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기슭에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에 속하는 구룡사(龜龍寺)가 위치하고 있다.
아홉 마리 용이 살던 곳, 九龍寺가 아닌 龜龍寺(구룡사)강원도 원주 치악산은 적악산으로, 상원사의 꿩(또는 까치)의 보은전설에 연유하여 '꿩 치(雉)'자를 써서 치악산(雉岳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산꾼들이 “치악산에 등산 왔다가 치를 떨고 간다"는 말을 흔히 할 정도로 치악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험한 악산으로 분류되는 산이다.
668년(문무왕 8) 의상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의상과 아홉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 곳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치악산을 향해 가던 중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렀고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워 이곳은 절을 세울만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은 의상이 움직였다.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 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조각 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눈이 멀어 함께 도망가지 못하고 근처의 못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룡사(九龍寺)라 했고 한다.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지만,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 글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룡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수행도량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의 맥을 끊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두동강 내어 맥을 끊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때 어느 날 도승 한 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의 운을 지켜 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쓰길 권합니다” 라고 해서 그때부터 “龜龍寺(구룡사)”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구룡사 매표소를 지나면 좌측 비탈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 황장목 즉 금강송)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석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자료로 중요한 유물이다.
구룡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부도군이다. 이 부도는 구룡사에서 수행하셨던 스님들이 입적하시면 다비 후 이곳에 부도탑을 세워 모시는데, 쉽게 말하면 스님들의 공동묘지이다.
구룡교의 양쪽 끝에 세워진 4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용두(龍頭) 모습이다. 용의 아홉 아들 중 범공(혹은 공하)라는 용은 특히 물을 좋아해서 다리의 상판 난간이나 다리 기둥, 혹은 홍예교 아래 중앙의 천장에 붙어 있기도 한다.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들을 차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용이다.
국사단(局司壇). 사찰의 가람신(수호신)을 모신 전각
구룡사(九龍寺)에서 구룡사(龜龍寺)로 절 이름이 바뀌게 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거북바위의 모습이다.
사천왕문 향좌측에 모셔진 석조미륵불입상으로, 미륵부처님의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그 옆에는 거북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천왕문과 보광루. 사천왕문에 봉안된 네 분의 천왕들 모습인데, 다른 절집과 다르게 천왕상의 배치가 다르다. 들어가면서 좌측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을, 안쪽에는 남방 증장천왕을 모셨고, 아래의 사진처럼 우측의 앞쪽에는 북방 다문천왕을, 안쪽에는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보광루(普光樓) 바깥쪽에 걸린 "雉岳山龜龍寺" 편액.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보존돼 오던 중 대웅전은 안타깝게도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되었다. 다행히 강원도가 건축물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제작해 놓은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2004년 11월 5일 전통 불교양식에 맞게 원형 복원이 되었다.
대웅전 불단 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는 약사불과 아미타불 등 삼존불을 모셨다. 그리고 좌측벽면에는 신중탱을, 우측벽면에는 감로탱을 봉안하였다. 구업(口業)을 많이 지은 인간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받게 되는 형벌의 모습으로, 혀를 길게 쭈욱 빼내어 그 위에 쟁기질을 하고 있는 발설지옥의 광경이다.
대웅전과 요사(종무소도 겸하고 있는 건물). 괘불석주 .조사전 .응진전 .관음전.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시고 좌우협시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그 뒤쪽과 좌우 벽면에는 나한을 원불 형식으로 봉안하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전에 봉안된 독존의 관음보살상과 관음보살도.
지장전, 삼성각.
요사채에 걸려 있는 看然蘭若(간연난야) 편액. '자연을 바라보는 한적한 수행처'라는 뜻, 칠천거사(七川居士)라는 분의 필적이다.
요사채에 중앙에 걸려 있는 說禪堂(설선당) 편액. 경북 예천 출신의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의 글씨. 석굴암 주차장에 자리한 불국대종각에 봉안되어 있는 범종의 종신에 새겨진 글씨도 초정의 필적이다.
범종루에 걸려 있는 佛音閣(불음각) 편액. 부처님의 소리, 즉 진리의 소리가 울려져 나오는 누각이란 뜻의 '佛音閣' 글씨는 임술년(壬戌年, 1982년) 8월(八月) 어느날에 쓴 화남(花南) 원동억(元東億)의 필적이다.
대웅전 측면.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위에 용두와 잡상을 함께 올려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공간에 사악한 무리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벽사의 의미로 잡상을 배치하였다. 잡상은 궁궐이나 성의 문루, 왕릉의 정자각 지붕 위에 주로 배치하는 것으로,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예이다. 밀양 표충사를 비롯한 몇몇 절집에서 볼 수 있는 잡상이다.
