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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끊고 번지르한 말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되고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지며
거짓을 끊고 꾀를 버리면
백성이 갓난아이의 순수함을 회복하네.
(그러나) 이 세 마디도 여전히 분별적인 말이어서 부족하네.
그러므로 백성에게 혹 명령하여 귀의하게 하네,
소박함을 지향하고 질박함을 보존하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고.
곽점갑
<匕+幺>(絶)智(知)弃卞(辯) 民利百伓(倍) <匕+幺>(絶)巧弃利 覜(盜)惻(賊)亡又(有) <匕+幺>(絶)<忄爲>(僞)弃<虘+心>(慮) 民复(復)季子 三言以爲<桌-木+又>(辨)不足 或命(令)之或<虎+口>(呼)豆(屬) 視索(素)保僕(樸) 少厶(私)須(寡)欲
이 장을 풀이하기에 앞서, 우선 반복되는 두 글자에 대해서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 글자들은 <匕+幺>와 기弃(버리다)인데, 이 글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 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글자 <匕+幺>는 편의상 모양자를 넣었을 뿐, 모양자 각각이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후 판본에서 이 글자를 절絶(끊다,단절하다)로 대체하였다. 이렇게 바꿀 수 있었던 근거를 두 가지로 추정할 수가 있다. 한 가지는 절絶은 갑골문으로 보면 실(絲) 사이에 여러 개의 칼이 그려진 형상에서 나온 글자인데, <匕+幺>도 실을 끊는 형상과 비슷하다. 절絶의 고자古字가 절(편의상 형상을 표현하자면, <찰蠿 - 䖝䖝>)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가 않다. 또 한 가지는 기弃(버리다)와 상응한 글자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지변교리知辯巧利를 끊고 버림으로써 백성이 질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도덕경의 해석으로 보자면 어울린다. 하지만 지변교리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무엇을 알며, 뭘 말하며, 왜 교묘하며, 무슨 이로움인지 말하지 않고, 그저 일반적인 의미로 이들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 글에서 지금까지 바라본 도덕경의 일관성에서 벗어난다. 가령 지족知足은 권장하며, 교巧(솜씨가 있다,교묘하다)는 유猷(꾀하다,모략,법칙)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긍정적 의미이다. 오히려 글자 <匕+幺>를 계㡭(잇다,매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ㄴ'으로 감싸고 있는 글자의 모양에서도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가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를 고려한다면 더욱 더 절絶이 아니라 계㡭로 봐야만 한다.
기弃(버리다)는 기棄의 간체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간체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곽점본에 등장하는 기弃는 간체자라기보다는 기棄의 고자古字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도 이를 기棄로 표기하였는데, 이 글자는 갑골문에 따르면 죽은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서 버리는 모양에서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어린 아이가 죽으면, 그 마음의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죽은 아이를 두 손으로 잘 받들어(공廾)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지만, 잊혀질 리가 만무하다. 원래 기棄(버리다,잊다)는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며, 힘들지만 잊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버리고 잊어야 할 대상이 더럽거나 악한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상실감을 치유하기 위해선 그 대상을 승화昇華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가령 계지기변㡭智弃卞은 변卞을 버려서 승화시켜 지智로 잇는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해석으로 이 장의 내용을 풀이하면 무난하다. 혹은 기弃가 거弆(감추다,남몰래 숨겨두다,저장하다)의 오자誤字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대체한다고 해도 의미상으로 큰 변함이 없고 무방하다. 오히려 나는 곽점본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거弆를 기弃로 잘못 표기하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글자모양이 유사하기도 하지만, 크게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弃를 거弆로 대체해서 풀이하도록 하겠다.
