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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73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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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혜안>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 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천년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예수님도 인간을 위한 존재였고, 복음도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역시 어디 딴 하늘 아래, 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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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업적지향적 삶과 의미지향적 삶>
어떤 아이에게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손가락을 빨지 말라고 타이르거나 혼내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15분씩 열심히 손가락을 빨아라. 그럼
아빠가 100원 줄게.”
얼마 후 아이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아빠, 나 이제 손가락 빨기 싫어요!”
또 이런 실험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그린과 스턴버그는 초등학교 4, 5학년 어린이들에게 새로 개발된 재밌는 수학게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재미를 붙여 틈만 나면 게임을 즐겼습니다. 10일 뒤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재밌지? 지금부터 오래 하는 사람에겐 트로피와 상을 주기로 하마.”
처음엔 아이들이 앞 다투어 더 오래 게임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신나서 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트로피와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참조: ‘리듬: 내 안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것에 대한 노력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 드는 것에 비해 결과가 미약할 때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경쟁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포기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만든 사람에게 보복을 하게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힘의 경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겨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벌어집니다. 봉사자들이 본당 사제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인정해주는 것 같으면 그 다른 사람도 미워하고 본당 신부도 미워합니다. 너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대부분 이런 함정에 빠지고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누구보다 앞선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지옥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각자 자신이 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사실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선교에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교를 통하여 옵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직행버스입니다.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여 기쁘게 하려면 더 많은 선교를 하는 사람, 더 멋진 성당을 짓는 사제, 더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업적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결국 이도저도 되는 일 없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는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 일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행복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뉩니다. 업적, 혹은 목적지향적 인간과 의미지향적 인간입니다. 그 일을 통해 목적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는 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성패는 상관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참으로 마음이 찡하다고 하며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함께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면 풍성한 꽃도, 꽃이 진 자리에 달리는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내처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마치 동맹을 맺듯 ‘나도 그만 자랄 테니 너도 그만 자라렴.’ 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고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나무들과 맺는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출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우종영, 메이븐]
하늘로 오르려고만 하면 땅이 주는 에너지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저절로 높이 올라갑니다. 목적지향적 삶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의미지향적 삶은 항상 현재 하는 일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업적은 사라지지만 의미는 영원히 남습니다. 의미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의 결과도 그래서 의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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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어 스승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쁨에 넘쳐 보고 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드 그를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고 말씀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와 같이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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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복음 전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마귀들까지 자신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을 기쁨에 차서 보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구마 기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었기에 악의 권세가 굴복되고, 사람들이 그 권세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뜻합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거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복음 전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도취되어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십니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성취감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성과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실제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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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선교의 참된 기쁨>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 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카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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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은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기쁨>
성체를 모시고 간 사제의 손을 잡아주시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 해맑은 웃음 머금고 달려와 품에 안기는 철부지 어린이, 눈빛만으로 서로의 사랑과 따뜻함을 나누는 학생들, 바쁜 시간 쪼개어 가면서 함께 하려고 애쓰는 청년들, 지친 삶의 넋두리를 편안하게 풀어놓는 교우들, 신부님 떠나시면 안되는데... 마냥 아쉬워 하시는 교우 아주머니, 부족한 보좌신부를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격려해주시는 주임 신부님,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주시는 수녀님들, 한 푼 적선에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눈 먼 아저씨,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사랑하시는 부모님,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애써 감추며 나를 믿고 지켜보는 가족들, 가끔 전화로, 편지로 나에 대한 기억을 확인시켜주는 친구들, 오랫만이네요... 반갑게 맞아주시는 술집 주인 아저씨,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 여러 사람들... 참으로 작은 이들입니다. 가까이에 있기에 소중함을 잊곤 하는 이들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아는 이들입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이들, 그렇지만 고마움을 쉽게 잊어버리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알만한 유명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나에게 다가오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으쓱해지는 기쁨에 젖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생각합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그 기쁨을.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기뻐하는 제자들보다, 무지랭이같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게 된 것을 보며 더욱 기뻐하시는 예수님, 흥에 겨워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나에게도 작은 이들이 있습니다. 나를 아는 이들, 나를 순수하게 받아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쁨에 나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이 기쁨에 취해 나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나를 받아 준 많은 작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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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3가지 이름을 부르며…>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아낌없이 또 남김없이 다 주고도 행복해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보니, 마치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부터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아드님의 시신을 가슴에 어머니의 품에 안으셔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 성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누구를 위한 봉헌입니까?
“저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봉헌”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이십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과 피다.”