구룡사는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에서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2004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전면에는 높직한 자연석 기단을 쌓고 정면 3칸에는 중앙을 넓혀 4분합 정자살문을 달고, 좌·우의 두칸에는 각각 3분합 정자살문을 달았다. 기둥은 자연석 주초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평방(平枋)을 설치하고 공포(栱包)를 구성하였다. 쇠서[牛舌]는 아래로 3개는 앙서[仰舌]이고, 위의 1개는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3면의 벽은 회벽으로 안에는 마루를 깔고 중앙에서 뒤로 불단(佛壇)을 설치하였으며, 그 위에 닫집이 있다.
구룡교의 양쪽 끝에 세워진 4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용두(龍頭) 모습이다. 용의 아홉 아들 중 범공(혹은 공하)라는 용은 특히 물을 좋아해서 다리의 상판 난간이나 다리 기둥, 혹은 홍예교 아래 중앙의 천장에 붙어 있기도 한다.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들을 차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용이다.

사찰의 가람신(수호신)을 모신 국사단(局司壇) 전경.
일주문을 지나 구룡사로 가는 숲길의 모습.
구룡사(九龍寺)에서 구룡사(龜龍寺)로 절 이름이 바뀌게 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거북바위의 모습이다. 구룡사에서 머무른 시간이 너무 짧아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놓친 거북바위여서 사진은 불교신문에서 가져왔다.
구룡사 경내 주차장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인데, 특이하게도 맨 아래쪽의 가지에 달린 솔잎들이 다른 가지의 솔잎에 비해 훨씬 푸른 빛을 내고 있으며, 솔잎들 또한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쪽으로 향해 구룡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천왕문 향좌측에 모셔진 석조미륵불입상으로, 미륵부처님의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그 옆에는 거북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강희45년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년(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 무학(無學), 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보존돼 오던 중 대웅전은 안타깝게도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되었다. 다행히 강원도가 2004년 11월 5일 건축물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제작해 놓은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전통 불교양식에 맞게 원형으로 복원이 되었다.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시고 좌우협시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그 뒤쪽과 좌우 벽면에는 나한을 원불 형식으로 봉안하고 있는 모습이다.
요사채에 걸려 있는 看然蘭若(간연난야) 편액. '자연을 바라보는 한적한 수행처'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글씨로 칠천거사(七川居士)라는 분의 필적이다.
요사채에 중앙에 걸려 있는 說禪堂(설선당) 편액. 경북 예천 출신의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의 글씨이다. 석굴암 주차장에 자리한 불국대종각에 봉안되어 있는 범종의 종신에 새겨진 글씨도 초정의 필적이다.
대웅전 측면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위에 용두와 잡상을 함께 올려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공간에 사악한 무리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벽사의 의미로 잡상을 배치하였다. 잡상은 궁궐이나 성의 문루, 왕릉의 정자각 지붕 위에 주로 배치하는 것으로,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예이다. 밀양 표충사를 비롯한 몇몇 절집에서 볼 수 있는 잡상이다.
구룡사 일주문 모습이다. 거의 모든 사찰에서는 산명(山名)과 사명(寺名)을 함께 적은 편액을 건 일주문인데, 이곳 구룡사의 일주문에는 원통전(圓通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련의 글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恒萬歲以長今(항만세이장금)
천겁이 지나도 낡지말고, 만세 동안 항상 오늘같이 남으라.
보호수인 은행나무
범종루에 걸려 있는 佛音閣(불음각) 편액. 부처님의 소리, 즉 진리의 소리가 울려져 나오는 누각이란 뜻의 '佛音閣' 글씨는 임술년(壬戌年, 1982년) 8월(八月) 어느날에 쓴 화남(花南) 원동억(元東億)의 필적이다.
보광루.
대웅전 불단 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는 약사불과 아미타불 등 삼존불을 모셨다. 그리고 좌측벽면에는 신중탱을, 우측벽면에는 근래에 조성된감로탱을 봉안하였다.감로탱의 하단부에 그려진 그림의 일부이다. 구업(口業)을 많이 지은 인간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받게 되는 형벌의 모습으로, 혀를 길게 쭈욱 빼내어 그 위에 쟁기질을 하고 있는 발설지옥의 광경이다.

차 한잔 하면서 치악산 절경을
사대천왕
바위에 각자(刻字)된 황장금표(黃膓禁標) 글씨.
사천왕문에 봉안된 네 분의 천왕들 모습인데, 다른 절집과 다르게 천왕상의 배치가 다르다. 들어가면서 좌측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을, 안쪽에는 남방 증장천왕을 모셨고, 아래의 사진처럼 우측의 앞쪽에는 북방 다문천왕을, 안쪽에는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