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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8) - 도마 / 요 20:24-29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무식한 사람을 가리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참 모습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잘 몰랐습니다. 지독한 영적 무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못 박힐 때, 배반하고 도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고 신앙생활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알고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이 천양지차가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부활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을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면, 감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 믿음은 곧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은 정말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른바 예수님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참 믿음’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합당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그 이전의 그들의 삶과 그 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도 그런 것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정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무기력하고, 재미없고, 확신이 없고, 삶 속에서 실패하고, 그렇지 않은가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질적으로 성숙해지고, 살아 약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꿈도 소망도 없이 살아가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 가게 자기 자리 앞에다, 세계 지도와 세 가지 표어를 붙여놓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큰 비전을 가지라.(Great Vision) 큰 기도를 하라.(Great Pray) 큰 기대를 걸라.(Great Expect)” 그는 목사가 되기 전, 자신의 불우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구두를 수선하면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어와 불어까지 독파하며, 열방을 향한 열정을 품었습니다. 그는 1784년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2년 후 침례교 목사 모임에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침례교 목사들은 너무 열광적인 일이라 조롱했습니다. 1792년 노팅햄에서 설교 중, 역사적인 말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시오.” 1793년에 선교를 위하여 인도로 출발할 때에, 아내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여 안정된 삶을 원하고, 영국을 떠나기 싫어했습니다. 선교에 불타는 캐리는, 임신한 아내와 두 아이들을 뒤에 두고, 8살 된 아들(필릭스)와 함께 인도를 향해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 직전에, 동행인의 사정으로 수 주간 연기되고, 아내가 출산했고 함께 출항하여, 5개월 항해 후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7년 동안,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현지 언어를 스스로 익혀 성경 번역 작업을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8년이란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 번역이 거의 완성됐는데, 화재로 그만 불에 타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똑같은 길을 두 번 가는 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을 거라 확신합니다. 벌써 시작했습니다.” 8년을 투자해서, 거의 완성되었던 번역본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지만, 다시 시작했던 것입니다.
캐리는 인도 캘커타 외곽에서 사역했으나,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주택과 음식은 나쁘고, 가족은 열대병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5세의 피터는 이질에 걸리고, 아내는 정신적으로 극도로 악화되어, 거의 착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1807년 아내 도로시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야 했습니다. 1819년에 세람포대학을 창립하고, 성경을 인도의 6개 언어로 번역하고, 신약성경은 30개의 인도 방언으로 번역하고, 7권의 문법책과 3권의 사전을 편찬했습니다. 1829년에는 수 년 동안 항의한 끝에, 죽은 남편과 함께 아내를 불태우는 것과, 아이들을 죽이는 것과, 아이들의 매춘을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뛰어난 언어학자, 불굴의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1834년 73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죽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윌리엄 캐리의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장례식 때 시편 51편을 읽어주십시오.” 유언에 따라, 그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 많고 약하고 능력 없는 벌레인 나는, 당신의 긍휼하신 거룩한 손에 기대어 잠드나이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도,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던 제자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도마입니다. 도마는 두 번째 그룹 즉 B팀에서도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제자입니다. 아무래도 성향 상, 예수님 최측근이 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물론 팀장을 맡지도 않았습니다. 도마의 위치는 딱 둘째 그룹의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자기한테 어울리는 자리가 있긴 합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같은 열두제자 명단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눅 6:15절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역시 마태와 도마 순서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순서가 앞뒤로 바뀌었습니다. 마 10:3절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하지만 그 정도의 자리변화는,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 거기라고 봐야 합니다.
도마라는 이름의 뜻은 쌍둥이입니다. 도마가 별명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그가 쌍둥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쌍둥이라고 이름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를 달리 부르기도 했습니다. 디두모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인데, 요 11:16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 요 20:24절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 요 21:2절 “디두모라 하는 도마”입니다. 디두모란 뜻 역시 쌍둥이입니다. 도마가 아람어이고, 디두모가 헬라어입니다. 그럼 도마가 쌍둥이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쉽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다른 쌍둥이는 열두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혹 여자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가 일찍 죽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는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처음엔 같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중도에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도마가 더 대단합니다. 도마는 비교적 알려져 있는 제자에 속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제외한 일명 공관복음에서는, 명단 외에 활동이나 기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곧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명의 제자들과는 달리,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열두제자가 되었는지, 그가 언제 열두제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앞으로 살펴보게 될 세 번째 그룹에 속한, 작은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제자에 대해 강해하는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성경이 침묵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지침 중에 하나가,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거나 연구할 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일 것이다.” “~한 모양이다.” “~했을 수 있다.” “~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맺습니다. 그러면 꼭 “추정해 볼 때” “미루어 짐작해 볼 때”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아 그렇게 추정한다는 뜻이구나’ 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해야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라거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해야지,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수 있습니다”라거나,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도마에 대해 살펴보면서 다행인 점은, 요한복음에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그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요한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우리가 요한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도마가 등장합니다. 11:6-1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이 사랑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정에 자주 들르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꼭 찾으셨습니다. 맘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고, 맘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예수님이 부담없이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한테 가시려고 했습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 그때 제자들은 한사코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얼마 전 하마터면 돌에 맞아죽을 뻔해놓고, 벌써 그걸 잊었냐는 뜻일 것입니다. 겨우 그 자리를 피해 이곳으로 와 있는데, 예수님이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위험이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험한 불구덩이인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말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다며 깨우러 가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한시름 놓으며, “주여 잠들었으며 낫겠나이다” 했습니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자, 보다 분명하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셨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고요해졌습니다. 