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2016.07.03.>
붓담 사라남 갓차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맘 사라남 갓차미!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감 사라남 갓차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간만에 대구스리랑카담마가웨시사원 홈페이지를 찾았군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봇물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추어 있습니다.
분명히 이 곳에 글을 올리겠다고 그 분에게 알렸기에,
이제 첫 발을 내딛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너무 좋아서,
스리랑카 나라가 왠지 좋아서,
스리랑카 사람들이 정말로 좋아서,
지금부터 12년 전에 스리랑카에 삶의 터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꿈을 접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에 곧 밝히겠습니다.
"절집은 절집다워야 하고,
불자는 불자다워야 하고,
주인은 주인다워야 하고,
손님은 손님다워야 하며,
스님은 스님다워야 한다.
2. 이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016년 여름,‘상감 사라남 갓차미’라는 제목으로 스리랑카에서의 삶의 꿈을 키우다가 접게 된 이유를 밝히려 시작했다가, 그 분(A)과 側(B)이 원금 변제 이행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의 게재 중단 요청을 수용하고 1년여 기다렸으나, 오히려 이들은 배신과 농간을 거듭하며 변제 약속 이행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작년의 약속처럼 꿈을 접게 된 이유와 결코 아름답지 못한 말도 안 되는 뒷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한다.
2004년 초, 우리 부부는 제3의 인생을 스리랑카에서 함께 할 행복의 꿈을 키우며 기다렸으나, 실명을 밝힐 필요나 가치조차 없는 두 인물의 배신과 농간으로 개꿈이 되어버린 자초지종을 이제부터 매월 초하루마다 수필 형식의 초짜글로 토로하게 될 스리랑카 경험담은 언급조차 부끄러운 스리랑카 정착 실패담이다.
우리 부부는 제주도 4·3사건과 6·25사변의 공산당 광풍이 몰아치던 어지럽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에게 각각 아버지를 잃었기에 우리 모두는 아버님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고 아버지라고 불러 본 기억은 전혀 없는 것이 묘한 우연의 일치이다.
나는 생후 22 개월, 내 아내는 태중 4 개월 때 아버님이 순국하셔서, 각각 어미의 등에 업히고 손에 이끌려 함께 절집과 예배당을 찾게 됨으로써 각각 부처님과 예수님법과의 인연이 시작이니 우리 부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다.
나는 비록 초파일불자에 불과했으나 내 아내는 새롭게 불법을 접하고는 기존 믿음처에서 스스로 개종까지 함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고, 한때 불자부부라는 일컬음을 함께 했음에 추호의 불만이나 후회조차 없었으며,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2011년 11월 절집과의 인연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조차도 버렸다.
첫째는 절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식 이하의 행태와 추한 모습들을 보면서 절집이 절집답지 않고 승려가 승려답지 않음과 절집식구들이 그들의 위상에 맞지 않은 행태에 실망하고 자괴감이 들었고,
둘째는 우리 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된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그 분(A)과 제3의 인생의 꿈(Dream)을 함께 하려고 그에게 절대적인 믿음으로 원금 3천만 원을 맡겨 스리랑카 정착의 꿈을 키웠건만, 되돌아온 것은 약속 불이행과 그릇된 배신의 연속이었다. 특히 살아있는 부처, 즉 불교의 나라에서 생불로서 우대하는 절대적인 무한의 신뢰와 존중을 받는 사회적 위상으로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양심과 행동을 보면서 조금도 존중할 수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그의 사회적 위상조차도 인정할 수 없겠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큰 실망과 자괴감이었다.
오늘도 대한민국 산업현장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귀국 후 더 나은 삶의 꿈(Dream)을 키우고 있는 불교의 나라 불자나 근로자들이 뒤이어 이어질 이야기를 알게 될 때 그들에게 자리 잡을 자괴감은 어느 정도일 것이고 어찌 뭐라 위로하랴!
“절집은 절집다워야 하고, 승려는 승려다워야 하며,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우리 부부의 믿음에 대하여 독자들의 생각과 의견이 궁금하고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