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세계》여름호 집중소시집 / 변현상
왕벚나무 꽃 외 4편
평생
슬하 없이
하얀 옷 즐기시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신랑 여읜 당숙모님
하르르
하르르 펄 펄
하르르르
떠나시네
입춘 2
누군가
뚜벅뚜벅
지하실로 들어갔다
겨우내 보일러에 숨겨놓은 초록빛 꿈
큰 손이
멍키스패너 들고
볼트 슬슬
풀고 있다
반달
밤길을 택하셨네
남의 이목 있으신지
코트 깃을 세우시고 얼굴 반은 숨기셨네
묘 있는
능선 쪽으로
형수님 홀로 가시네!
이총(耳塚)에서
팬티 잃고 냅다 뛰던 훈련소 선착순 같은
아버지 대신 참석한 민방위 훈련 같은
어색함 몹쓸 분위기 삽으로 파 뒤엎고 싶은
노량 일몰
어서 빨리 방패 세워 내죽음을 가리 거라!
뜨거운 충정이 아직 펄펄 끓는 바다
시뻘건
피비린내가
무장무장
번져가는…
가열찬 상흔의 에스프리
박 희 정
1.
2009년 신춘문예 2관왕으로 야심차게 시조시단에 나온 변현상 시인의 오늘은 여전히 생경한 곳을 애둘러놓는다. 그는“죽어 있는 글보다 살아 있는 글, 초겨울날 젖은 장갑을 모닥불에 말리는 인부들의 때 묻은 거룩한 손길 같은, 짧고 굵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나 자신만의 오롯한 향기가 나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고 수상소감에 밝혔다. 현재 그는 그러한 노정 위에서 시조를 쓰고 있다.
그의 등단작 「환한 휴식」(2009년 농민신문)은 “낡은 장화”를 매개체로 “오로지 주인을 위해” 반듯하게 살아온 인고의 시간 앞에 별과 달빛이 다독여주는 휴식의 공간을 밀도 있게 표현했다. 「우수 무렵」(2009년 국제신문)은 을숙도에서 맞는 2월 우수 무렵의 형상을 명지바람 방향에 따라 따뜻하게 형상화했다. 구체적 대상에 의미구도를 놓는 발상이 또렷하다. 변현상은 꾸준히 작품 발표를 하면서 신예시인으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변현상의 시안詩眼은 생뚱한 것 같으면서도 신선하다. 일상인 것 같으면서도 개성적이다. 그동안 주목받아온 「벌교」, 「해동解凍」, 「수평선」, 「백마넌에 오마넌」,「군사설」에 나타난 기교와 표현은 첨예한 발상과 자유로운 행갈이, 문장부호의 활용 등 활달하다. 특히 단시조에 나타나는 상징과 비유가 압권이다. “저 갯벌이 종교다”(「벌교」) , “참 길다 퍼런 청렴이 매오로시 당당하다” (「수평선」)며 바다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풀어놓는다. 그런가 하면 「해동解凍」행갈이에 나타난 형식의 자유로움은 내용의 긴장까지 아우르고 있다. 북쪽 물과 남쪽 물의 얼었다 녹는 과정을 “흘레붙고”, “용을 쓰네”, “섞네/가네”라며 맞받아치며 통일을 꿈꾼다. 엄숙하고 긴장해야 할 통일에 대한 기대가 재담을 풀어놓듯 익살스럽다. 「백마넌에 오마넌」은 “대낮에도 외등을 켠” 동네의 전봇대에 써놓음직한 “-세 잇 씀, 백 마 넌 에 오 마 넌-” 리얼리티에 묻어나는 화자의 혜안이 긴실하다. 「군사설」에 묻어나는 청장년의 걸쭉한 입담은 이 시대의 현주소일 것이다. “사내들 손바닥에선/삼합(三合)이 또 이루어진다”며 세태를 탁주잔과 함께 질겅질겅 씹어뱉는다. 대외 관계, 사회적 문제, 북한핵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내의 손바닥에서는 이런저런 형국이 삼합을 이룬다. 이처럼 변현상 시인의 시조로 향하는 장강長江의 힘이 그가 살고 있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다.
