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맨발 걷기 / 황선영
큰딸은 여섯 시가 채 되기 전에 일어난다. 스스로 누룽지에 끓는 물을 부어서 먹고 씻고 단장하여, 일곱 시 좀 넘으면 집을 나선다. 전라남도에서 제일 부지런한 6학년이 아닐까 싶다.
중학생 아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눈을 한 번 끔벅한다. 버스시간이 늘 간당간당하다. 제발 태워다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학생 버스비는 백 원인데. 그래도 이뻐서 모셔다 준다. 사실 이 시간 라디오가 재밌는 게 많다. 또 차에서 들어야 제맛이고. 갓바위 쪽으로 가니, 자연사 박물관 지나 거리 한쪽에 무화과를 판다. 오, 재래종이다. 사고 싶은데 출근 시간이라 뒤에 차는 많고 세우는 데가 협소하다. 내 운전 실력으로는 어림없다. 목포는 내가 태어난 곳인데, 살면서 좋은 점은 무화과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밖에 없다.
막내는 오늘 장성문화예술회관에 간다. 치매의 날 기념행사가 있는데 도립어린이국악단에서 순서를 맡았다. 아홉 시쯤 집을 나와 남도소리울림터에 내려주었다. 이제 앞으로 서너 시간은 내 시간이다. 걷자.
황성훈 선생님 글을 보고 ‘목포맨발걷기’를 검색해 뒀었다. 집 가까이에 있었는데 여태 몰랐다. 거기로 가야겠다. 신호에 서니, 은행 볼일이 생각난다. 집에 있는 현금을 남편 계좌로 보내줘야 한다. 이 사람은 이쪽으로는 까막눈이다. 입출금을 아직도 은행 직원한테 가니 말이다.
돈을 넣고 나오니 비가 떨어진다. 그냥 집으로 갈까? 아침 먹은 것도 못 치웠고 빨래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인데. 가지 못할 이유가 이렇게 곧장 생각난다. 에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산 쓰지 뭐. 내비에 '초당산공원'을 찍었다. 주차를 좀 멀찍이 하고 걸었다. 비도 맞을 수 있을 만큼 온다. 공원 초입부터 맨발로 걸을 수 있게 흙이 깔려있다. 궂은 날인데도 사람이 제법 많다. 신을 벗고 발을 땅에 댔다. 이 감촉 뭐야? 흙이 반죽이 되어, 똥 밟은 것 같다. 이거이거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만졌던 찰흙이구나. 문방구에서 사기도 했지만, 학교 옆 산에서 파기도 했다. 차갑고 미끄덩한 느낌과 옛날 생각에 웃음이 난다. 와, 개운해. 예상 못 한 짜릿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저 쪽에 산으로 오르는 입구가 보인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다. 발 씻는 곳인가 보다. 가까이 닿으니, 큰 말소리와 깔깔 거리는 소리가 낯익다. 교회 집사님들이다. 바로 뒤돌아섰다. 사실 나는 인사가 어렵다. 가서 반갑게 악수하고 몇 마디 나누고 갈 길 가면 되는데 잘 안 된다. 아주 활달한 사람들만 모여 있을 때는 더 그렇다. 몇 마디만 나눠도 기가 다 빠지는 것 같다. 순간 받게 될 집중도 부담스럽다.
집에 가야겠다. 주차된 자리에서 바로 우회전해, 조금 가니 초당산 뒤편이다. 거기도 입구가 있다. 아까 상쾌했던 기분이 자꾸 생각난다. 발을 씻고 있었던 것 같으니 아마 가셨겠지. 다시 올랐다. 신을 놓을 수 있게 신발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단단한 흙길이 물에 젖어 미끌미끌하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미끄러지면 그닥 아프진 않을 것 같은데 엄청 쪽팔리겠지. 아까와 같은 느낌이 몸을 다시 휩싼다. 언뜻언뜻 밟히는 자갈도 지압받는 것처럼 시원하다.
나는 엿듣는 게 취미다. 카페에 앉아서도 눈은 앞에 말하는 사람을 보고 귀는 옆 테이블에 둔다. 내 앞에 남자 어르신 두 분이다. 물기 없이 메마른 앙상한 발과 종아리를 가지셨다. 걸으시는 것이 위태위태하다. 어디로 전화를 건다. "아야, 오지 말고 거 밑에 있어. 자빠지믄 디지겄다." 옆에 분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관절 다치면 얼마나 고생인지 큰소리로 설명한다. 내 엉덩이 뼈가 부러지는 상상을 해봤다. 뒷시중은 누가 들려나? 새끼들 키울 때는 똥도 이뻐, 무엇이 들었나 한참을 들여 봤는데. 지구상에 부모 배설물까지 사랑해줄 자식은 없을테지. 조심히 걸어야겠다. 더 가니 근육 없이 매끈하고 살결이 뽀얀 발과 다리가 나왔다. 동그랗게 배가 나온 아저씨다. 얼굴을 쓱 올려다보니 미간에 인상을 팍 쓰고 있다. 옆에 아내인 듯한 아주머니가 말한다. "조금 더 걸으면 익숙해질 거예요." 남자는 한 발 디딜 때마다 '아이씨'를 뱉는다.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어릴 적 우리 동네는 그 지역에서도 도로포장이 가장 늦었다. 마당도 흙마당이었고. 늘 발에 흙과 모래를 묻히고 다녔다. 그 채로 방에 들어갔다, 엄마한테 등짝을 후려 맞은 기억이 난다. "발 씻고 와!"
간만에 목포에서 즐겁다.
첫댓글 아이씨에 빵 터졌어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저희 바깥양반이 혼잣말로 씨발을 잘 해요.
하하하하하하.
저는 요즘 발목에 염증이 생겨 맨발 걷기는 힘들어요. 지난 번에 유달산 둘레길을 맨발로 걸었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 아프요?" 하대요. 시간 나면 같이 걸어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선생님.
글쓰기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시는 선생님이 아는 사람을 만나 돌아서다니요. 그런데 우리와는 놀아 주니 나를 좋아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우쭐해지는데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중학교 때 모내기 봉사하러 가서 논에 들어갔던 그 감촉이 느껴지네요.
좋아합니다.
와! 정말 재밌게 잘 쓰시네요. 방송 작가하셨으면 성공하셨을 것 같아요.
방송 작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이라도 도전할랍니다. 하하하.
맨발 걷기, 늘 생각은 하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글을 통해 대리만족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 저도 지금까지 네 번 갔어요. 하하. 고맙습니다.
맨발걷기 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 이야기만으로도 이런 재밌는 글이 나오네요. 앙상한 발과 종아리의 아저씨 말이 깊이 와 닿습니다. 히히.
와우,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맨발걷기를 많이들 하시네요. 걷기하는 곳을 여러 곳 보았지만 아직 해보지 못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 팬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만의 생생한 표현 덕분에 함께 걷는 느낌으로 읽었어요. 수줍음 많아서 돌아서다니요. 상상이 안 가는데요. 솔직한 표현을 거침없이 하시는 분인데, 하하하.
제게 그런 면도 있답니다. 선생님. 저 사실 엄청 자제하면서 쓰는데, 거침없다니요. 더 자중해야겠네요. 하하.
잘 지냅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혼자 누룽지를 끓여 먹고 학교에 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6학년 따님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바로 실천에 옮기는 엄마 닮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봅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요래 생겼습니다. 아빠 닮았어요.
'글이란 이렇게 맛깔나게 써야하는구나' 라고
선생님 글 읽으며 많이 배웁니다. 글쓰기 고급인력
이 초야에 묻혀 살다니요? 재능이 아깝습니다.
오메,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