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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선우회를 위한 정찬선사 법문
2017. 8. 16 심행 정리
네, 반갑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은 전라북도 장수군에 속해 있는 장안산 장안사라고 합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이 장안사가 시작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일 많은 분들이 아마 자리를 함께 했고, 제일 훌륭한 분들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마곡사라고 하는 큰 본사가 있는데 거기에 제가 한 선원장을 11년을 제가 했는데, 선원생활을 오래 오래 이렇게 하다 보니까 제 스스로가 뭔가 고즈녁하고 호젓한 그런 토굴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제가 가졌던 것이지요.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냐 하면, 결재를 하고 나서 대중이 모여 가지고 함께 결재를 하지 않아요? 입재를 하고 나서 그 뭐 ‘때’라고 그럴까? ‘망상’ 이라고 그럴까? 그게 좀 가라 앉고, 좀 벗겨 질만 하면 또 해제가 되어서 안 되지요. 그래서 이래 가지고 저래 가지고 어떻게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것이며, 우리가 도업을 성취될 만한 그런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서 또 한때는 무문관도 생각을 해 봤는데, 그 무문관은 그건 고문관이다. 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그래서 제 나름대로 제가 뜻을 생각하기를 ‘산문관’이면 좋겠다. 이렇게 ‘산문’, ‘산문’을 이렇게 닫아 걸고 그 안에서 이렇게 조용하게 이렇게 포행을 하면서 그렇게 해서 한 3년이고 5년이고 외부출입을 금하고 이렇게, 정말로 자기 안으로 안으로 깊게 사무쳐서 이렇게 한번 실험을 해 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는 판인데,
이쪽에 인제 내려 가면서, 이쪽에서 남원까지 산책을 하면서 하체를 좀 풀고 하체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걸망을 지고 쭉 걸어 가는 판인데, 그 큰 도로 가에 ‘장안산 장안사’라는 팻말이 딱 있더라고, 아, 그런데 그냥 이렇게 지나가려다가 이게 ‘장안사’라 ‘길게 편안하다’ (우리가) 길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잠깐 잠깐이지.
그래서 그 길을 쭉 이렇게 밟아서 오니까, 오면서 보니까 절이 있는데, 거대한 장안사에서 그만 용트림을 하면서 쭉- 내려 오는데, 여기 와서 입을 턱 벌리고 탁 허니 멈췄더라고. 이 양쪽에 있는 양수가 합수가 되면서 요 밑에는 도랑이 크게 폭포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상당히 여기가 이상적인 그런 곳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
집이 한 채가 가운데가 있었고, 위에서 내려 와서 묘가 두 자리 붙어 있고, 이것은 여기가 수행자가 무릎을 꿇고서 허리를 쭉 펴고 수행을 닦으면, 도를 닦을 그런
안정적인 터가 되겠다 싶어서. 그런데 개를, 하얀 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는데 주인은 없고 그리고 조그마하게 부처님을 모셔 놓고 있더라고.
그래서 법당에 가서 부처님한테 이렇게 절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눈물이 펑펑 쏟아 지는 거에요. 엎드려서 또 절을 하는데, 그때는 눈물이 아니라 콧물 눈물까지 한꺼번에 왁! 쏟아 지는 거야. 하 참 이상한 일이다 여기는
옆에 보니까 그 시대에 돌아 가신지가 한 20여년 되셨는데, 원명노장님 이라고 계셨는데, 토굴로 토굴로만 계셨던 노장님이시고 그분을 아는 분들은 그분을 숨은 도인이라 부르고 이렇게 칭송하는데요. 또 그분이 그 인제 근세에 만공스님한테 인가를 받은 수월스님이 당신 제자다. 이렇게 자평을 하시고 그런 분인데 그분의 사진이 떡 걸려 있어요. 사진이.
그래서 그분하고 인제 저하고는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마는 같이 만나게 되면 서로 이렇게 눈빛을 마주쳐서 그 동안 참 눈빛으로 이렇게 교감을 나누었던, 상당한 그러한 저에게는 선참적인 그런 분인데, 그분 사진이 딱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제가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던 돈을 다 이렇게 내어 가지고 옆에 보니까 이런 몇 장 축원이 있고 책이 이렇게 있는데, 책 밑에다가 돈을 떡 놓고 내가 남원까지 걸어서 마곡사 선원에 들어 오니까, 어떤 분이 전화를 왔어요. 제방에.
그런데 여기(장안사) 먼저 자리를 잡았던 그분이야.
그분이 스님이라고
하면 스님이고, 스님이 아니라고 하면 스님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분이
전화를 했어. 제 전화번호를 알고. ‘아이고 그렇게 돈을
갖다가 넣어 놓으시고 이렇게 다녀 가셨느냐?’
고 ‘그렇다’고, 그리고 ‘어떻게 원명스님 사진까지 있더라고.’ 제가 그렇게 했더니,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그 사진의 주인공 즉 원명 노장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그 노장님이 여기다 꼭 부처님을 모시고 있게 되면, 어느 땐가는 여기 이 도량을 크게 일으켜 세워 가지고 이 도량에서 큰 도인이 나올 그런 인물이 나올 그런 터니라. 너는 절대로 신도들이랄까 시주를 받을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벌을 키우면서 그 벌이 준 그 꿀로 양식을 삼아 가지고 지내라.’ ‘저는 그 유지를 받들어서 저는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돌아 가시면서 정찬스님이라는 분을 한번 만나봐라’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에요. 그러면 ‘스님이 정찬스님이냐’고 깜짝 놀래요. 해서, ‘내가 정찬스님이라’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만나게 됐는데,
그리고 나서 이제 그때, 여기를 저한테 물려 달라고 그러니까 물려 줄 수가 없다는 거에요. ‘왜 물려 줄 수가 없느냐?’ 그랬더니 물려줄만한 그런 보답을 저에게 해야 됩니다. 돈을 내야 된다 그 말씀인데요. 그러냐고, 그렇게 서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가 이제 이런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아 가지고, 제가 이제 여기를 인수를 못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 그분이 여기에다가 자기가 아는 분이 크게 법당도 지어 주고 크게 여기를 자기가 일으켜 세우겠다는 어떤 단월을 만났다는 거에요. 그분한테, 그 단월이 여기다가 원력을 세워서 불사를 하고 나서 나한테 주겠다. 그래서 제 뜻은 제 나름대로 여기서 수행자들이 정진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어야겠는데, 그냥 그런 절로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여기 저기 마구 해쳐 놓으면, 좋은 명당이라고 하는 그런 기혈이 파괴될 것 아니겠느냐?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라. 그러면 인연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저는 이렇게 돼서 그 뒤로 잊어 버렸단 말씀이지요.