이 장에 대한 풀이를 시작하기 전에 두 글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하였고, 이 장을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상황에서 쓴 것인지 살펴보면 좀 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장 역시 다른 장들과 다를 바 없이 성인聖人의 말을 글로 옮긴 것이다. 성인聖人이 이런 말을 하게 된 상황은 혹명지혹호두或命之或<虎+口>豆에서 유추할 수가 있다. 성인聖人의 마음가짐이란 스스로가 조화로움에 있음으로써 민民들에게 본보기의 역할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다. 29장에서 언하지言下之에서 언급했듯이 힘을 행사하는 말을 성인은 경계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런 성인이 혹시 명령命令으로 들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서도 말을 한다. 이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비문명집단의 장로로서 마을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 배경이란 결국 마을이 문명화에 심각하게 노출된 상태일 것이다. 점차 많은 민民들이 문명화에 동조하여 더 이상 조화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위기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다만 이 글은 민民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리더들에게 하는 말이고 이러한 리더는 주로 장로長老이거나 일부 사士들도 해당된다. 문제의식이 강하게 엿보이지만, 그 문제에 대한 대응에는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다. 물론 모든 민民들이 결국엔 마을의 장로가 될 테고, 통찰력이 남다른 이들은 성인聖人이 될 테고, 글재주가 있는 이들은 사士들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가 권력과 전혀 무관하며 민民과 다를 바 없는 그야말로 평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이 글의 그 직접적 대상은 마을의 지도자들이지만, 잠정적인 지도자들인 민民들도 간접적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라면, 그 문제를 함께 풀어야 마땅하다. 여전히 마을의 지도자들이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부담을 안고서 그저 민民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자유롭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이 장은 순서를 달리해서 살펴보려 한다. 이는 앞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지변교리知辯巧利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유추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그저 일반적인 의미 즉 그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 의미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언이위판부족 三言以爲<桌-木+又>(辨)不足
여기서 글자 <탁桌(높다)-목木+우又>를 왕필본에서는 그저 문文으로 대체하였다. 이로써 앞서 나온 구절들이 문장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해석이 전체적인 의미를 훼손하지는 않기 때문에 문文으로 대체해도 무방해 보인다. 다만 원래 글자가 판<탁桌(높다)-목木+치夂(뒤져오다)>의 오자로 볼 수도 있다. 이 글자 판<桌-木+夂>은 '눈을 부릅뜨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눈을 부릅뜨고 따라온다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에 말의 의미를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앞 세 문장으로 눈을 부릅뜨고 따라오기에 부족하다면,'이라고 풀이할 수가 있다.
혹명지혹호두 或命(令)之或<虎+口>(呼)豆(屬)
여기서 두豆(콩,제기,제수)를 다른 판본에서는 속屬(무리)로 보아 백성으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보면 이 시가의 대상이 곧 모든 민民들이 되고 만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쉽게도 이 장에서는 민民들과 함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자는 의도를 엿볼 수가 없다. 이 글은 마을의 리더들에게 특별히 주문하는 말로 보인다. 그래서 두豆는 제기나 제수로 볼 수 있으며, 그 앞에서 하는 말처럼 마음을 담은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다. 풀이는 '혹시 명령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하네.'라고 하면 무난하다.
시소보복 視索(素)保僕(樸)
색索(꼬다,더듬다,찾다)은 갑골문에서 실타래를 두 손으로 꼬는 형상인데, 소素(본디,바탕)도 금문에서 유사한 형태의 글자이다. 색索을 소素의 오자誤字로 봤는지,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는 모두 색索을 소素로 대체하였다. 달빛이 희미해도 늦은 밤에 산을 본 적이 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나무의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오히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산의 윤곽이 훨씬 뚜렷하게 보인다. 실타래를 더듬어서 찾는 것은 촉각일 수는 있지만, 총체적 감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다만 촉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늦은 밤의 산도 그렇다. 다만 시각적 감각에만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경험한 그 산의 총체적 감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무가 보이지 않아도, 나무는 있으며 그 나무의 끝자락으로 이어진 산의 능선이 보인다. 그래서 색索은 소素와 다를 바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에서는 나 역시 소素가 오히려 직접적이고 적합한 글자라고 본다. 한편 도덕경에서는 도道가 곧 조화의 원리 그 자체이므로, 여기서 소素는 도道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상의 본질을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다.