2.
이번 《시조세계》집중소시집 신작은 작심하고 단시조 5편을 발표한 것 같다. 단시조에 대한 평가와 기대가 높아지는 최근의 흐름이기도 하고 화자의 의식이기도 하겠다. 「왕벚나무 꽃」,「입춘 2」,「반달」,「이총耳塚에서」,「노량 일몰」에 나타난 죽음의 현상은 가까이로는 아버지, 형, 당숙모에서 넓게는 조선인,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다.
평생
슬하 없이
하얀 옷 즐기시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신랑 여읜 당숙모님
하르르
하르르 펄 펄
하르르르
떠나시네
-「왕벚나무 꽃」전문
벚나무의 종류에는 벚나무, 개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섬벚나무, 올벚나무 등이 있으나 일반인들이 구별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벚나무는 왕벚나무와 비교할 때 꽃자루와 잎과 암술대에 털이 없다고 한다. 일본의 국화는 왕벚나무이지만 자생군락지가 없고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의 왕벚나무가 1912년 독일의 식물학자에 의해 정식 학명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벚나무는 흔히 가로수나 정원수로 자라는 벚나무가 그 대상일 것이다. 화자는 당숙모님의 죽음을 왕벚나무의 낙화로 치환했다. 평생토록 ‘신랑’만 바라 사셨던 당숙모님은 “하르르 펄펄” 나는 사월 벚꽃 따라 떠나시고 만다. “백마고지에서 신랑 여읜” 그녀의 일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힘들고 아팠겠지만 화자는 “하르르”란 의태어의 반복으로 가볍게 설정했다. 당숙모의 죽음이 하얗게 승천하는 한 마리 새처럼 환하다.
누군가
뚜벅뚜벅
지하실로 들어갔다
겨우내 보일러에 숨겨놓은 초록빛 꿈
큰 손이
멍키 스패너 들고
볼트 슬슬
풀고 있다
-「입춘 2」전문
봄이 ‘멍키 스패너monkey spanner’ 아래서 슬슬 풀리고 있음이 일순 즐겁다. “겨우내 보일러에 숨겨놓은 초록빛 꿈”을 꺼내는 화자의 발상이 신선하다. 삼동三冬 따끈따끈 보듬어놓은 ‘초록빛 꿈’ 속에 들어있을 입춘 기운이 “볼트 슬슬”을 통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누군가/뚜벅뚜벅”의 실체와 “큰 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좀체 풀리지 않을 사회적 과제이거나, 여태껏 풀리지 않은 시대적 궤적일 경우「입춘 2」의 상징은 이 시대의 경구警句라 할 수 있다. “지하실”, “숨겨놓은”에서 보여주는 겨울 단상이 “초록빛 꿈”을 안고 멍키 스패너를 통해 부활의 입춘을 맞이하고 있다.
밤길을 택하셨네
남의 이목 있으신지
코트 깃을 세우시고 얼굴 반은 숨기셨네
묘 있는
능선 쪽으로
형수님 홀로 가시네!
-「반달」전문
편편찮은 대상을 향한 화자의 시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왜 ‘밤길’이어야 하고 “남의 이목”을 살펴야하는지, “얼굴 반은 숨”겨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내신 형, 그 형을 보듬느라 세상에 얼굴 한번 크게 내밀지 못하고 사셨을 형수님은 ‘밤길’을 택한다. 역사적 알레고리로 시대적 아픔을 끌안고 살아오신 형수님의 현실을 반쯤 보여주고 있다. 속내가 궁금하지만 관찰자 입장으로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며 반달이 그녀의 길을 밝혀준다. 상현달에서 보름달이 되기까지, 보름달에서 하현달이 되기까지 ‘밝음’보다는 ‘어둠’을, ‘해’보다는 ‘달’을 찾은 형수님의 딱한 현실이 가뭇하다.