그리고 영적 일기와 시편 밤공부를 준비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오니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하십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주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진 것도 없어서, 오직 당신 앞에서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슬퍼하셨을 모습을 미리 상상해 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루살렘 축제에 갔다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찾아내고 말씀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부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이 성모님에게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인지 아신 것입니다. 그 슬픔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시면서 물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이 잔을 마셔야 하겠지만, 제 어머니도 마셔야 합니까?” 왜냐하면, 자식이 고통을 받으면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같은 고통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오직 저희를 위해….”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감히 두 분을 두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저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이십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알렐루야.
사랑하는 고운님들!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묵주 기도는 쉬울 때보다는 어렵고 힘들 때 기도하는 것이 더 큰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묵주 기도를 바치는 동안 생기는 온갖 분한 마음과 졸음, 잡념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절대 싸워서 분한 마음과 잡념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만 내 안에 하느님 햇살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영혼이 있음을 느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주 기도로 바쳐보십시오. 감사로 덮어버리고 끌어안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성모님과 함께 묵주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면서 온갖 분한 마음과 졸음, 잡념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 순간 감사의 기도로 지나가게 만드는 기도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분한 마음과 졸음, 잡념을 지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이름 3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입니다.”
이 3가지 이름을 잊지 말고 성령 충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묵주신공을 바치는 은총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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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75)
♧♧ 시편 52편 10절….
"그러나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
*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여기서 ‘하느님 집’에 있다는 것은 거룩한 장소가 아닌 하느님의 보호하심 안에 머무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푸른 올리브 나무’는 의인의 형통함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물론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 중에 있었으니 육신과 영혼이 다함께 매우 딱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이 하느님의 손바닥 속에 사로 잡혀 있는 것처럼 결국에는 팔레스티나 도처에서 무성히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처럼 형통하게 될 것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이는 실로 환난 중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의인의 형통을 굳게 믿는 다윗의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
올리브나무가 심겨진 터 위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을 때에만 그 푸름을 유지할 수 있듯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도 하느님을 절대 의지할 때만 형통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다윗 역시 절대적으로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살 것이며, 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도록 힘쓰며 애쓰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하느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가 또한 날마다 하느님께 고백하며 스스로 에게 다짐해야 할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시편 52편 11절….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니 당신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 앞에서 좋으신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것이자 하느님의 성품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들에게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은 은혜로우시고 인자하시며 또한 정의로우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계시된 것처럼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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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 없이 자동으로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밥 먹기, 시간이 남는다며 인터넷 검색을 하고 SNS 하는 것,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 등등….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무의식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쁘지도 않습니다. 혹시 식사할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감동을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SNS를 하시면서 “너무 행복해.”라며 감탄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감동 없이 무의식적으로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지 않으려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본인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가져다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미워하지 않기, 중독에 빠지지 않기, SNS나 인터넷 하지 않기,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지 않기 등등….
이러한 것들은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들이지요.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과 의지를 세워서 하지 않는 것의 가치는 어떤 것이 더 높을까요? 당연히 의지를 세워서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높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의지를 갖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좇아서 살기 위해 굳은 의지를 세우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돌아와서 스승이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자신들 역시 예수님처럼 마귀를 복종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나 봅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힘 있는 분의 제자라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주님의 이름으로 저절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만을 쫓으면서 막연한 기쁨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본인의 의지를 굳게 세워서 주님과 함께 하는 참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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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열등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너무나 허약해서 병원을 자기 집 드나들 듯 다녔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현재 이분은 소위 ‘몸짱’ 소리를 들으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공부에 대한 열등감이 컸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은 점점 더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어느 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책 읽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열등감은 분명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열등감 안에 묻혀 포기하고 좌절하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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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업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의 판단과 남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나귀를 몰고 가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나귀를 타고, 아버지가 나귀를 끌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저 아들은 불효자구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가 나귀를 탔습니다. 사람들이 ‘둘이 같이 타면 되지 왜 혼자만 타고 가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둘이 같이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나귀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나귀를 아들과 메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타고 가는 나귀를 메고 가네’라고 말했습니다. 걸어가야 하는 나귀는 결국 몸부림치다 개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흔히 이런 사람을 일컬어 ‘귀가 얇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소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론과 언론에 편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도 남들이 이야기하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부화뇌동한 적이 많습니다. 부화뇌동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은 화이부동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20년 이상 도시 빈민을 위해 사목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목을 하는 동창을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자신의 사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웃는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1 독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부화뇌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오늘 영송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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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은총>
-회개와 깨달음-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새벽 성무일도 시편시 계속된 후렴입니다. “당신의 은총은 영원하시다”, “당신의 성령은 영원하시다”로 해도 무방합니다. 모두 한 실재의 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입니다. 자비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만이 인간의 무지無知와 광기狂氣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겸손히 활짝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회개와 깨달음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임과 동시에 깨달음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새벽 눈을 뜨니 사랑과 정성 가득한 반가운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존재 자체로 선물입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 사랑 가득하신 순수한 마음, 한결같이 보존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 안에 행복한 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배밭의 자연안에서 흘러 나오는 시적 감수성과 아름다운 글로 세상을 더욱 밝혀 주세요. 영육간 건강하시고, 요셉수도원에도 하느님 축복 가득하시길 빕니다. 축하드립니다.”