그러고 나서 이제 마곡사 결재를 딱 들어 갔는데, 결재를 들어가서 이렇게 앉아 있게 되면 내 눈앞에 뭔가 이렇게 아른거려요. 햐! 이게 묘한 일이다. 내가 이제 정진을 잘 못해 가지고 내가 다른 것이 씌워서 이런 거냐? 뭐가 내가 이제 안으로 안으로 잡도리를 잘 못해 가지고 지금 뭔가 지금 앞에 어른거리지 않느냐? 그럼 퍼뜩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또 그렇게 해도, 또 이제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거에요. 아른거리는 그 그림자를 가만히 이렇게 측근을 해 보니까 여기(장안사) 있는 분이라, 여기.
햐! 이거 이상하다. 그래서 이제 한번 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런 현상이 자꾸 지나가고 그래서, 제가 여기를 이제 어떻게 물어서 알아 가지고 전화를 하니까, 이분이 전화를 안 받데 또. 그러니까 나는 나대로 궁금증이 나고 자꾸 의심이 나고, 자꾸 앉으면 그래 앞에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니까.
그래서 여기 나가자면 팔선사라고 있는데 노 비구니스님이 계셔. 이제 우리 전강스님한테 불명을 받았던 법륜이라는 스님이 거기 있는데, 그 스님한테 이제 전화를 했지요.
‘여기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이렇게 앉게 되면 자꾸 앞에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그래서 이상하다’고, 그분 어떻게 됐냐고 그랬더니, ‘여기 넘어 오자면 이쪽에 재가 하나 있습니다. 수문재라고 하는 재가 있는데, 거기를 이렇게 갔다가 오다가, 이쪽에서 가면서 차가 앞쪽에서 이렇게 충돌을 해 가지고 그분이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분이. 그러면서 완전이 의식을 놓고 의식은 없어지고 숨만 좀 붙어 있다.’ 그래. 이 팔선사 노비구니스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게 어딘가요?’ 그러니까 전주라고 그래. 전주라고 그래서 이제 경찰서로 연락을 해서 가 보니까 그 지경이 되어 있어요. (이야기가 좀 빗나갔는데 있다가 질문을 할 때 법문은 그때 하지요.)
그래 가지고 그 식물인간으로 오래 오래 고생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을 했는데, 그분 속가에 형이 있는데 그분하고 교섭을 해서, 그분한테 제가 일정량의 그런 경제적인 보답을 해 주고 그 다음에 제가 인제 인수를 받았습니다.
그런 것이 한 10년이 되었는데, 저는 이제 여기도 정말 여기는 도인이 나온다 하고, 여기에서 큰 도인이 나온다고 해서, 그 한마디가 저를 이렇게 발목을 잡았는데, 저도 또한 선원에서 오래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선원을 벗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마곡사 선원장을 내 놓고 해인사에서 한 3년 꼬박 지냈고, 그러다가 이제 제가 여기서 일을 하려고 하는 판인데, 해남 대흥사의 보성스님이 저하고 또 각별한 도반이고 마곡사에 선원장을 3년 동안 화두를 들고 살아 보고 그랬는데, 그분이 대흥사 선원을 좀 맡아서 운영을 하고 좀 이끌어 달라 그래서 대흥사에 간지가 이미 올해 7년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시설이 부족하고 아직 다 완비되지도 못한 이런 토굴에 여러분들이 이 귀한 분들이 오셔서, 또 하루를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게 한 것에 대해서 제가 무한히 마음으로 송구스럽게 생각을 하고, 또한 여러분들이 앞으로 신심이 장양이 되어서 공부가 깊어 지고 깊어지게 되면, 그때 또 이 도량을 한번 찾게 되면 함께 여기서 함께 또 한번 눈을 비벼 가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인연이, 또 오늘로 인해서 맞이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훌륭하게 잘 꾸며진 가람과 사찰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아주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행자를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좋은 터를 잡아서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다,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그런 뜻이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하지요?(네.)
이제 좋은 데만 이렇게 다니시기도 하지만, 이런데도 한번 보는 게 큰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이쪽에 주련에 보면, ‘십년단좌옹심성(十年端坐雍心城)’ 이라. 이게 우리 용화사 원장큰스님 송담큰스님께서 써 주신 그런 주렴인데, ‘십년단좌옹심성’이라 십년동안 단정히 앉아서 ‘옹심’ 화두를 간절하게 들었더니, 화두를 절실하게 간절하게 절실하게 들었더니,
‘관득심임조불경(慣得深林鳥不驚)’ 이라, ‘관득’ 꽤 뚫어서 얻고 보니까 ‘심임조불경’이라 숲속을 들어 가도 그 겁이 많고 놀라기 잘 하는 그런 숲속 짐승들 새까지도 놀라지 않고 와서 같이 한 동무가 되고 도반이 되더라.
‘작야송담풍우악(昨夜松潭風雨惡)’ 하더니, 어제 밤 송담에 친 거칠은 폭풍우 는 어제 밤 일이었다. 다 지나고 나면 어제 밤이지요. 언제 어제 밤이 따로 있습니까? 다 지나고 나면 어제 밤이지요. 어제 밤 송담에 풍우가 있어서 아주 거칠고 아주 거칠었던 풍우가 지나가더니, ‘풍우악’하더니,
‘어생일각학삼성(魚生一角鶴三聲)’이라. ‘어생’ 뿔따구 난 그러한 고기가 하나요, 학이 세번 울더라.
이게 인제 서산청허스님이 세번이나 깨쳤는데 마지막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입니다. 오도송. 그래서 마지막 대각을 이루고 정각을 이루실 때에 마지막 한 티끌도 의심이 없이, 한 조각 어두움도 없이 호쾌하게 툭- 터져 버린 그 경계를 이 칠언사구 이 속에다가 골수를 심어 두셨는데
그 골수의 마지막 일구가 바로 이 ‘어생일각학삼성’이다. 고기는 한 뿔따구가 나 있고 학은 세 번 울더라. 고기가 뿔따구가 났고 학은 세 번 울더라 이건 무슨 까닭이냐?
