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49 – 목숨을 거는 것과 인내하는 것은 다릅니다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3. 질문 : 경행을 할 때 반드시 발만 알아차려야 하는지요? 몸의 다른 부분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답변 : 경행을 할 때 발 외에 느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대상이 너무 넓다. 머리나 몸이 있지만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발을 알아차려야 한다. 발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들어서 앞으로 놓음’ ‘들어서 앞으로 놓음’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천천히 세 번씩 해 보아라.
발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보아라. 마치 염주를 훑듯이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되 발의 모양을 볼 필요 없이 발의 움직임을 보아라. 염주를 한 알 한 알 만지듯이 선명하게 발의 움직임의 전 동작으로 선명하게 보도록 하라.
< 참고 >
경행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집중을 위한 방편입니다. 움직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큰 움직임이 발입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광범위할 때가 있지만 집중을 위해서는 한정된 부분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경행을 할 때 필요에 따라 종아리나 관절이나 다른 부분을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산을 오르거나 할 때 호흡이 거칠면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알아차릴 대상은 발에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광범위하면 집중력이 분산됩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겨냥하기 어려울 때 명칭을 붙여서 대상에 밀착시키도록 하는 것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수행자의 근기를 돕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방편이라고 적절하지 못하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명칭도 적절한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야도께서 수행을 지도할 때 명칭을 두 번씩 반복합니다. 가령 볼 때 ‘봄’ ‘봄’을 한다거나 망상을 할 때 ‘망상함’ ‘망상함’을 하도록 합니다. 이때 스승께서 명칭을 붙이는 횟수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중을 위해서 명칭을 붙이되 집중이 되는 적절한 순간에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명칭이 오히려 집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행을 할 때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세 번하라고 하는 것은 명칭을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명칭을 더 오래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 명칭을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때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수행자가 있고 수행자의 근기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칭은 집중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이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수행자 스스로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하시 명상원의 경행방법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합니다. 처음에는 ‘오른발’ ‘왼발’을 하며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다음에 조금 집중력이 생기면 ‘들어서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더 집중이 되면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발의 움직임을 하나로, 둘로, 셋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런 과정은 모두 집중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방법 외에 수행자가 더 세분화해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가령 ‘들으려는 의도’ ‘들어서’ ‘앞으로 밀고’ ‘놓음’ ‘누르고’ 이렇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놓음’과 ‘누르고’는 발을 놓는 동작과 다시 발을 누르는 동작까지 세분화해서 알아차리는 과정입니다.
한국명상원에서는 경행을 할 때 명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을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움직이려는 의도와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의도와 느낌은 미세해서 명칭이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을 들어올리는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다음에 발을 내려놓는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다음에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집중이 되면 서려는 의도, 돌려는 의도, 가려는 의도와 발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알아차립니다. 이러한 경행방법은 대념처경에 근거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근기를 위해 나누어서 알아차리도록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을 보게 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승의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양을 보지 말고 움직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수행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모양은 관념적인 대상으로 사마타 수행입니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으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때 움직임을 보라는 것은 모양이 아닌 움직임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뜻입니다. 물론 모양을 볼 때도 있지만 집중이 되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정신세계는 저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스승은 수행자의 근기에 맞추어서 지도를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것일 때도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해서 오해를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반드시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수행은 마음을 계발하는 행위라서 가보지 않은 정신세계를 새로 탐험하는 과정이라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수행자가 처음에는 가장 쉽게 ‘본다’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집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느낀다’를 사용합니다. 그런 뒤에 더 집중이 되면 ‘안다’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수행을 합니다. 본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모양을 대상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습관적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또 실제로 눈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상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눈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때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실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면 모양이 없어지고 실재하는 법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런 뒤에 대상도 중요하지 않고, 대상의 위치도 중요하지 않은 단지 알기만 하는 ‘안다’를 사용합니다. 안다는 것은 마음으로 아는 것으로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런 용어의 선택 하나가 수행의 단계적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먼저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성숙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