참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 또한 성령의 선물,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깨달음 중에 샘솟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어제 성 프란치스코 축일은 참 감사와 기쁨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영명축일을 맞아 이렇게 많이 축하인사 받기는 처음입니다. 또 하나 기쁜 것은 알렐르기 비염 35년만에 거의 정상적으로 지낸 9월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매해 9월이면 알렐르기 비염, 결막염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요.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어제는 오전 내내 축하편지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마침 아침 일출 장면의 사진이 좋아 사진과 더불어 축복하는 마음 가득 담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송했으니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님께. 축일 축하 감사드립니다. 태양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성령의 은총이 역설의 일치의 신비를 깨닫게 합니다. 얼마전 하늘 나라가 사막임을 깨닫고 써놓은 글이 있어 나눕니다.
-“하느님을 /열렬히/항구히/사랑할 때
오늘 지금 여기가/하늘나라이자 동시에/사막이 된다
하느님과 일치의 친교이니/하늘 나라이고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이니/저절로 사막이 된다
그러니/밖으로 밖으로
성지를 사막을 하느님 나라를/찾아 나서지 마라
오늘 지금 여기가/성지요/사막이요/하느님 나라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이 열리면 바로 오늘 여기가 하늘 나라이자 사막이요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이 열렸을 때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한 내용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기쁨과 평화/감사와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참으로 기쁨과 평화, 감사와 행복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눈이 가려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 속에서 우울하고 불평속에 지내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는 성령의 빛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복음선포의 사명을 완수하고 주님께 돌아 온 일흔 두제자의 기쁨에 넘친 보고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매일 공동미사전례중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만나 하루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하루 살아갈 힘을 선물받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호흡에 맞춰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대로 예수님의 살아 있는 현존을 뜻하기 때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더욱 고무적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존재론적인 기쁨입니다.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니 바로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쁨의 샘’에서 샘솟는 기쁨이기에 일상의 이런저런 유혹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늘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힘이기에 이제 아무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기도 역시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안에서 기뻐하며 바치는 공관복음에 전해오는 단 하나의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 상징하는 바, 바로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에 넘친 보고를 듣고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마음 순수한 철부지들인 우리들에게 계시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신 주님은 누구입니까? 다음 예수님의 성령 가득한 고백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와 더불어 우리의 정체를 알려 줍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신비의 열쇠가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가면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무지에서 벗어나 참 나의 자유로운 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알려 드린 행복기도, 예닮기도를 끊임없이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여 성령의 은총을 통한 끊임없는 회개의 깨달음이 필수입니다. 바로 바룩서의 권고는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너희는 너를 길러 주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잊어 버리고 너희를 길러주신 예루살렘을 슬프게 하였다. ---나는 그들을 기쁨으로 키웠건만 슬픔과 눈물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여기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 어머니이신 성교회입니다. 주님은 열배로 열심히 당신을 찾으라 하십니다. 살아갈수록 하루하루 힘들다고 이구동성의 고백입들입니다. 힘들수록 열배로 열심히 주님을 찾아 회개할 때 선사되는 철부지 순수한 마음에 감사와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한 마음 자체가 참 좋은 축복이요 성령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 온 우리 모두를 성령 가득 선물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10,23ㄴ-24)
성령의 은총으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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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끝마무리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 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 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 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보다 구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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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에는 어제와 달리 기쁨과 희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일흔두 제자가 첫 선교 여행을 마치고 신이 나서 돌아와 스승님께 외칩니다. 복음서 저자는 "말하였다"고 썼지만, 그 마음에서 울렁이는 기쁨이 마치 외침처럼 들려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은 선교지에서 이루어진 성공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갖는 힘, 그 권능을, 치유받은 사람이나 구경꾼들보다 그 이름을 간직하고 있던 제자들이 더 생생히 체험한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참 놀랍지요! 주님의 이름을 지니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곧 하느님 심장에 새겨지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영들이 복종한 일이 기쁘다면, 자신들이 지닌 주님의 이름을 "믿은" 덕분에 하느님 안에 자리를 얻게 된 은총은 얼마나 더 크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십니다. 선교 여행이 그리 순탄했다니 아직 고통의 잔은 그들 몫이 아닌가 봅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제자들은 세상 눈으로 보면 철부지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저명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도 없고 사제도 랍비도 아닌 어부, 세리 등 보통의 단순한 이들이지요. 그들을 부르신 주님은 세상이 인정하는 지혜와 슬기 대신, 새로움의 씨앗을 품어 싹을 틔워낼 마음밭의 상태를 보신 듯합니다. 제도와 기득권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더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는 불모지에 가까운 영혼이 철부지일 것 같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는 존재는 오직 아들뿐인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도 이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십니다. 누구를 선택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실지 그 선택권은 오로지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바로 오늘, 철부지 제자들이 그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배 상황 안에서 희망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의 죄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민망할 정도로 낱날이 반복되어 언급되지만, 그 처참한 단어들 사이로 실낱같은 희망의 메시지가 비추입니다.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바룩 4,27)
용서를 청해 보셨습니까? 진정으로 어린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자기를 낮추어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적 지혜와 슬기를 짜내어 도망갈 구멍을 마련하거나, 이중적 의미의 단어를 써서 슬쩍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장황하게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철부지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이들아!" 하고 부르시는 겁니다.
