 게 아니라 전부는 세상에 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게 악하다는 것이다. 노아홍수 때 물속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증명을 하는 거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지식을 가지고, 천국의 지혜를 가지고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모든 사건 환경 물질을 나와 다른 사람이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면으로 이용을 한다. 이용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든 것이다. 천국의 사람으로 될 사람을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 삶이다. 왜 나그네냐? 천국이 우리의 본향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진리이치대로 사용하고 응용하고 활용해서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 환경 속에는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보고 겁을 내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보고 겁을 내는 게 아니라 힘이 부족하거든,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사건 환경을 주시는 것은 ‘너는 네 실력을 모르니 내가 사건을 줄 테니 너는 그것을 통과하면서 네 믿음실력이, 네 신앙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너의 신앙실력을 올려라’ 하고 사건 환경을 주는 거다. 그런데 목적을 이 세상에서의 누림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꾸 사건을 피하려고 한다.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는 거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좌우지 한다. 마귀도 하나님께서 불러서 쓰신다. 마귀가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사건 환경 가운데서 소원 목적성이 세상으로 가서 붙어있으면 악이고, 천국으로 가서 붙어있으면 선이고 옳은 거다. 소원 목적이 세상에 붙어있으면 속이 안 바뀐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속으로 속이 바꿔져야 한다. 술 먹는 사람을 따라다니면 술 먹는 속으로 바꿔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데 왜 예수님의 속으로 안 바뀌느냐? 이게 문제다.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세상이 끝나면서 ‘믿는 자냐. 안 믿는 자냐’ 하는 면에서의 심판은 존재적 심판이다.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신령계에 들어가면 각자의 신앙실력이 나타나는데 이걸 자체적 심판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보면 자기만 실력이 있다면 말릴 사람이 별로 없다. 올림픽이 열리면 자기가 실력이 있다면 몇 관왕이라도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몇 관왕이라도 되라고 그런 경기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신앙실력을 깨닫게 해주는 거다. 기독교인들이 워낙 성경을 통해서 깨닫지를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별별스런 경기를 다 끄집어내서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못 깨닫는 사람은 세상 경기 판에 들어가서 뛰놀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인격자로, 도덕성을 가진 자로, 자유를 가진 자로 지었는데 자기가 자유자제로 행한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라오도록 돼있다. 짐승은 인격성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어도 ‘너 왜 사람을 잡아먹었느냐’ 하는 심판이 없다. 그러나 인격성과 도덕성이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심판이 있는 거다. 네 마음대로 살았느냐? 거기에 대해 심판이 따르게 돼 있는 너다.
이 세상에서 보면 자기가 어떻게 살았던 그 환경에서 그만큼 그만큼 살고 있다. 행한 대로 따르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행한 대로, 뿌린 대로 자기가 거두는 존재로 되어있다. 농부가 자기 논밭에 씨를 뿌리면 그걸 누가 거두느냐? 자기가 거둬간다. 자기 것이니까 자기가 거둬간다. 그런데 남이 거둬간다면 법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가 버린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둬가는 거다. 그걸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뿌려야 한다. 뿌리되 제일 좋은 것으로 뿌려라.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을 거두게 돼 있다. 이게 기독자의 생활이다.
꽃밭에 풀씨를 뿌리면 풀이 나느냐, 꽃나무가 나느냐? 풀이 난다. 자기가 지금 사는 것은 자기가 알던 모르던 은연중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는 거다. 그 뿌린 것이 자기에게로 오게 돼 있다. 다른 사람 안 따라간다. 술을 잔뜩 먹고 ‘노세 노세’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렇게 한 행동 활동이 자기에게로 따라오느냐? 담배 맛이 좋단다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구워댔는데 그 행함이 자기에게로 따라오느냐? 그런 거다. 그런 존재 인간 자기라.
심은 대로 나는 이치는 자기가 무엇으로 뿌렸든지 자기가 거두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남을 원망하는 자는 선한 자냐, 악한 자냐? 악한 자가 되는 거다. 자기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선과 의를 받고 심었다면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것이 자라나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을 보면 거의가 신령한 세계의 의, 주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심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심어진 것이 많다.
