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이른 아침 호텔의 창문 커튼을 열어젖히자 보스포러스 해협이 저 멀리서 붉은 빛을 띠고 아침을 열고 있는 것이 내려다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전망대 같은 거대한 탑이 외로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 공기도 맞을 겸 주변 산책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물론 집사람은 낯선 곳에서 아침에 혼자 나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렸지만 내 호기심을 꺾지는 못했다.
호텔 바깥은 자동차들이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바로는 호텔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바로 해협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 맞은편으로 호텔에서 보았던 전망대가 높직이 외롭게 서 있었다. 전망대 아래는 주차장이었는데 주차를 하는 곳에 깃발 같은 것을 잔뜩 세워 두었다. 터키어를 알지 못해 그것이 무슨 용도로 왜 그렇게 세워져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른 아침이라 그 앞을 지나는 사람도 없어 그저 궁금한 채로 해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차도를 따라 500여 미터 정도를 걷다보니 커다란 삼거리가 나타났고 그 한쪽에 육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육교를 오르내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들 그 넓은 도로를 차량을 곁눈질하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른바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선지 육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작동도 하지 않았다. 육교 위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해협을 내려다보았다. 해협의 아침 해를 머금고 붉고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니 해협으로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리저리 살피다보니 언덕을 타고 내리면 해협으로 이어지는 아래쪽 도로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로 길지 않은 언덕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빠르게 내려가기는 힘들었다. 혹시 아침 시간을 놓칠까봐 연신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하며 겨우 아래쪽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넜다. 맞은편은 주유소였는데 그곳에 가보니 해협에 닿으려면 다시 언덕 기슭에 다닥다닥 줄지어 서 있는 동네를 지나야했다. 결국 해협의 끝까지 내려가는 것은 포기하고 주유소의 마당에서 해협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에 그저 단순히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인류 문명이 잘 조화된 동서 문화가 서로 어우러지던 곳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의 문명들이 이곳을 씨앗삼아 꽃을 피웠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온갖 찬란한 문명들이 이곳에서 부침을 이어갔다.
해협은 옛 영화를 감춘 채 지금도 묵묵히 지중해와 흑해를 이어주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저곳으로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해협 저 멀리로 크기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배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가물거리듯 보였다. 지중해에서 에게해를 거쳐 이 해협을 지나면 바로 흑해로 이어진다. 흑해를 지나면 중앙아시아 평원을 만나고 그 너머로 중국이 있다. 반대로 지중해로 나가면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로마가 뱃길로 지척이 된다. 지중해 안쪽 깊숙이는 중동으로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오랜 세월 이곳은 세계 물류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 문명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문화가 꽃피지 않을 까닭이 없는 곳이었다.
온갖 물품들이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오르기도 하고 대륙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그곳을 통해 가장 번성한 중국의 문화와 지중해의 문화가 교차되었다. 어디 그뿐일까. 뱃길이 유용하다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하게 되기 마련이다. 제국을 꿈꾸는 거대한 힘들이 수도 없이 이곳에서 부딪쳤으며, 가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을 양손에 쥐고 있기도 하거니와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길목에 옛 영욕을 간직한 채 반짝이고 있었다.
언덕 아래의 집들은 모두 해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곳 사람들은 언덕 아래 해협의 역사를 가슴에 안고 살고 있을 것이다.
해협은 영광스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치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쟁은 늘 살육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선한 전쟁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언덕 기슭의 사람들은 해협을 영광의 역사로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그들의 자랑스러운 오스만 투르크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이곳저곳에 제1차 세계대전의 생생한 사진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이 해협을 지켜낸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한때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도 했던 오스만 터키였다. 세계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들은 지금 저 아래 해협을 통해 그들의 전함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호령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대로 서구의 열강들이 해협을 지나기 위해 전함을 이끌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은 전함 대신 물류를 잔뜩 실은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배들만이 부지런히 오가는 중이다. 지금도 여전히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에서 흑해로, 그리고 다시 흑해에서 지중해도 물류가 오간다. 그 물길을 통해 터키인들은 과거와는 또 다른 영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협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스마트폰 시계는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이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등줄기에 땀이 흥건히 베어들었다. 해협 위로 가로 놓인 대교를 수많은 차량들이 바쁘게 오가는 것을 보며 오던 길을 되돌아 왔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