그래서 우리 공부인들이 파설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파설 똘똘 뭉쳐서 본래의 그 깨달은 소식처를 깨달은 그 본각처를 말을 해서 헤집으면, 말로 만들어 흐트려 버리는 것, 이거를 파설이라 그러는데, 이 파설은 무한한 괘를 잃게 되고, 무한한 후인, 뒷사람들에 크게 뒷사람들을 망설이게 하고, 뒷사람들을 헤매게 한다. 그래서 파설은 금물이다, 파설하지 마라.
그렇게 ‘어생일각학삼성’이라 이 부분만큼은 정말로 파설하지 마라. 혀를 대고 입을 열지 마라. 깨달은 만큼, 깨달은 소식만큼 거기에는 분명 살림살이가 거기에는 안살림이 곳곳이 채워져 있다. 채워져 있는데 그 안살림 그 채워져 있는 소식처를 혀로 입으로 아무리 팔만장경을 설한들 그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파설하지 마라.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곳을 마련을 했고 마련했던 그 연유를 잠깐 말씀 드렸고 여기 걸려 있는 이런 주련을 제가 잠깐 소개 말씀을 드렸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사실 도반으로서 만나는 겁니다. 이생에서 정말로 귀하다고 하는 만남들이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만남 속에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한 모임이 만남이 도반이라. 그래서 아까 저 자료에 보니까 도반은 서로 충고도 해 주고 탁마도 해 주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했더라고요. 그 인제 정작 귀하게 만나고 소중하게 만난
도반들에게, 서로가 인제 공부에 대한 채찍을 가해주고, 공부에
대해서 서로가 휘어 잡아서 이끌어 주고, 이런 이런 부분이야 말로 세세생생 물론 과거 생에서 지금까지
이 도반으로서 만날 수 있는, 이 여러 가지의 수 없는 조건들이 충족되어 가지고 만나지만, 앞으로도 이 생에서 우리가 우리의 정신세계가, 우리 영혼의 세계가, 우리의 깨달음의 세계가 저 미래까지 향한다고 하면, 정말로 우리가
눈을 비벼 가면서 도반끼리 서로가 무섭게 땡겨 주고 이끌어 주고 서로가 충고해 주고 탁마해 주는 일이야 말로, 이
보다 더 어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느냐?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함께 이 조그마한 토굴에 오셔 가지고, 함께 불편 하지마는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앞으로도 서로가 함께 이렇게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이런 속에 부처님은 불 세계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 참 부처야 말로, 정말로 만날 시간이 더욱 더 가까워 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저의 말씀을 간단히 이렇게 마치고, 질문이 있다 하니까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평담거사) 저희들이 이렇게 선우회라는 도반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 목적은 선재동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한시도 잊지 않고 끝까지 같이 해 나갈 수 있는 방편이나 좋은 말씀을 일러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찬선사) 예, 지금 세계에 인구를 한 80억? 잡고 있는데 이 80억이라고 하는 우리 인류의 생명들이, 정작 정말 자신의 영원한 가치관을 향해서, 또한 자기의 영원한 자기의 본마음 자리를 향해서 간 사람이 몇이 있겠느냐? 이렇게 우리가 한번 반문을 해 본다고 하게 되면, 그 말에 대한 답은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자기가 취할대로 취하고, 자기가 풀어 질대로 풀어 져서, 그냥 이렇게 그럭 저럭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이것이 사람이다. 한번 몸 받기가 어렵고, 한번 이 진리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거늘, 이 몸을 받았고 이 진리를 만났다고 한다면, 우리가 정말 우리가 이 영원한 이 생명체를 한번 쯤은 우리가 찾아 봐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다고 하면, 아까 우리 평담거사님 물으신대로 선재동자가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심을 내기 위해서 53선지식을
피를 보고 뼈를 갈아 가면서 그 고행 정진을 하게 되는데, 정말
우리도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기 위해서,
그 고행정진을 하는, 그러한 우리는 100분의 1이라도, 1000분의 1이라도, 만분의 일이라도 내 스스로가 신심을 내어 보았느냐? 또 정말 발심을
해 보았느냐? 용맹심을 한번 내어 보았느냐? 이렇게 한번
먼저 반문을 하고 싶고,
두번째로는, 세계적으로 현재 지금 우리가 지금 정진하고 있는 이 간화선, 이
간화선만한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위대한 이런 공부법은 없다. 그래서 이 간화선법이 이미 수 없는 성인과 수
없는 도인이 출현했거늘, 우리는 지금 간화선에 대해서 정말 한번 실참을 한번 해 봤느냐? 진실되게 한번 정진을 한번 해 봤느냐? 그러면 간화선을 한번 정진하기 위해서, 간화선의
종장이신 그런 큰 스님들을 한번쯤
친견해서, 한번 법을 물어 본 적이 있느냐? 이렇게 두번째로는
반문을 하고 싶고,
세번째로는 내 스스로가 항상 시간시간마다, 가슴이 절절하게 간절하게 정말 용맹심을 한번 시험해 봤느냐? 스스로가 한번 그런 큰 용맹심을 내 봤다고 하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형식적으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한 것 뿐이 더 되느냐?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시시각각 이렇게 변해가고 있고 시시각각 이렇게 흘러 가고 있거늘, 우리는 정말로 시간을 허비 하지 말고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정말 하루 빨리 그러한 큰 대신심과 대발심과 대 용맹심을 내야지 된다. 이 세가지를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질문2: 선정각보살) 저는 화두를
들고 있는데 화두가 생각만큼 잘 되지도 않고, 순간 순간 그걸 놓치고 있고, 또 앉으면 번뇌가 계속 떠 올라서, 또 그걸 따라 가다 보면 자꾸
돌아 오고 되 돌아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공부하는데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할 수 있는지 도움 말씀
청합니다.
(정찬선사) 예를 하나 들어서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저 앞에 마당에 장작이 이렇게 많이 쌓여 있지요? 그
장작 하나를 내어 가지고 물에다 이렇게 담근다 그 말씀이에요.
그러면 저렇게
마른 장작이지만 물에다 담궈 놓으면, 그 장작에 습기가 꽉 머금어가지고 실컷 불어 터지지 않겠습니까? 그
장작을 건져서 그 장작을 건져서 이제 여기에 놓고 여기다가 성냥불을 불을 붙이려고 이렇게 자꾸 붙이면 장작이 불이 붙겠습니까?(안 붙습니다) 안 붙어. 우리의
과거는 저 물속에서 수 십년, 수
백년 동안 물 속에 담궈 진 그런 장작과도 같아요. 우리의 습기라 그래요. 그 관습이라고 그러지. 우리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장작, 저런 장작이 물 속에서 수 십년, 수 백 년 동안 자기 습관과 자기
업과 자기 관습으로 습기가 지금 꽉 엮여 있어요.
