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변 / 봄바다
여자들은 각자 집착하는 사물이 다르다. 내 관심은 아직 가방에까지 이르진 못 했다. 젊은 시절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사고 싶었던 옷을 맘대로 사지 못했던 나는 백화점, 양장점, 온라인 가리지 않고 옷을 사대서 남편에게 자주 핀잔을 듣는다. “그렇게 옷을 샀으면 때와 장소에 맞게 갖춰 입기라도 하면 말을 안 해. 사서 쟁여두기만 하고 나갈 땐 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처럼 집에 있는 옷 대강 걸치고 나가려면서 뭘라 그리 사대는지.”라며 혀를 끌끌 찬다. 그의 지적이 너무나 정확해 화를 낼 수도 없다. 살 때만 며칠 기쁘고 말 뿐, 게으르고 성질 급한 나는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시간이고 장소고 상관치 않고 대충 눈에 보이는 편한 옷을 걸치고 만다. 이러니 남편은 나를 거의 환자 취급한다.
내 친구 ㅈ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련미가 넘친다. 이런 그녀가 가장 매달리는 건 가방이다. 가진 것 중 명품이 여럿이다. 가끔 모임에 돌려 들고 와 “너네들 이 가방 좀 봐 주라. 이건 00제품이야.”라며 탁자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모인 친구들 돌아가며 “요게 그리 비싸다는 그거구나?”라며 너도나도 한 번씩 팔을 접혀 가방을 끼고 빙그르르 한 바퀴씩 돈다. 명품 값하느라 무거운지 무게 꽤나 나간다. 내 기준에 가방은 필요한 걸 넣고도 가볍고, 아무 데나 두어도 별걱정 없는 거다. 하지만 몇 백만 원을 들여 샀다는 그건 들어있는 게 별로 없는 데도 무거운 게 걸린다. 이런 게 꼭 이렇게 비싸야만 하는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방 자부심이 있는 친구가 보물을 아끼듯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데, 내 생각을 말하며 분위기를 깰 수는 없다.
내게도 교장 승진할 때 동서가 선물해 준 가방이 있긴 한데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몇 날을 고민해서 책이 들어갈 만큼의 크기를 골라서 선물했다는 그녀의 성의를 봐서 모임에 들고 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와 “역시 울 형님 달라 보이네. 옷 갖춰 입고 그 가방까지 들고 있으니 교장 포스 완벽하네.”라며 먼지도 없는 가방을 살살 털어준다. 내 성정을 아는 동서는 “형님, 앞으로는 제발 운동화 벗고, 옷에 맞춰 구두 신고, 이제 이 가방도 꼭 들고 다니세요.”라며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출장 가는 길에 몇 번 들고 갔지만 내가 마치 가방의 노예라도 된 듯, 내 자리를 찾는 것보다 그걸 놓을 자리 먼저 찾는 내가 싫었다. 건망증이 심하니 따로 두었다가는 놓고 오는 일을 몇 번 겪고는 딱 여기까지다 싶어 다시 상자에 넣었다. 최근 딸이 명품가방 타령하기에 다시 꺼냈더니 할머니들이나 들고 다닐 가방을 어떻게 들고 다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서 다시 상자로 돌아갔다.
하던 대로 해야지, 상놈이 양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작은 가방도 싫어서 아들이 사은품으로 받아 온 까만 천으로 된 작은 가방을 손목에 끼고 다닌다. 볼펜과 수첩, 차 열쇠, 핸드폰 하나 들어가는 크기니 거의 내 몸의 한 부분인 듯하다. 책상에 올려놓으면 되니 잃어버릴 일도 없다. 모임에 들고 갔더니 후배가 “언니, 이건 아니네. 우리 딸 장난감 상자에 넣어두면 되겠구만, 교장은 학교를 상징하는 어른인데 격을 좀 갖춰야지!”라며 내 가방에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하긴 모임에 교육장이 두 명이나 되니 이런 내가 오히려 눈에 띈다. 후배의 말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러니까, 사람이 은근해서 좀 참기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급해지는 게 문제다.”라고 둘러댔더니 “대단한 울 언니, 못 말려요. 못 말려.”라며 고개를 흔든다.
좀 더 빨리 일어나 머리도 다듬고 옷에 맞춰 가방도 들고 신발도 신고 가면 좋으련만, 게으른 나는 육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격을 갖추지 못하고 산다. 습관을 고치는 건 정말 어렵다. “이제 고칠 수 없으니 그대로 사세요.”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위안 삼아 앞으로도 쭉 그리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신변의 큰 변화가 없는 한.
첫댓글 “이제 고칠 수 없으니 그대로 사세요.” 긍께요, 교수님의 명언 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고치는 게 더 힘들어요. 그냥 생긴대로 살아야지요.
와우, 이번에는 빠르십니다.
명품백이 잠자고 있다니 아쉽네요. 하하!
내 맘에 들고 쓰기 편한 게 명품이지요.
저도 적당히 커서 아무 거나 막 넣고 다니는 가방만 가지고 다니게 돼요.
이번에 글을 빨리 쓰시는 걸 보니, 편한 것만 찾는 버릇도 고치서 못 알아보게 하고 나타나시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빨리 올리셨네요.
가방은 못 봤지만 볼 때마다 어울리게 입으셔서 명품인줄 알았습니다.하하.
선생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반전 매력을 가지셨네요!
교장선생님은 인품이 명품입니다.
황성훈 선생님 말에 동의합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게으르다는 말 자주 들어서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저랑 비슷해요. 선배님!
멋쟁이는 옷차림에 어울리게 가방과 신발까지 깔마춤한다지요?
저는 당당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글을 올리시다뇨?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습니다.
가끔 제 정신 아닐 때도 있다오! 호호호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이가 드니 편한 것이 좋더군요. 무거운 것 보다 가볍고 쓰기 편한 것이 내 나름의 명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