복僕(종,무리,동아리)은 갑골문에서 노예가 삼태기로 흙을 들어 올리는 형상의 글자이다. 도가집단의 민民들을 미천한 존재로 비하하는 글자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75장에 도호무명복道互亡名僕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복僕은 도道와 서로 어우러져있는 관계이다. 즉 복僕은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 낮은 자세로 조화를 지향하며 질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복僕을 박樸(질박하다)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 의미가 아닌 도덕경에서 부여한 의미로 바라본다면 복僕은 박樸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무리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적합하다. 혹시 명령처럼 보이는 말이란, '도의 관점에서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 낮은 자세로 조화를 지향하며 질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문명으로부터 지켜라.'이다.
소사수욕 少厶須欲
마지막 구절은 간절한 마음을 강조해서 표현한 글이다. 소少는 소小보다 더 작음을 표현한 글자이며, 사厶(사사,나我)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나我이다. 성인聖人은 오직 욕불욕欲不欲의 마음가짐을 가진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작디작은 개인적인 바램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러한 바람이 곧 삼언三言이며, 그 삼언을 시소보복視索(素)保僕의 관점과 마음으로 새기라는 것이다. 이로써 삼언三言을 보다 쉽게 접근할 수가 있다. 이 구절의 풀이는 '작디작은 사심私心이지만 마땅히 바라는 바이네.'라고 할 수 있다.
계지거변 민이백배 㡭智弆卞(辯) 民利百伓(倍)
변卞(법,분별하다)는 원문 그대로 두고서 '분별하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분별의 관점은 도道이다. 엄밀히 보면 반문명주체에 의해서 분별하는 것이며, 그 기준은 조화이다. 지智는 따지고 보면 그 처음이 분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앎이든 지혜는 모두 어떤 정보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고 착각할 수가 있지만, 실은 그 정보에 대한 자기인식이 기준이 된다. 정보에 대한 인식은 분별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도道의 관점을 지닌 변卞과 연결되어 있는 지智는 사뭇 달라지게 된다. 흙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고 농사를 하는 인간들은 생산량의 늘리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한다. 파종 전부터 추수까지 농사에는 여러 때가 있다. 그들의 지智는 이러한 여러 때와 약을 연결한다. 그리고 지智는 약의 종류와 양을 결정한다. 하지만 조화를 지향하는 농부들의 지智는 다르다. 이들은 흙이 건강해야 제대로 된 작물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산량은 흙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며, 자신들의 땀의 양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상상태에 따라서 어떤 대처를 할지를 안다. 그들은 지화知和하며 지족知足한다. 이렇듯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지智는 문명의 관점인지 조화의 관점인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도덕경에서는 민民과 인人을 구분하고 있다. 수 차례 언급했듯이, 민民은 비문명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배伓(산이름,힘이세다)는 배俖(곱,갑절,더하다)와 같은 의미로 볼 수가 있다. 가령 술잔을 가리키는 글자로 배杯와 배桮가 같이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민이백배民利百俖가 20장의 민다이기民多利器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가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장에서의 이利(이롭다,날카롭다)는 그저 이롭다는 의미이며, 기器와 연결된 이利가 아니라 민民과 연결되어 있다. 민民이 이롭다는 말은 비문명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들의 이로움은 조화로움에 도움이 되거나, 조화로움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마을에 어떤 목사가 농기구를 전해준 일화가 있다. 목사가 몇 년 뒤에 다시 그 마을을 찾았을 때, 그는 보다 많은 생산량으로 풍족하게 사는 인디언 마을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삶은 그리 달라져 있지 않았다. 인디언 추장은 농기구로 인해서 보다 많은 시간 동안 놀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목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로움은 비문명인에게나 문명인에게 유사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 민民들의 이로움은 결코 도시 문명인들의 이로움과는 관점에서 전혀 다르다.
이 구절의 풀이는 '도道가 기준이 된 분별함을 간직하여 지혜로 이어나가면, 민民의 이로움이 점점 더 커진다네.'이다.
