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니느웨의 죄와 벌
말씀 : 나 3:1-7
1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4 이는 마술의 주인 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5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서론>
오늘 본문은 니느웨를 침공하는 무서운 군대의 광경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두르 살피는 사자의 공격모습 처럼 대적들의 악한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와 벌을 저술한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죄와 벌」은 위대한 세계적인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작품으로, 이전의 작가의 창작에서 제기된 일련의 문제들에서 보다 폭넓은 사회,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윤리와 연관된 철학적, 형이상학적 문제까지 망라하고 있습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작가로서 뿐 아니라 미래에의 선지자이자 예언자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나흠 선지자를 통해서 니느웨의 침공과 불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망은 전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표대로 진행되었습니다.
184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쉐프스키 비밀 모임에 연루돼 사형 선고와 감형을 받은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는데, 그 후로 간헐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더니 평생 간질병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시베리아 유형은 작가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감옥에 있었던 4년 동안 그는 온갖 부류의 죄수들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냈으나, 밑바닥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러시아 민중에 대한 면밀한 성찰의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더욱 확고히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니느웨의 침공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자초한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의 악조건과 어둠의 뒤안길속에서 소중한 성찰을 하게되고, 자기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의 삶이 우울하십니까? 대적의 손길이 강하게 여러분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죄와 벌의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밀려오는 고난과 환란의 상황을 성찰하고, 자기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다져나가는 사랑의 전사로 거듭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본론>
=========3:1
화 있을진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알려주지만, 여기서는 구문상 뒷 구절(4절)보다는 앞 구절(2:11-13)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 본절에서는 앞에서 사용된 용어들, '강포'의 히브리어 '페레크', '피'의 히브리어 '다밈', '늑탈'의 히브리어 '타레프'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게다가 '호이'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서론적인 기능이 본절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이 용어가 평범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면, 다음(2절)에 나오는 구절과 내용상 연관이 있어야 하겠지만, 어떠한 연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본절이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일단락 내리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사 1:4;5:8-23;렘 30:7;47:6). 이렇게 본다면, 2:3-3:1과 3:2-7이 보여주는 특이한 평행 구조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C.E.Armerding). 그 구조는 다음 도표와 같다. 즉, 둘 다 갑작스런 전투장면으로 시작되고, 죽음과 정죄받은 범죄 사실에 대한 '애곡'으로 마친다.
평행 구절 본문의 내용
2:3-3:1 3:2-7
2:3-5 3:2,3 파괴하는 자의 맹공격
2:6-10 3:3 헛된 방어
2:11,12 3:4 해석
2:13 3:5,6 여호와의 심판
3:1 3:7 선포되는 평결
이와같은 구성에서 본절의 역할은 형벌을 받게 된 '원인'(2:11-13)과 그에 대한 형벌(3-10절)을 연결시키면서 앞 구절(2:3-13) 전체를 요약하는 데에 있다.
=======3:2,3
본 단락은 군사들이 신속한 동작으로 돌격하면서도 내는 굉음,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전투 모습을 연상시키고, 곧바로 그로 인한 참혹한 광경을 숨가쁘게 연결시킨다. 이로써 2:3-5의 전쟁 장면을 되풀이한다. 더욱이 '달리는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레카바 메라케다'는 '멤'과 '레쉬'로 시작되는 두운법을 사용하여 본문이 주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한다.
======3:4
니느웨의 멸망 원인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미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 '기생이 음행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누네이 조나'와 '그 음행으로'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제누네이하'는 모두 같은 어근을 갖는 단어들로 본절의 중심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음행'에 대한 성격적인 개념은 다양하다. 즉, (1) 행음(겔 23:5-21)은 물론이고, (2) 반역과 불성실(삿 2:17; 8:33,34). (3) 더러움(레 20:3-5; 렘 13:27) 등을 뜻한다. 이상의 세 가지 의미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일말의 도덕성마저도 버렸던 니느웨 도성에 걸맞는 표현이다(C.E.Armerding). 또한, '미혹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모케레트'는 문자적으로 '팔았느니라'(sell,NASB)는 의미로 마치 아하스가 앗수르와 부정한 관계에 유혹되었듯이(왕하 16:7-18) 니느웨는 부정한 방법으로 모았던 국력을 낭비하고야 말았음을 시사한다(사 36:16,17), 즉, 니느웨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거짓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악한 힘을 발휘했다는 데 있다.
=====3:5,6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 앞에서는 매춘부의 모습에 빗대어 앗수르의 멸망이 불가피했던 사실을 언급하였고,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수치를 언급한다. 특히 2:13과 마찬가지로 '만국의 여호와의 말씀에'라는 말로 시작하여 예언의 성취가 앞의 예언들과 연계성을 가진다는 점과, 결정적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시므로 그들이 자행했던 더럽고 추한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응분의 결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3:7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1절), 본절에서도 여호와의 판결에 대한 애곡으로 일단락을 마친다. 여기서 언급된 애곡은 비통함이 아닌, 멸절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타내는 놀라움이다. 1절에서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게 될 가능성(2:13) 때문에 애곡하였으나, 여기서는 멸망의 모습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야누드 라'는 단수형으로 애곡할 사람이 단 한 사람조차 없다는 의미로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진멸되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대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코 재건되지 못했다. '케임브리지 고대사'에서 언급된 대로, '역사상 앗수르만큼 완벽하게 약탈과 노략을 당했던 나라는 없을 것이다'(본 주석은 기독링크넷에서 퍼온것임).
결론>
무고한 백성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강요하는 폭력제도와 폭력세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끊어버리는 사랑의 힘임을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으로 살인범죄를 단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폭력제도에 대한 폭력저항도, 살인행위에 대한 제도폭력도 모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닙니다. 남에게 고통과 참상을 안겨다주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은 마침내 니느웨처럼 참담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 독선, 탐욕으로 폭력을 구사하는 악의 세력인 앗수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시간표대로 반드시 망했으며, 이것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강화하는 비호세력 역시 심판을 면치못한 성경역사를 돌이켜 깨달으시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받아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