거기다가 거기다가
참으로 희유하고 희유하게, 화두라고 하는 불을 탁 당겨서 한번 불을 당기려고 하다 보면, 당기려고 하다 보면 또 꺼지고 당기려고 하면 또 꺼지고, 이렇게
수없이 반복을 해서 그 장작에 스며들어 있는 그 나무에 스며들고 있는 그 습기가 나의 전체인 겁니다.
그 나에 대한
그 습기가 나에 대한 관습, 나에 대한 습관, 그 놈이 끊임없이
나를 끌고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생에 이제 이 법을 만나 가지고서는 이제 거기다가 수없이
불을 당길라고 해 봐도 습기가 녹여지지를 않아요. 그러나 그럴 수록이 그럴 수록이 그 습기를 녹여야 하고, 습기가 녹아야 만이 불이 붙을 것 아니에요? 한번 불이 붙게 되면
불이 붙게 되면, 이제는 업근도 없이 업의 뿌리도 없이 불이 확- 한번
타버려요. 그러면 인제 거기에 어떤 새로운 생명체가 벌떡 이 한번 쭉- 나오게
되는 거야.
그 습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어렵다고도 하고 힘들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깊이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이건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질러 놓았던 과거에 대한 그 무서운 업력과 습기가 절절히 절절히 거기에
배여 있어 가지고 배여 있어 가지고, 불을 당기면 당길 수록이 불기운이 오히려 더 약해 지고, 습기가
더욱 흥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도고망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록이 더욱이 더 불길을 더욱이 더 세고 더 강하게 더해서, 습기를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녹여서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그 습기를 좀 더 말려서, 거기에 불기운이 가도록 해야 되지, 그 습기에 져 가지고 후퇴해 버린다고 하게 되면, 이 한번 만나기 어려운 이 절호의 이 내 생명에 대한 이 소중함을 어디서 건지겠느냐 이 말이요.
그게 기약이
없어 기약이 없어, 그래서 안되면 안될수록 더욱이 더 용맹심을 내고,
더욱 더 큰 기운을 내다 보면 그 기운에 의해서, 어느 시간 시간인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숙- 하니 들어 가는 시간이 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될 수록이 힘들 수록이, 우리는 더욱이 큰 이런, 이런 더욱이 더 큰 힘을 내고 더 절절히 간절한 생각을 일으켜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3: 심행거사) 지금까지 만나 뵌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공부를 하려면 선지식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보통사람이 어떻게 선지식을 알아 보고 지도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정찬선사) 그러니까 이 한마음법, 깨달음의
법을 향해서 가는 도반들에게는 가장 무섭고 가장 두려운 것이 자기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런 말, 이게
참 겁나고 가장 두려운 겁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금강경에서 ‘각견’이라고 그러는데, ‘각견.’ ‘깨달았다고 하는 견해’ 깨달았다고 하는.
지금 대부분이 보게 되면 ‘내가 깨달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말들을 쉽게 하고 있는데 그 말이야 말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무서운 함정으로 빠져 들어 가게 하는 정말 그런 것인데, 방금 우리 거사님 말씀대로 어떻게 해야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올바른 지도를 받아서, 금생에 정말로 종자라도 씨앗이라도 내가 내 가슴에 다가 품고 이 세상을 그만 두어야 할텐데, 그런 이제 간절함이 아마 우리 도반들에게는 다 가지고 계실겁니다.
아 우선 선지식을
내가 눈이 없으니까 선지식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 또 이제 예전 속담에도 ‘성현이지성현’이라, ‘성현이
성현을 알아 본다.’ 이런 말도 없지 않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선지식을 구분하는 것이 딱 한가지 있습니다. 뭐냐? 우선적으로 자기가 깨달았다는 견해 ‘각견’ ‘자기가 알았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기 스승한테 꼭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인가를 받으려고 하면 오도송을 꼭 지어 받쳐야 합니다. 오도송을 지어 바치게 되면 그 스승이 그 오도송에 대한 점검을 실시합니다. 거기에
대한 분명 답을 주고 전법계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 밖에는 이 말법시대에 내 스승이 라고, 선지식이라고 구분 하는 것이 요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꼭 명심하십시오. 이게 없으면 다 스스로 자기 바람에 취하고 자기 헛된 허깨비에 취해 가지고 자기가 안다고 그렇게 합니다. 이 공부만큼 무서운 공부가 없는 건데, 정말 선지식을 바로 가려서
바로 그 선지식에게 가까이 가야 되는데, 그러려고 하면 꼭 그 부분을 명심을 하십시오.
자기 선사, 자기 스승한테 저는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도송을 꼭 지어 바쳐야 돼, 그 오도송 속에다가 제가
말씀 드렸던 것이 ‘십년단좌옹심성’ 이다 십년동안 가부좌를 틀고 서는 턱-
화두를 들고 있으면서 ‘관득심임조불경’이오. 화두를 꽉 꽤 뚫어 얻고 보니까 산속에 들어 가도 산속에 있는 그 많은 그런 산짐승들이 겁을 안내 같은 도반이고 친구니까.
이미 안으로
안으로 다 녹아서, 다 소멸이 되어서 안으로는 깨달음의 큰 진주같은 그런 것이 가득이 있으니 산속에 있는 산짐승들이 겁을 낼 리가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해치러 와야 겁을 내지요. 오히려
사랑해 주는 데 겁을 내겠습니까? 그렇듯이 스승이 없이 깨달았다 하면, 이 말법시대는 매우 매우 없는 겁니다. 스승이 없이 어떻게 깨달아? 길이 없는데 어떻게 갈 거에요? 길이 있어야 갈 것 아니겠습니까? 스승이
있어야 꼭- 깨달아요.
스승한테 꼭 오도송을 지어 바치고, 제가 깨달은 바에 제 깨달은 바의 살림살이가 이렇습니다. 하고 이렇게 스승에게 바치게 되면, 스승은 그것을 딱 점검을 하셔서 ‘자도하고, 다시 가지고 와라.’ 그렇게 두번, 세번 다시 이렇습니다. ‘아! 나도 그렇고 그렇다.’ 이렇게 인가를 하시고 전법계를 내려 주시고 이렇게 구분을 하게 되면 틀림이 없는 것만은 아십시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가 정말로 이 귀하고 소중한 내 이 생명을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누구 한테 의지하겠습니까? 예, 이상입니다.