나사로 남매를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할 때 말렸던 것에 대해,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지만,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불쑥 한 마디 던졌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때 베드로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가 궁금합니다. 도마는 보통 때 조용한 성격입니다. 뒤에서 비판적인 성향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입을 꾹 닫고 있을 때, 도마가 뜸끔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언뜻 용기 있는 말 같아 보입니다. 결단력 있는 말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신앙적인 말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고, 이게 신앙의 핵심 아닙니까? 수제자 베드로도 침묵하고, 우레의 아들들도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도마가 나선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도 도마를 다시 봤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예수님이 돌에 맞을 죽을 거라고 비관적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러 가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와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가 각성하면,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마 같은 성향의 사람은, 뒤에서 궁시렁거립니다. 어디 가기로 결정이 났는데도, ‘더 좋은 데가 많은데, 하필 거기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뒤에서 뭐라 뭐라고 합니다. 그런데 출발하는 당일에 보면, 가장 먼저 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향상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말을, 예수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빨리 유대로 가셨으면, 나사로를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시다가 나사로가 죽었으니, 결국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방치한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왕 나사로가 죽었으니, 우리도 가서 같이 죽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을, 새번역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새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공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개역개정에서의 “주와”가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그와”로 바뀌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나사로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가 나사로를 가리킨다면, 도마의 말은 용기 있는 말보다는, 자조적인 말로 보입니다. 종합해 보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말은, 용기 있는 말로 볼 수도 있고, 자조석인 말로 봐도 무방합니다.
도마의 별명은 다양합니다. ‘의심 많은 제자’ 외에도, ‘회의주의자, 비관주의자’ 등입니다.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이들도 매우 신중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이들보다 한 수 위로 보입니다. 일단 의심하고 봅니다. 회의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봅니다. 도마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신기합니다. 어떻게 의심을 품어보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도마에게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자신이 주와 선생으로서 본을 보인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만찬을 하던 중에, 제자 중에서 자신을 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눈치 빠른 베드로가 묻고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그리고 장담도 합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시며, 다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4:1-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조금 안정을 되찾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이 그에 대한 답을 하셨습니다. 4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 이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예수님의 말씀까지 듣고 있던, 도마가 물었습니다. 5절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4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4절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지 않느냐?”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답답한 심정을 내비치며 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사실 얼마나 답답할 노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이 어디로 가신다면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려주지 않고, 지금은 따라올 수 없고 후에는 따라오게 될 거라는, 모호한 답변이 말이 됩니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해놓고, 그렇게 애매한 답을 하면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도마의 질문은 당연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때 주님의 답이 이거였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은 명쾌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냐고?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그 길을 모르겠다고? 내가 바로 그 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우리가 다 알고 인생을 삽니까? 우리가 다 알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냥 예수님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증거를 듣고도, 도무지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 없는 제자들을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요 20:24-29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며 좋아하는데, 나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사실 부활은 그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어쩌면 도마가 정상입니다. 도마가 보인 그런 반응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의심이라고 봐야 합니다. 증거의 확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는 마침내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위해서 찾아오심으로 확실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확인을 요구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감동하여 마치 준비를 한 듯, 대단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영~ 별로였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대단한 신앙고백을 한 것에 비하면, 특별한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 후 받았던 칭찬에 비하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도 그는 답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고,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확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답입니다. 예수님이 답이라고 믿는 사람만 기도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이 답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멀리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마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고 있지만, 교회사가인 교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도마가 페르시아를 선교 사역지로 분배 받아 페르시아에서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열두사도가 제비뽑기로 전도장소를 정했는데, 도마에게 인도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험하고 먼 길인 인도를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서원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교부 제롬(히에로니무스)의 ‘신앙인의 전기’에 의하면, 도마는 페르시아를 떠나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인도로 내려와 선교했고, 지금은 첸나이라고 불리는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전도하다가, 브라만교도들의 창에 찔러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 외치기를 ‘나는 주님을 예배합니다. 주님이여! 주님을 예배합니다.’ 도마의 십자가는 좀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십자가가 인도의 국화인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인도의 사도임을 확인해 줍니다. 도마가 우리 나라에 왔다간 흔적이 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마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점점 동편으로 옮겨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우리나라에도 신라시대 때 복음을 전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경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교가 기독교의 흔적이라고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북 영주에 머리 잘린 도마 상이 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확인할 기록은 없습니다.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근처에 도마라는 이름의 작은 산이 있는데, 그곳이 도마가 순교한 장소로 전해지고, 1504년 포루트갈 사람들에 의해 도마의 무덤 위에 성 도마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 정면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주를 예배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정말이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걸, 최고의 복으로 여여야 합니다. 제자 도마를 통하여 믿음의 솔직함을 살피고, 성경과 신앙의 경험을 통해 확증된 진리들을 붙들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믿음 없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기만 한 제 심령에 오시옵소서. 그래서 저로 주님의 상처를 보게 하시고, 죽기까지 저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돌 같은 심령이 녹아지고, 얼음 같은 제 마음이 물처럼 풀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영광스런 몸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영접해 주실 것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