절망과 고통의 끝에서 하느님의 자비 외에는 달리 희망이 없는 지금,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백성의 죄악에 노하셔서 잠시 재앙을 퍼부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면 세상의 지혜와 슬기가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아이들처럼, 철부지처럼 아버지 품에 달려들어가 더 깊이 파고들어 매달리며 그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용기의 밑바닥에는 순박하고 단순한 믿음이 자리합니다.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화답송) 그들이 아는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이 아이다운, 철부지다운 믿음을 아버지 하느님은 결코 밀쳐내실 수 없습니다.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화답송)
주님의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에 기대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의 이름을 세상의 눈과 귀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장에 새겨 넣습니다. 세상이 주는 명성과 찬사가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철부지"라는 호칭과 애틋하고 따사로운 눈길이 그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들은 설령 넘어지고 엇나가더라도 이내 아이처럼 아버지의 품을 찾아 달려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주님의 이름이 아버지께 자석처럼 이끌리고, 아버지 심장에 새겨진 자기 이름이 그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살 곳은 하느님의 심장입니다.
오늘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벗님의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시는 행운을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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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행복을 만드는 언어
말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언어는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또한 사람의 육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행동을 지배하기도 하고 환경과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며 자아상을 바꾸기도 한다.
언어에는 ‘사실언어’와 ‘감정언어’가 있다. 사실언어는 "인상이 딱딱해 보이네요."와 같은 말이다. 사실대로 말한 것이지만 듣기에 좋은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은 기분이 상하기 쉽다.
반면 감정언어는 긍정적이고 배려하는 말로,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자녀에게)
"역시 당신이 최고야."(일하고 있는 배우자에게)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거래처 사무실 사람들에게) 와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중에서
♣‘무슨 말로 이 사람을 기쁘게 해 줄까?’를 생각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감정언어를 사용해 보아야 한다.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인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것을 꾸며서 말하면 안 된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기분 좋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는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계속 감정언어를 쓰게 되면 인격도 변하고 삶도 변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언어는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밝고 환한 말,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말,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다 보면 삶에 활기가 넘치고 가정이나 직장, 궁극적으로 내가 가는 모든 곳이 활기차고 밝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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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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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생활기록부>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주시는것을 잘 받아들이며 사는가?
고통은 내치고 내가 좋다고 여기는것만
받아들여 살려한다면 안타깝지만 반쪽 인생!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성격, 교우관계, 성적 등~
기록된 것을 보고 그 당시 내 모습을
선생님이 눈여겨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기록부에
나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어떻게 기록되어 있기를 바라며 사나요?
힘들었지만 잘 견딘 ᆢ
성실하고 배려심 많은 ᆢ
고집쌔고 자기 맘대로 ᆢ
봉사정신이 투철한 ᆢ
이쁜짓만 골라하는 ᆢ
"지금 사는 모습이 낱낱이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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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 21)
우리 삶의 연속은
이와같이 모두
철부지 철부지
철부지들의 순수한
연속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철부지같은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초짜이듯 모두가
철부지들임을
인정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고
철부지들을
이해하시고 철부지들을
기다려주십니다.
어여쁘고 소중한
하느님의
철부지들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들은 결코
하느님께
맞서지 않습니다.
철부지들은
철부지들의 역사를
써내려 갈 뿐입니다.
너무 커버린
우리들 앞에
철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철부지들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이 사는
여기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철부지의 날 되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
즉 사랑을 가르처
주십니다.
모자람과
부족함도
은총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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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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