(질문4: 관불도보살) 중도에
대해서 중요하다고 해서 지금까지 공부를 했는데 확신이 안 갑니다. 법문을 청합니다.
(정찬선사)어, 사상적으로 뭔가
‘중도사상’ 그걸 가장 잘 표현했던 조사들이 있는데 서천 조사 쪽에 ‘용수’, ‘마명’, ‘무착’, ‘세친’ 같은 그런 큰 보살들이 출현해 가지고 중도사상을 이제
‘용수’, ‘마명’ 같은
그런 큰 보살지위에 있는 분이 어느 쪽도 치우치지 말고, 선도 악도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딱 중도를
가야 된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말씀을 하셨지요. 그런데 이 중도사상을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표현을 한다고 하게 되면 콱 찝어서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이미 현재라고 하면 이미 과거요.
과거라고 하면 이미 현재인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우리가 말로 구분을 지었을
뿐이지, 이게 우리 선리적으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과거라고 하면 이미 현재고, 현재라고 하면 이미
미래로 가 버리는 거요. 그래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어느
심마오? 어느 마음에다가 점을 칠 것이냐?’ ‘딱 꽂을 것이냐? ‘
그렇듯이 중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도사상도. 말로서 꽉 찝어서 이게 ‘중도’다 라고 딱 이렇게 이야기하기는 매우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한계를 지어야 되느냐? 중도사상을 실증적으로 자기가 확실하게 점을 콱 찍어서 실증적으로 안다고
그러면 자기의 한 세계관, 한 깨달음에 대한 한 세계관이 딱 맺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항상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든 악이든
간에 옳고 그르던 간에 항상 치우치게 되어
있어.
그러나, 본인이 실증적으로 과거,현재 미래 이런 시간적인 관념으로 어디에
찍을 수가 없어. 이미 과거라면 현재고, 현재라고 하면 이미
미래가 되는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듯이 중도사상도
이게 하나로 콱 찍어서 이게 ‘중도’다 이렇게 설명하기는
매우 난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사상을 가장 잘 표현했던 분들인 서천 조사인 ‘용수’, ‘마명’, ‘무착’, ‘세친’ 이 시대에도 사상적으로 엄청난 대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중도사상을
딱 심으려고 하니까 이 네 보살이 나와 가지고, 대 보살이지요. 네
보살이 나와 가지고 중도사상을 설파하고 설파해도 항상 뭐가 미진해, 깨끗하지가 않아. 꽉 찝어서 ‘이게 중도사상’이다
이렇게
그렇듯이 우리 김경숙 보살님이 중도사상을 물으셨고, 저도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렸으니까, 이제 중도사상은 우리 김경숙 보살님꺼요. 이제. 다른 사람 꺼가 아니라 보살님이 물었고, 보살님이 나한테 답을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보살님은 잠을 자면 안돼. 이제 중도사상은 보살님이 콱 찝어야 돼. 이것은 보살님 사상과, 보살님의 생각과, 보살님에 대한 중심으로 꽉 찝으려고 해서 보살님의 머리에 ‘아! 이게 중도구나!’ 본인이 무릎을 칠, 그 시간이 와야 보살님이 중도를 아시는 거야. 아셨지요? 이제는 주무시면 안돼요. 그것을 물은 만큼 보살님은 이제 어깨가 더 무거워졌고 이제 정신이 들어, 집을 한 채 지었어 인제 열심히 하십시오.
(질문5: 고선거사) 화엄경에 53선지식을 찾아 가는 과정에 굉장히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왜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지? 궁금하고, 선지식은 스승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법을 듣기 위해서인지? 궁금합니다.
(정찬선사) 제가 우리 조실스님 전강스님한테 그 말씀을 여러 번 들었는데, 이 53선지식 속에 아주 다양한 그런 인물들이 있다 말이지요. 그렇지요? 창녀도 들어 있고 아주 인제 아주 패륜아도 들어 있고, 별의별 종류의 그런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있는데, 아까 질문하신 것처럼 아주 중요한 것은 무어냐?
이제 53선지식은 선재동자가 갈 때는 이분에 대한 모든 행적이라든가 그 사는 생활 형태라든가 현재 그분이 가지고 있는 지위라든가 입장이라든가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그 전부, 전체 다 끊어 버리고 오직 법하나를
보고 간 거에요. 법 하나. 그분이 창녀든 불량아든, 아니면 패륜아든, 아니면 주정뱅이,
아니면 그런 노름꾼이든, 그런 것은 일체 돌보지 않았어요.
오로지 오로지 뼈골이
사무치도록 법만 하나 보고 가요. 법만, 다른 사람이야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53선지식을 친견하러 갈 때 그랬고,
두번째는 뭐냐? 이분이 딱~ 허니 선재동자한테 법을 딱 이야기를 해 주고 나서, 다음 번에 꼭 어디 가라고 꼭 지시를 해 줘. 그 지시를 해 주었는데
지시를 해 준 그 사람이
나중에 창녀야. 창녀. 그런데 선재동자가 뼈속에 사무쳐 지도록
그러한 법에 있는 희유한 그러한 구하는 그러한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이구 이건 창녀니까 안 가렵니다. 거기서 거부를 하겠지요. 그러나 예, 그렇게 가겠습니다. 간 거요. 그러면 그 창녀한테 가서 탁 그녀 말을 듣고 보니까 이건
이건 이건, 겉 껍데기 하고는 형식하고는 달라.
그 안에 그 안에 갖추어 있는 그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살얼음 같은, 가을달에 서리치는 것 같은 분명한 것이야.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그분이 딱 이렇게 어디로 가라고 하면 한번도 자기 생각,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자기 생각 나는 대로 가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꼭 인도를 해서 그리 가십시오. 그리 가십시오. 그래서 마지막 53선지식을 친견하고 마지막에 대각을 성취하고, 마지막에 정각을 이루는 그런 성불을 하신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소참법문)----------------------------
제가 인제 여름에
우리 선원에서 인제 ‘소참법문’이라 그래서 중간쯤에 선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렇게 법문을 간단하게 ‘소참’이라 그래서
한마디로 하는데 제가 그런 한마디를
올해 했습니다.