팬티 잃고 냅다 뛰던 훈련소 선착순 같은
아버지 대신 참석한 민방위 훈련 같은
어색함 몹쓸 분위기 삽으로 파 뒤엎고 싶은
-「이총耳塚에서」전문
일본 교토시 동부의 시치조 지역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귀무덤이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전공戰功의 표식으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매장한 곳으로 희생된 조선 인의 수는 12만 6000여 명에 이르며 조선인의 원혼을 누르기 위해 조성된 무덤이라는 점에서 섬뜩하다. 변현상이 「이총耳塚에서」느꼈을 격정이 행간마다 쭈뼛쭈뼛하다. “훈련소”와 “민방위”의 대상이 된 대한의 아들들이 겪었을 고초와 희생, 그들의 코와 귀를 모아 무덤으로 세워 그 혼까지 윽박지르고자한 일본의 만행을 보는 화자의 눈빛이 서늘하다. “삽으로 파 뒤엎”고 싶은 심정이 어디 화자뿐이겠는가.
어서 빨리 방패 세워 내죽음을 가리 거라!
뜨거운 충정이 아직 펄펄 끓는 바다
시뻘건
피비린내가
무장무장
번져가는…
-「노량 일몰」전문
노량해전은 1598(선조 31)년 11월 29일 노량 해상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으로 승리와 함께 이순신이 전사한 역사적 해전이다.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이순신은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절체절명의 유언은 후대 사람들의 좌표가 되었다. 아마 화자는 노량 앞바다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이순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장무장/번져가는…”듯한 일몰의 바다 앞에서 “시뻘건/피비린내가” 역류하듯 태양의 충정은 뜨겁다. 이순신의 유언과 애국심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비장한 일몰을 읽는 화자의 눈빛도 처연했으리.
3.
변현상의 이번 신작에 나타나는 죽음의 시학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 사실성을 가지며 그들의 죽음을 전쟁의 알레고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백마고지에서 쓸쓸히 죽어간 남편을 향한 망부의 노래, 형을 만나러 산소로 향하는 형수의 밤길, 조선인의 죽음을 억누르는 이총, 이순신의 장렬한 전사에 이르기까지 변현상이 보여주는 죽음이 가열차다. 또한 벚꽃의 흰 이미지. 큰 손이 풀고 있는 초록빛 꿈, 무채색 반달, 검은 무덤, 붉은 바다 등 작품에 나타난 색채는 현란하다. 또한 시적 공간이 “나무 아래/지하실/산소/일본 묘소/바다” 등 구체적이라 더욱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역사적, 개인적 정황에 대한 회고를 처절하게 읽을 수 있다. 이번 변현상의 신작을 4월에 읽는 감회가 결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청명한식날(4월 4-5일), 4․19 혁명기념일(4월 19일), 충무공탄신일(4월 28일)이 있는 애도의 달에 다시 새겨보며 역사적 상흔과 가족의 현실을 조명한다. 문득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한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박희정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오늘의시조시인상 (2010), 중 앙시조대상 신인상(2011), 청마문학상 신인상(2012), 고대문우상(2013) 수상, 시조집으로 『길은 다시 반전이다』, 『들꽃사전』, 《나래시조》편집장
첫댓글 봄날 여러 죽음들을 생각한 변시인의 허한 마음을 쇠주 한 잔과 막장 듬뿍 찍은 기장 멸치회로 달래주고 싶은데 서울이 너무 멀다 부산이 너무 멀다
우리 문경에서 조우합시다. 초장가지고...
초장만 가지고 되나요, 중장,
장도 있어야지요. 
중장은 가는 길에 종장은 만나서 마련하면 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