계교거리 조측무우 㡭巧弆利 覜惻亡又
교巧(공교하다)는 사전적으로 솜씨나 꾀 따위가 재치가 있고 교묘하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렇다면 계교거리㡭巧弆利는 이로움을 간직하여 공교함으로 이어나간다는 의미가 되는데, 말은 그럴 듯하나,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우선 이어진 구절을 먼저 살펴보자. 조측覜惻(바라볼,슬퍼할)은 20장에서 언급했듯이, 재물을 축적하기에 힘쓰는 인간들을 지칭한다. 이들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단어이다. 20장은 도시의 현상을 잘 드러낸 시가詩歌이다. 결국 권력이 만연한 도시에서는 조측다우覜惻多又 즉 가엾고 슬픈 인간과 현상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고 봤다. 현상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들은 생기고 또 생기지만 이를 줄여나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우亡又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조측무우覜惻亡又가 계교거리㡭巧弆利의 결과로써 나온다는 말인데, 이것은 논리적인 연결이라기보다는 통찰적이며 경험적인 연결로 볼 수 있다. 도시의 인간들은 비문명인들의 질박한 삶을 그저 가난하고 구차하게 봤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로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도시의 삶은 결코 만족을 길게 이어갈 수가 없다. 끊임없이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획득하기를 반복하는 생활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거나 노력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족은 바람을 넘어설 수가 없다. 결핍을 마음 깊이 담고 살아간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인人들의 선택은 오로지 권력지향이다. 본질적인 결핍은 자연과 멀어짐에서 생긴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여느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들과 서로 연결됨에서 확인할 수가 있으며, 조화를 지향하며 살아갈 때만 존재의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다. 지금도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맘 편히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명의 삶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관념적인 공포로부터 유발되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문명은 야생, 맹수, 어두운 숲 등등을 공포의 장치로 둔갑시켜버렸다. 죽음을 공포로 둔갑시켰다. 특히 성장이 멈추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 어제 보다 낳은 오늘, 과거보다 발전된 현재는 문명의 미덕이 되었다. 문명이 남겨둔 과거는 권력유산일 뿐이다. 과거는 현재보다 못한 공간으로 왜곡시켰다. 인人은 문명 안에서는 힘든 오늘의 공간에서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꿈꾸게 된다.
도가집단의 성인聖人은 도시의 본질적 문제와 왜곡된 인간상에 대해서 통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人들이 문명 안에서 해소할 수 없는 결핍을 자연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을 통해서 그 결핍을 직시하고 본질적으로 해소할 수도 있다고 봤다. 하지만 질박한 삶에 대한 인人들의 편견을 먼저 깨뜨려야 함도 알게 된다. 비단 도시에 사는 인人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의 배경은 마을의 사람들조차 도시문명에 물들어,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에서 분별없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탐하고, 인人들처럼 소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 사람들도 해당된다. 질박한 삶이 그저 가난하고 구차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롭고 즐겁고 평안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그러한 편견을 깨뜨린다고 봤을 수도 있다. 왜곡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질박한 삶에서 오는 여유와 즐거움은 형언할 수 없이 크다. 성인들은 도가집단의 강점, 즉 문명인의 시각에서도 장점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구절은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된다. 풀이는 '점점 더 불어나는 이로움을 교묘함으로 이어서 질박한 삶이 결코 구차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와 즐거움이 넘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면,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들이 점점 더 생겨나지 않고 줄어든다.'로 볼 수 있다.
계궤거차 민복계자 㡭<忄爲>(僞)弆<虘+心>(慮) 民复(復)季子
궤<忄爲>(어울리다,조화되다)는 위僞(거짓,속이다)로 바꿀 이유도 없고, 또한 합자<차虘(모질다,사납다)+心>를 려慮(생각하다,헤아리다)로 바꿀 필요도 없다. 마을을 조화로움의 전통으로 유지하려고 애쓰는 장로들이나 리더들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 마음이 모질게 드러날 수가 있다. 문명이 마을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한 마음을 없앨 수는 없다. 차심<虘+心>(모진마음)은 중요하다. 그러한 마음의 근저에는 연민이 있다. 그저 분노하거나 그것에 멈춰있을 수는 없다. 계궤거차㡭<忄爲>弆<虘+心>는 곧 모진마음을 간직하되 연민의 마음으로 조화와 연결한다는 말이다.