제 도반이 셋이
있는데 셋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저쪽에 봉암사 쪽에 이제 선원에다가 발을 이렇게 담그고 선을 직접적인 수좌생활을 별로 안
했어요. ‘혜수스님’이라고 그러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아마 평담거사는 들어 봤는지 알 거예요. 통도사 넘어 가지고 이렇게 표충사 뒤로 해서 내원암이라고 거기에 혜산스님이라는 노장스님이 계셨어. 거기 우리 도반들 한 4명하고 모여 가지고 거기서 저녁을 먹고 차를
이렇게 한잔 딱 들다가, ‘이 찻잔 속에 무진장의 세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면서 이렇게 쭉- 둘러 보더니 한 모금 이렇게 하고 앉은 채로 떡 하니 그만 입적을 했습니다. 입적을. 탁-앉아서. 혜수스님이라고, 나하고 아마 나이가 동갑일겁니다. 법랍도 나하고 같고, 벌써 돌아 가신지가 20 한2,3년
그렇게 됐어요.
또 저 쪽에
청학동을 올라 가자면 절골이라고 있는데 거기 금선사 스님인데 명문스님이라고 나하고 도반인데 송광사에서도 살았고 그런데, 이 친구가 상당히 까다로운 친구였어. 도반인데. 술도 좋아하고 좌우간 사람이 까칠하고 좌우간 뭐 상당히 까칠한 그런 사람인데.
하루는 내가 쌍계사에서 4년 살았는데 그 겨울에 무척 추웠어요. 그랬는데. 그 토굴에 있는 어느 스님이 돌아 가셨다고 쌍계사는 큰절이니까, 지리산 쪽에 거기에 토굴에 있는 스님들이 돌아 가시게 되면 쌍계사에서 연락을 하기 됐는데, ‘그 누구냐?’고 물어 보니 명문스님이라 그래. 그래서 그때 급히 이제 범어사 주지했던
정현스님하고 나하고 같이 가서 그리 올라갔어 올라 갔는데 방 가운데다가 좌복을 딱 –놓고 떡-앉아서 돌아 가셨어.
그 전날까지, 전날 12시까지 이제 자기 도반들 한테 밤에 늦게 까지 전화하고, ‘이 세상을 허망하고, 무상하다.’ ‘이 세상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열심히들 정진하고 열심히들 공부하십시요.’ 도반들한테 밤 12시까지 그렇게 빠짐없이 그렇게 다
전화해 놓고 방에 앉아 쩍-그때 아마 밤 한시가 됐든가 두시가 됐든가 좌복 위에 떡 방 가운데 앉아서(입적하시니)
그 밑에 이제
청학동 올라 가는 거기에 그 절골이라고 있지 않아? 거기 그 밑에 이제 마을에 인제 부산에 교편을 잡는 분이 있는데 마음공부를 하는 분이 있었는가, 그 이제 제자로 두어 가지고 그 다음날 일요일인데 그 만나기로 했단 말이오.
올라 가서 보니까 추운 날인데 신발이 있고 방이 조용하니까, ‘스님 제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어. 그래서 방을 이렇게 만져 보니까 방이
냉골이라. 그래 이제 방에다 불을 넣어 놓고 그리고 ‘아, 불 땠습니다. 스님, 어떻습니까?’ 하고 그래도, 가만 있는 거에요?
그래서 가서 이렇게 코에다가 손을 대어 보니 찬바람이 숙- 나오더라는 거야.
그래 제가 갔을
때는 이렇게 떡-앉아 있어. 그래 이제 지금 우리 대흥사의
회주로 있는 보선스님하고 같이 친구로 해서 같이 오고 그랬는데. 그래 그 친구가 인제 진도사람인데, 자기 어머니하고 자기 누이동생이 있어. 누이동생이 와 가지고 자기
어머니하고 누이동생이 하는 이야기가, ‘평생 동안 이렇게 앉아서 지냈으니까, 돌아 가셔서라도 좀 편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이렇게 좀 누였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오히려 저 우리 스님네들이 앉아서 돌아 가시지를
못하니까, 억지로 앉아서 돌아 가시게 하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또 반대로 누이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속가의 그 모친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또 대흥사 회주 보선스님이, 제가 옆에 있었지요. 그게 이렇게 가사를 씌워 놓았는데 가사를 벗기고, 손발을 이렇게
펼려고 하는데 굳어서 펴 집니까? 그래도 겨우 펴 가지고 했는데, 그런
도반도 있고,
또 봉암사에
인제 ‘야석’이라고 하는 서암스님 제자인지 잘 모르는데, 그분은 또 그 손 솜씨가 뛰어 났어, 손 솜씨가. 음식 잘하지, 승복 잘 만들지, 또
목수 잘하지, 우리 평담님도 알지요? 못하는 것이 없어. 그런데 얼굴이 이렇게 좀 곰보야.
얼굴은 얽었어. 햐! 참 기가 막힌 손 솜씨야. 그러면서도 여튼 간에 도반들 한테 승복 안해준 도반이 없어. 나도
죽기 전까지만 해도 누비로 된 것 하나 해 주고.
그런데 하-참 간암이 걸려 가지고 죽도록 고생을
했어요. 끝에 가서 얼굴이 시커멓게 됐어. 그래 내가 도반아, 도반아, 네가 평생에 그 많은 복을 지었거늘 그 재주가 있어서 그
손으로 그 손이 한번만 지나 가면 이건 맥가이버여. 뭐 해결 안 되는 것이 없어. 다 해결돼.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왜 네가 이 간에 무슨 균이 하나 붙어 가지고 간암이라는 게 뭐야.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 가지고 병문안도
하고 그랬지 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의 이 공간 속에는, 정말 이런 신선한 어떤 우리가 마지막 이 몸을 벗고 가는 이세상, 이 신선한 충격. 신선한 이런 그런 소식들이 별로 없어 허허.
억지로 자꾸 만들어 가지고 자꾸 자꾸 그냥 억지로 그냥 만드는 건데, 실은 우리도 그렇지 않아요? 아까도 우리 평담거사님도 이야기했지마는, 자기 의지력하고 관계없이 현대 의술이라는 것은 이 몸이 심장 박동이 딱 끝나고, 뇌활동이 딱 정지되어서 죽음이라고 할 때까지 약물로 마지막까지 이 몸을 혹사 시키거든.
