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과 배나무
승려 보양의 전기에는 고향과 족보가 실리지 않았으나 청도군에 보고한된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천복 8년(943) 계묘 정월 어느 날에 청도군의 계리 심사 순영과 대내말 수문 등이 작성한 공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운문산 선원의 장생 표시에 의하면 남쪽은 아니점이며 동쪽은 가서현이다. 절의 간부 승려 중 주된 사람은 보양화상이요, 선원의 주인은 현회장로이며, 선원의 일은 현량상좌가 담당하고 직세는 신원선사이다.
또 개운 3년 병오(946)의 운문산 선원의 장생표탑에 관한 공문 한 통에는 장생이 11개 이니 아니점, 가서현, 무현, 서북매현, 북저족문 등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또 경인년(1230) 진양부의 공문에는 5도 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의 사원이 창건된 연월과 모양을 자세히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서원 직무인 동경 장서기 이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했다고 했다.
정릉 6년(1161) 신사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청도군 전 부호장 어모부위의 관직에 있던 이칙정의 집에 있던 옛 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상호장 벼슬을 지낸 김양신과 호장 벼슬을 지낸 민육, 호장동정인 윤응전, 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인 용성 등의 말이 실렸다. 이때 태수 이사로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가 89세 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70세 이상이나 용성만 60세 이상이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절로서 작갑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지만 후삼국이 싸우는 동안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다섯 갑의 절이 모두 무너져 없어지니, 다섯 갑의 절 기둥을 모두 모아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이 절의 시조 되는 스님인 지식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받아 돌아오는 길에 서해 바다 가운데에서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고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했다. 겸하여 그의 아들 이목도 바치며 그를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삼국이 어지럽고 난리가 일어나 아직은 불법에 귀의하는 임금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짓고 거기에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몇 해가 안되어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현명한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요라 했다.
용왕이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 이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그에게 주고는 사라졌다.
이에 보양법사가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어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흔적이 없었다. 다시 올라가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서해의 용왕이 작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나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자 과연 옛날의 벽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서 높이 쌓으니 탑이 완성되었는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이곳이 이전의 절터임을 깨닫고 절을 세우고는 거기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절의 이름을 작갑사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보양법사가 여기 와서 절을 짓고 머무른다는 말을 3듣고 즉시 다섯 갑의 전체 전답 500결을 이 절에 바쳤다. 그리고 청태 4년 정유(937)에 운문선사라는 현판을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런 음덕을 받들게 하였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남몰래 도왔다. 갑자기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말라서 타 죽으므로 보양법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한 고을이 흡족하였다. 천제가 그의 소임이 아닌 일을 했다 하여 이목을 죽이려하자 이목이 황급히 법사에게 알렸다. 법사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자 조금 뒤에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니 사자는 그곳에 벼락을 친 후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배나무가 시들고 부러졌으나 용이 어루만지자 곧 살아났다. 그 나무가 근년에 땅에 쓰러지니 어떤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는 방망이를 만들어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군에 있는 봉성사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산적들이 견성에 모여 교만을 부리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도착하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었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대개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은 지키고 뒤는 잊어버리니 마땅히 낮에 그 뒤를 쳐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태조가 그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가 법사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주변 고을에서 세금으로 받는 벼 50석을 주어 예불하는데 쓰게 했다. 이로써 절에 두 분 성인의 초상을 모셨다. 이런 연유로 절 이름을 봉성사라 했다. 그 뒤에 법사는 작갑사로 옮겨서 절을 크게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리지 않았으나 세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석굴사의 비허사와 형제가 되었다. 봉성사, 석굴사, 운문사의 세 절이 연접된 봉우리에 늘어서 있으므로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수이전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였다. 견성의 사실을 비허전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데 해동고승전을 지은 사람이 이에 따라 글을 보태거나 꾸며서 보양의 전기를 없애버려 뒷날 사람들이 의심하거나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 일인가?
첫댓글 청도 운문사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보는 것도 신라 불교사에 획기적인 일이 될 듯하다.
이목을 소리나게 말하면 이무기가 되니...........ㅎㅎ
보양선사의 지혜가 감탄스럽다. 하늘을 속이다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