세상 사람들이나 속화된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진 것을 알아주니까 그것이 그만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알고 스스로 속는 교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고 주장을 하면서 자기의 그 생각에 성경구절을 갖다 붙이는 거다. 성경구절을 천국에 붙이면 옳은 건데 세상에다 붙이니 악한 거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너나 나나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끼리 대화를 해보면 왜 안 통하는 거냐? 안 통하는 그게 뭐냐? 서로가 고집이 세기 때문이냐? 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어느 한 쪽이 하늘의 지식으로 전환이 안 돼서이다. 그러니 통할 리가 없는 거다.
우리는 신령세계까지 영원히 하나님이 알아주는 천국의 의를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이라도 세상 안쪽의 임시성적인 것이다. 믿는 사람은 하늘의 의를 가지고 임시성적인 세상의 의는 이룰구원에 이용을 하는 것이다. 풀어먹는 거다. 다른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신령한 하늘의 뜻을 가지고 이 세상에 속해있는 의를 써먹는 거다. 인간의 의, 행동적 의, 교훈적 의 이런 게 없으면 신령한 세계를 어떻게 알겠느냐? 모르는 거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질세계를 허락해줘서 하늘나라를 깨닫게 해주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 밭에 하나님의 것을 심지 않고 세상 것을 심었다면 자기 속에서 세상 것이 자꾸 자라난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독교인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으면 부자로 산다. 만사형통이 된다’ 하게 된다. 이들이 말하는 만사형통이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먹고 마시고 누리고 부자 되고 하는 면이 막힘이 없이 잘 된다는 것이다. 장사를 해도 잘 되고, 공부를 해도 일등을 하고. 만사형통을 죄다 이런 데다 붙인다. 그러나 이 세상은 늘 바람이 부는 곳이고 사건 환경이 늘 있는 곳이라서 이런 만사형통성은 영원히 가지 못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 환경을 줘도 천국의 사람으로 척척 깨닫고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만사형통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건 환경을 줘도 척척 받아먹고, 믿음의 살이 오르고, 믿음이 성장되는 거다. 이게 만사형통이다.
만사형통을 이 세상에 붙이면 이건 하나님께 매 맞을 일이다. 그런 말에 속지 말아라. 사기꾼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거다. 공부를 안 해도 시험을 치면 100점이 되는 게 만사형통이냐? 이치 같지도 않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 어떤 사건 환경을 주더라도 그걸 척척 이겨나가며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는 것은 없이 예수이름을 불러서 자꾸 세상에 쌓으라고 한다면 그 말대로 이뤄진다고 해도 그 세상 것이 불에 안 타느냐? 물질이 있을 때 나와 다른 사람이 이룰구원을 부지런히 이룰 수 있는 면에 이용을 하라.
성경에 보니 악한 종이 주인의 물질을 탕진해 버렸다. 주인의 눈치를 보니 자기를 자를 것 같으니까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다 탕감을 시켜준다. 종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는 사람들은 이 악한 종이 주인에게 잘려도 대우를 잘 해 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그걸 알고도 이 악한 종을 칭찬을 했다. 이건 자기의 미래의 준비를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영원한 미래에는 관심이 없는 채 세상의 현실만을 위해 쌓아놓는다.
자기 마음 밭에 하나님의 것을 심지 않고 세상 것을 심었다면 자기 마음 밭에는 뭐가 자라나겠느냐? 세상 것이 자라난다. 이게 이치다. 학생이 음악선생을 따라다니면 그 학생의 마음 밭에는 뭐가 심겨지느냐? 음악이 심겨진다. 이게 이치다.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이치를 무시하지 말아라.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치를 무시한다.
세상에는 빈 밭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니 밭에 곡심을 심어서 곡식이 나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심지 않고 그냥 놔두더라도 풀이 무성하게 나게 된다 그 말이다. 그래서 빈 밭은 없다. 이 이치를 가지고 보면 자기는 모를지라도 자기의 마음 밭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엇이 자라고 있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영원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이고, 아무 것도 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세상성적인 잡초가 자기의 마음 밭에 자라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세상에는 빈 밭이 없는 것이다.