그러나 찻잔을
들고서 ‘모든 세계가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탁-내려 놓고 떡 앉아서 입적하는 사람이라고 할지, 또한 방 가운데다가
턱- 혼자 그 고적하고 고적한 산중에다가 자기 방에다가 이렇게 그 추운 날 좌복 하나 떡 놓고 누가
하나 그 앞에서 바라 보는 사람 없이, 누구
하나 참 누구 하나 옆에서 시중하나 드는 사람 없이, 홀로 앉아서 떡 하니 앉아서, 산새소리 들어 가면서, 새소리 들어 가면서, 아니 겨울이니까
새소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바람소리는 들었겠지요. 그런 사람이라든지, 한창 난다
긴다 하는 그런 좋은 재주와 그런 천하에 없는 복을 다 지었지마는 간으로써
그렇게 무섭게 고통을 받다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랄지.
자, 그러면 정당한 우리 여기 정법이라고 하는 것. 이게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이게 정말 그 힘을 발휘하느냐? 그것도 아닌 거야 실은. 정법하고
이 마지막 인제 이 몸을 벗을
때의 그때하고 같이 봐서는 안 된다.
중국에 큰 도인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이 이렇게 보니까 자기가 자기 회상에 한 300명을
이렇게 거느리고 이렇게 수좌들이 있는데, 다- 형식상에 놀아
나지 의식상에 놀아 나지,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죽비
소리 치면 앉고 서고, 형식적으로 오고 갈뿐이지, 진짜 사무쳐
지게 오고 가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이
도인스님이 하루는 노망이 들은 것처럼 똥을 싸 가지고 그만 벽에다가 막 발랐어. 그래 방안에 갔더니
똥이 그득하거든, 냄새가 나지, 그러니까 그 한 300명 되는 그 대중들이 그걸 보고서는 하! 우리는 큰스님인줄 알았더니
그런데 오만 데다가 그 방에다가 똥을 싸고 벽에다 발라 놓았다고, 다 흩어져 떠나 버려요.
그래 이제 나무를
하고 또 물을 길어다가 대중을 수발하는 공양주가 한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딱 그것을 보더니 ‘햐! 저게 지금 대중을 시험을 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아. 대중 수발을 하는 그 한 행자가. 보고는 그러더니 딱 돌아 서니까 그 대중 수발하는 그 행자가 큰스님 멱살을 떡 잡는 거에요. 그 스님이 ‘천하는 다 속여도 올바로 박힌 눈깔 하나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힐끔 돌아 보더니 ‘다 썩어 빠진 똥자루만
굴러 다니는 줄 알았더니 아주 기특한 놈이 하나 있구나’ 그랬다는 거야. 그러면서 만족하시더라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형식상으로 놀아 나고 있으니, 한번 사무쳐지게, 한번
속지 말고, 예, 한번 꿈속에서 놀아 나지 말고, 한번 깊이 반성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말씀 드립니다.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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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6: 선일화 보살)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생각의 작용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면 마음의 눈과 생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찬선사) 생각하고 마음하고, 마음하고
생각하고, 우리가 이제 나누어서 분별을 해서 이렇게 보게 되면, 생각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고, 물론 주체가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마음의
작용이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 생각을 쫓아서 가게 되면 마음이 안 나오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보면. 물론 주체는 마음이지만 마음을 잘 다스리고 마음을 잘 갖게 되면, 생각도 그쪽으로 가게 될 것이고, 또 생각 자체가 어지럽게 되면, 어지러워진 그 생각자체가 또 마음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형식상으로
볼 때에, 마음 따로 생각 따로 이렇게 볼 수가 있겠 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우리가 본론적으로 보게 되면, 마음과 생각, 생각과 마음이 따로
분리할 수가 없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딱- 하니 화두를 딱-든다 그 말씀이지요? ‘이 뭣고-‘
이렇게 마음으로 화두를 들게 되면, 생각이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으로 화두를 그렇게 간절하게 틈이 없이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틈이 없이 일념이 상속하게끔, 일념이 상연하게끔, 이렇게 쭉- 가면, 생각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음, 마음이 화두를 제대로 건각을 못하고 틈이 생긴다, 그 말씀이지요. 그러면 생각이 그 틈으로 이렇게 들어 온다 그 말씀이지요. 그렇게
되면 화두를 버리게 되고, 생각도 산만하게 되지요. 그래서
한 마음은 화두로 탁 묶어서, 즉 말하자면 말을 매듯이 소를 묶어 둔,
말을 매듯이 말뚝을 튼튼하게 박아 놓고, 거기다가 소라든가 말을 고삐를 잘 매어 놓으면, 그 말이라든가 소가 요동을 못 치겠지요.
물론 조금은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 자체가, 저는 조금은 그게 인제, 그래서 물론 그 생각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이 주체가 되겠지마는, 그러한 마음은 우리는 화두에다가 말뚝을 매듯이 잘 매어 놓으면, 그 소나 말이 제 마음대로 이렇게 오고 가지 못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잘문7: 중도거사)아까 스님말씀
중에 깨닫는데 대한 인증부분은 오도송을 짓고 인증을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도송을 짓는 이유가
깨달음을 인정하기 위해서 짓는
거고, 그 오도송을 인정하시는 분도 깨달은 분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스님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분이 그런 인정할 수
있는 분이 계시는지 궁금하고,
또 하나는 금강경에 아라한도 즉착아인중생수자.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인정을 받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진실된 것인지? 말씀을 청합니다.
(정찬선사) 그 교수님이신가? 그
차원이. 우리 참 그러니까 우리 불교가 참 매력적인 종교고. 참 위대한
종교입니다. 저- 위에서부터 저 밑바닥까지, 전체를 한 통으로 다 이렇게 섭렵을 해.저 위에는 따로 놀고 저 밑에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야. 그 참 불교라는 것이 그 위대하고 참 심오하고 그렇습니다.
방금 말씀을 하셨는데, ‘깨달음’ (시간이 좀 있지요? 네)
제가 제 경험담을 한 말씀 하겠습니다.
인천 용화사에서 우리 전강조실스님을 모시고 공부할 때, 그때 이제 톱밥을 땠어요. 톱밥. 그때 이제 방을 데우느라고. 가마니에다가 톱밥을 넣어 가지고.
그때에 이렇게 인제 톱밥은 불씨가 있어야 하니까 불씨만 이렇게 한 쪽으로
해 놓고, 재는 따로 재켜 놓고, 안에 이렇게 톱밥을 넣고, 불씨를 이제 이렇게 넣어 놓으면, 그 안에서 누적 누적 이렇게 타
가지고 방이 이렇게 따뜻해 지는데.
