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교회는
당분간 총회 공과에 맞춰서
설교가 진행됩니다.
2023년 5월 28일 설교
설교본문: 로마서 12:1-2, 14-21
제목: 악으로 선을 이기라
가위,바위,보 게임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인데 무엇이 그리 재미있을까요?
하지만 어디서나, 세대 불문하고 쉽게 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름을 붙여본다면 “겸손게임”이라 부르겠습니다.
우리는 게임을 이기기 위해 셋 중 하나를 내놓습니다.
“바위는 강하니까 쉽게 이기겠지?”
그런데 넓은 보자기에 가려지고 맙니다.
“보자기는 바위도 이기니까 강하겠지?”
그렇지만 가위에 쉽게 찢어집니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것이라고 해도 항상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한 번 이겼다고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내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다른 것에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함을 배우는 게임이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싸우는 자입니다.
14절을 보면 “박해하는 자”가 나오고
17절에는 “악한 자”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것들과 싸울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나 대상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화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반드시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적인 승리의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배워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법은 무척 쉽지만,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그에게서 피할 수 없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상대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박해당한다는 것은 상대와 맞서 싸울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대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성경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가 아닐까요?
일제 강점기로 가보겠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유명하신 최권능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붙잡혀 갔습니다.
6년간 심한 고문을 당하셨고, 마지막 40일 금식 기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본 순사들이 그를 몽둥이로 때리면,
“예수 천당”이라고 외치셨다고 합니다.
일본 순사들이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매를 맞으면 비명을 지르지, 왜 예수 천당이라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 몸에는 예수로 꽉 차 있어서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문을 심하게 당할수록 “예수 사랑하심을” 찬양을 크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감옥 사람들이 그 찬양을 모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감옥 안을 교회로 바꾼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때린 자들을 원망한다면,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겠습니까?
자신은 ‘죽어도 천국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때리는 자들도 “예수를 믿어야 천국갑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했는데,
그들 육신에 고통을 주고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천국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복 안에 있는 자이며,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일제의 패망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2호실,
주기철 목사님이 4호실에 계셨는데
주기철 목사님이 돌아기신지 5일 만에
최권능 목사님도 소천하셨습니다.
일본의 불심판을 외쳤던 안이숙 사모도
같은 감옥소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박해자가 강한 자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몸과 삶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이들이 승리자입니다.
이들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으며, 큰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한 자는 우리를 괴롭힘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리도 악함으로 악을 대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는다면 도리어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악한 자를 제압했다고 해도 또 다른 악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악의 배후에서 장난하는 악한 영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악을 소멸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싸움은 상대에 대한 싸움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나에게는 나를 괴롭히는 자를 저주하고, 악으로 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악으로 대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하고,
결국 나 역시 악한 자의 모습으로 변신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의 죄와 철저히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인 것이고, 사랑은 영원히 우리에게 남을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이것은 상대와 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시 경건주의자들은 자신의 감정까지도 절제하는 금욕적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목회자 자녀들 중에서 부모의 금욕적인 교육 태도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신나게 뛰어놀면 “목사 자녀가 천방지축이다.”
가만히 있으면 “목사 자녀가 왜 우울해 있냐?”
이런 비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신앙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상대의 감정이나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고 말할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상대를 성장시키려고 훈계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고
감정이 깨져 신앙이 퇴보가 됩니다.
퇴보되는 것은 상대뿐이 아닙니다.
자신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서 신앙의 기쁨도 잃고, 영적 고갈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을 같이하고, 낮은 곳에 처하며,
지혜로운 척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럴 때 한 마음이 될 수 있으며,
함께 어려움도 이겨내고, 영적 성장도 이룰 수 있습니다.
바울의 승리 공식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악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자신을 때리고 찌르는 악한 자들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을 베푸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제물이 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될 수 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박해자를 위해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에 충만함을 입을 때 가능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바울도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때렸던 그 마을로 도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드림’은 구약의 예배, 즉 제사의 형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도들은 ‘예배를 드림’으로서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구약 성도들은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 짐승을 가져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죽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고 신약 성도들은 나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우릴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죄를 고백할 때, 죄사함의 기쁨이 있으며,
거룩해짐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합당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시듯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불로 뜨겁게 채우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교회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2절을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예배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을 악하게 대하는 자들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끝까지 전하여 사탄의 권세를 꺽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결국 그 복음올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입니다.
악이 달려들 때 악으로 대하면 결국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 수 없습니다.
그 싸움의 승리자는 사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내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시게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욕망과 의지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언제, 누구에게나 선을 행함으로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