밭이 전부 잡초로 되어있으면 그걸 낫으로 베어서 곡간에 집어넣느냐, 아니면 바싹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밭 전체를 한꺼번에 불에 태워버리느냐? 한꺼번에 불에 태워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 잡초 속에 있던 메뚜기 새끼고, 지렁이고, 풀을 뜯어먹던 벌레들이 다 타버린다. 잡초가 자라는 마음 밭에는 틀림없이 사람을 해코자 하는 벌레들이 숨어서 자라고 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한꺼번에 다 태움을 입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은 사람의 자기 마음 밭에 무엇이 자라나고 있는지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영원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오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의 상벌이 명확치를 못하다. 이 세상에는 절대 정확한 것은 없다. 절대 정확한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의인이 악인으로 몰려서 핍박을 받기도 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더라. 이 세상에서 절대 정확한 것을 아예 바라지도 말아라.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우리를 두었다. 그러니까 세상을 원망을 말라 그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리 원통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게 다 하나님의 허락에서 된 것으로 알고 세상법정에 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 하나님이 원수를 안 갚아주신다면 우리가 갚아도 되겠지만 그런데 원수 갚는 것은 누구에게 맡겨라? 하나님께 맡겨라.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신다. 뭐라고 하셨느냐?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하겠느냐?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얻어서 행복하게 잘 살기도 하고, 의인이 악인취급을 받아서 억울하게 죽기도 하더라. 그리고 마음으로만 지은 죄는 남이 모르니까 자기도 남도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 또 자기가 행한 것이 죄행인데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알면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모르고 짓는 죄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그 날에 가서는 죄인 같은 악인도 드러날 것이고, 의인 같은 죄인도 다 드러날 것이다. 계:에 보면 다 드러낸다.
인간이 언행심사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뿌렸든지 자기가 다 거두고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 불과 유황불에 들어갈 자도 있을 것이고, 포도주 틀에 들어갈 자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딱 짜놓은 포도주 틀이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면 도망을 못 간다. 포도주 틀에 들어가서 무지막지하게 짓밟힐 자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죄다 모아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의 즙을 짜는 틀, 인간의 피를 짜는 틀에 가둬놓고 무지막지하게 밟아 젖힐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피가 포도주처럼 죽죽 빠지는 거다. 이건 사람이 깨지는 것만이 아니라 짓이겨져 버린다.
그렇게 짓밟힐 자도 있을 것이고, 또 쇠몽둥이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산산이 박살이 날 자도 있을 것이고, 또 개처럼 질질 끌려가면서 개 패듯이 얻어맞을 자도 있을 것이고, 그런가 하면 진리 신앙으로 살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서 영광에 오를 자도 있을 것이다. 이게 다 성경에 나온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볼 때에 포도주 틀에 밟힐 자기인지, 쇠몽둥이에 맞아서 박살이 날 자기인지, 아니면 개처럼 질질 끌려가면서 몽둥이로 얻어맞을 자인지, 아니면 영광의 자리에 오를 자인지? 어느 거냐?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잘났다고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다가 이룰구원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악인으로 살다가 심판을 받고 싶으냐? 예수를 믿는 우리는 지옥은 못 간다. 마귀도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지 못한다. 이건 예수님이 책임을 지셨다. 사망과 음부는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지옥에는 못 간다. 가려고 해도 못 간다. 예수 믿는 우리는 죽으나 사나 어차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지옥)서 죽을래요’ 해도 하나님께서는 내 멱살을 탁 잡고 여기(천국)까지 끌고 갈 것이다. 그러니 이왕 천국에 가는 것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면서, ‘내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우리 주님을 만나리라’ 하면서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느냐? 안 들어가려고 바둥바둥하다가 멱살이 잡혀서 질질 끌려가면서 신발은 저기에 벗겨지고 하면서 끌려가는 그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봐라. 여기 있는 분들은 그런 자기는 없느냐? 인격적 신앙관계성에서 이런 표현이 되는 거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죽더라도 이룰구원이 들어있고, 안 죽어도 이룰구원이 들어있다. 이룰구원 면에서는 전부가 승리라 그 말이다. 이게 보장이 돼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더라’ 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긴다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싸움은 이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게 신앙이다. 그리고 이 신앙싸움을 할 때 우리의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이 하실 일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저 쪽에서 나를 향해 총을 쏴도 총알이 나를 피해가게 하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진리를 잡고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다.
신앙 믿음의 싸움을 할 때 용감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게 예수 바로 믿는 거다. 이게 성령의 사람이다.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쥐가 고양이에 몰려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또 일을 보고 겁내지 말고 지혜를 써야 한다. 지혜가 없으면 사람이 미련해져 버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