당그래로 이렇게
안으로 쪽- 밀어 넣고 손을 쑥 빼는데, 손이 안
빠져. 빠지지를 안 해. 손이. 그 부엌이 이렇게 크고, 거기다가
이렇게 그 뭐냐 그 톱밥을
넣었는데, 당그레를 푹- 집어넣고 손을 빼려는데, 손이 안 빠져. 손이 빠지지 않아. 이게 말이 됩니까? 설명이 안되.
손이 안 빠져
그 큰 부엌에 꽉 차가지고 손이 안 빠져. 그러면서 가슴을 막 치면서 그냥 용맹이, 용기가 그냥 백배로 솟아 나는 거에요. 이건
내 힘이 아니야. 그냥 내가 아니야, 그때는.
그 참 묘~한 일이야 하 참 묘~한 일이야.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경험할거야.
그때가 이제
열한시 한 사십분 쯤 되었는데, 바로 조실스님을 찾아 갔어. 그때 우리 조실스님은 밤에 잠을 안 주무세요. 의자에 이렇게 앉아서 꾸벅 꾸벅 조시다가 이렇게 졸음이 오시지 않아? 그러면
양쪽 방을 왔다 갔다 이렇게 쓰시는
거야. 가니까 이제 노장이 의자에 앉아 이렇게 꾸벅꾸벅 조시다가 내가 가니까 눈을 딱 뜨시더라고. 그런데, 이미 탁 눈 뜨는, 이
눈빛이 벌써 달라, 달라! 내가 딱 들어 오니까
벌써 ‘아! 저 놈이 벌써 뭣 때문에 오는구나.’ 그 이유를 딱 알고 있어요. 햐! 묘하지.
저 선원도 선방에서
나도 이렇게 입승도 해 보고, 저 하두를 하고, 선원장 하고
유나보고, 인제 내가 조실하고 방장을 안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이제 수좌들이 딱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발자국 소리 들으면, 아! 저 발자국 소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무슨 뜻을 가지고 가는 줄을 알아. 하하 이렇게 인제 뭔가 그게 있어. 내 말로 눈치10단이 된다고, 그게 그래 도 아니면 눈치지.
내가 인제 조실스님께
‘제가 물을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을 떡 뜨시더니
‘물어라.’ 하셔서 ‘오조스님이 육조스님한테 법을 전했다니 그
법이 무슨 법입니까?’ 탁 물었어요. ‘어? 이놈
보게?’ 그러더니, 뭐라고 답을 하시냐 하면 ‘칠성고불식 유로천성군(?)이라.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알겠느냐?’ 딱 그러시는 거에요. 그러시면서 ‘나는 사적으로 사적으로 수좌 제접은 안 한다’, ‘수좌를 만나지 않는다. 네가 내일 대중 앞에 나오너라.’ 그래 인제, 그런데 새벽 3시에
인제 도량석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 11시 40분이니까 3시까지 약 3시간
동안 그렇지 않아요? 3시간 동안
시간이 있지 않아요? 그 3시간 동안이 아! 참, 구름 한 점 없고, 가을 밤처럼 가슴이 이렇게 서늘하면서,
그 환희심, 그 법희가, 가슴에
꽉 차는데, 기가 막혀요. 말을 할 수 없어요, 말로. 참! 기가 막혀, 그 3시간 동안. 그 세 시간 동안이 금방 지나가요.
금방 세시간이.
그 다음날 새벽에
인제 조실스님이 법회에 올라 가지고, 그 때 보살 선방, 대중
선방, 비구선방 해 가지고, 그때 비구니스님도 몇 분 있었어.
떡 올라 가시더니, 육조 혜능스님에 대해서 법문 딱 한마디 하시더니, 딱 하시는 말씀이 ‘어제 밤에 어떤 야한 놈이’, 夜한 놈이 밤 ‘夜’자
하고 놈 ‘者’지, ‘야한
놈이 나한테 와서 법을 물었는데, 그 놈, 이리 나오라’고 탁 그러시는 거야.
아, 그러는데. 그때 내가 탁 나가야지요? 그런데,
막 식은 땀이 줄~줄~ 나면서 그냥 몸이 덜덜
떨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그렇지 못 나오지, 제가 어떻게 나와?’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거사님
말씀이, 이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어떻게 지어 바치며, 어떻게
점검을 하며,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짓기 위해서 오도를 하느냐? 이런
말씀 아까 계셨는데, 절대 자기가, 자기가 아는 것이야.
공부를 해 놓고
보면, 내가 그렇게 대견하고, 내가 그렇게 존경스러워. 내가. 내가 나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없어.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러는 거야. 하늘보고 외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위대하고, 내가 이렇게 거룩해. 우리는 지금 그러한 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지금 스스로가
자기한테 억매여 가지고, 조금도
못 나가고 있는 거야. 지금 그렇지요?
못 나가, 못 나가. 그런데 오도송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형식이에요. 아, 오도송은
뜻이 없어. 이미 눈빛만 마주치고, 이미 몸짓 하나 하게
되면, 여기에서 우주의 에너지가 팍팍 쏟아 지는데, 이미
점검은 끝나 버리는 거여. 오도송이라는 것은, 말씀이
그렇지, 형식에 불과해. 오도송이라는 것이. 벌써 눈빛 하나에, 몸에서 우주
에너지가 팍팍 튀는데, 이것은 말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이미 형식에 불과해.
거기 조금이라도 때가 묻어 있는가? 때가
끼어 있는가? 그것만 잠깐 확인하는 것이지, 그게 말이 나가면, 이미 십만 팔천리 멀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도송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송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문자로 해서 이것은
뒷사람들에게 남겨 주는 하나의 이정표고, 하나의 이제, 그게
길이지요.
그게 길이지, 오도송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자기 선사는, 선사는 이미 그걸 다 보고
있어요. 그래서 탁 내어 놓으라 하지 않아요. 오도송.
이것 말고, 탁 이것 내 놓는
거에요. 여기서 다 죽는 거에요. 여기서 여기서 죽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참 거룩하고, 위대한 ‘나’라고 하는 것은, 천하에 어디서 찾을 수 없는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고, 가장 정말로 존경 받을 존재인 것입니다.
불법을 만났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진리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여길 벗어날 수가 없어요.
다 거기서 갇혀 가지고서.
그래서 이 오도송은 뒷사람들에게 하나의 그런 정표를 남겨 두기 위해서 남겨
둘뿐이지 큰 의미가 없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