복复(회복하다,돌아가다)은 복復과 동자同字로 보면 된다. 계자季子는 막내아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18장의 적자赤字(갓난아이)와 비슷한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즉 갓난아이로 되돌아간다는 말은 곧 아이처럼 살아있는 생명들과 교감하고 조화로움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염덕지후자酓悳之厚者(지속적으로 도를 발현하는 마음가짐이 두터운 사람)와 같다. 도덕경에서 민民은 비문명마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엄밀히 보면 이 구절의 민民은 중衆이라고 할 수가 있다. 27장의 복중지소과復衆之所過(조화에서 멀어졌던 무리가 탐욕을 멈추고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되돌아가네)에서 언급했듯이, 중衆은 완전히 권력주체에 압도된 인간들이 아닌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무리와 도가집단에서 점차 문명화되어 권력에 빠져들어가는 무리들 모두를 가리키는데, 이 장에서는 이 글의 배경과 연결해서 보자면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다. 이로써 이 구절을 풀이한다면, '비록 권력에 빠져들어가는 무리를 보면서 모진마음이 들지만, 이 또한 연민의 마음에서 나오니 그런 무리들이 다시금 조화를 지향할 수 있도록 애쓴다면, 아직 완전히 권력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금 아이처럼 되돌아와 조화로움에서 살아가리라.'이다.
전체적인 풀이는 다음과 같다.
도道가 기준이 된 분별함을 간직하여 지혜로 이어나가면, 민民의 이로움이 점점 더 커진다네.
점점 더 불어나는 이로움을 교묘함으로 이어서 질박한 삶이 결코 구차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와 즐거움이 넘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면,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들이 점점 더 줄어들리라.
비록 권력에 빠져들어가는 무리를 보면서 모진마음이 들지만, 이 또한 연민의 마음이니 무리들이 다시금 조화를 지향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이어간다면, 여전히 완전히 권력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금 아이처럼 되돌아와 조화로움에서 살아가리라.
귀가 있어 들어도 이 말들이 어려워 눈을 부릅뜨고 따라오기에 부족하다면, 혹시 명령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한다네.
도의 관점에서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 낮은 자세로 조화를 지향하며 질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문명으로부터 지켜라!
작디작은 사심私心이지만 마땅히 바라는 바이네.
첫댓글 모르는 한자들이 여럿있어 좀 오래 걸렸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학기말에 연말이어서 학교에서 처리해야할 이러저러한 업무들로 낮시간을 정신없이 보내고 오름실에 온다. 점심도 건너 뛰었고 삶은 계란 하나와 생고구마하나로 끼니를 처리하고 나니 오랫만에 몸이 가뿐하고 좋다. 집안이 좀 따뜻해 진 후 히터를 끄니 참 고요하다. 문명과 권력시스템안의 인人들의 정신분열은 필연이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거니 오래도록 판단을 유보해 왔지만 점점 큰 확신으로 다가온다.
오랫만에 복실이를 풀어주니 어디서 저런 생명력이 숨겨져 있었는가 뛰어다니는게 엄청나다.
산기슭을 저렇게 빨리 달려 올라가는데 구덩이에 빠지거나 헛디딛는 일이 없다. 그야말로 날라가네. 네 발로 땅에 딱 붙어서 나르듯 달리는 경험이란 어떤 걸까 궁금해 진다. 분명 시각적 감각만으로 장애물을 하나하나 인식하며 달리지는 않으리라. 어릴적 동네길이 비포장인 적이 있었다. 비온날 웅덩이가 여기저기 있을때 빨리 달리며 빠지지 않는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눈으로 보면서만 달리진 않았던 느낌이 남아있다. 질박함을 추구함이 윤리적 의무감과는 상관없겠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쓸 수 있을때 조화가 무엇인지 더욱 강렬해 지리라
물론 나도 찬물로 샤워하는 것 보다는 더운물로 샤워하는게 좋다. 문명의 이기란 사실 놀라운 뇌물이고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댓가로 결핍을 상시적으로 안고 살아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점점 더 분명해 지는 듯 하다. 권력 시스템안에서 적당히 즐기며 누리며 충만함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권력 시스템을 약화하고 무력화 함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