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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구원받는 방법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한 공식적이고도 고전적인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선언이다.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러나 사람은 때로 믿음의 본질과 기능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 공식은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난제가 되었다.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너와 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의 행위(피스튜오πιστεύ)로 응답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풀어 해석한다. 구원은 믿음과 은혜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몫도 아니요 전적으로 인간의 몫도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될 수 없으며 우리의 행동하고 응답하는 믿음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본문을 잘 알기 위해 한 가지 신학용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은혜”란 단어다 그러면 은혜 (חַסְדֵּ hesed, χάρις)란 무엇인가? 은혜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피조물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공짜선물”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루신 것”이고 “이루는 것”이며 “이루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바울은 믿음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단순히 말한다. 그럼에도 구원은 믿음이 원인이 아니고 은혜가 원인이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는 공로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믿음의 부족은 은혜를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혜가 구원의 원천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누릴 수 없다.
은혜는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풀이하면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요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 스스로 힘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는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하나님조차 은혜 스스로를 사람에게 강제로 주입시켜 구원 받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스스로 은혜에 반응해야 한다.
즉 은혜 자체로 말미암는 깨우침으로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고 은혜가 제공되는 도움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은혜를 수용하는 행위”가 읻음이요, 그것이 믿음의 역사(役事 Acts)다. 이를 신학용어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책임”의 정도를 오해함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곡해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대가를 기뻐하면서 그것을 “지식(智識)”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대가를 치루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하신일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갈바리 십자가의 고고한 희생은 알지만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이 그토록 사람에게 원했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십자가 후에 예수님이 원했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품성의 성장을 위한 훈련과 말씀의 미시적인 순종이다.
두 번 째는 성령의 임재하심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시대에 필요한 성령 즉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는 요청이다.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십자가 까지다. 십자가 이후의 예수의 은혜의 요청에는 관심도 없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믿음을 잘못 강조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도움 없이 선을 행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무능하여 아무것도 뭇한다고 곡해한다. 죄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을 행할 능력이 은혜의 형태로 계속 머물러 있어서 은혜만으로 나의 능력을 더 크게 해 주심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속주보다 선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비극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디트리히 본헤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렇게 한탄한다.
“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믿는 자들만이 순종한다“는 것은 지적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오직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만먁 전자만이 유효하다면 믿는 자가 값싼 은헤의 위험 즉 멸망에 이를 수 있다. 만약 후자의 진술만이 유효하다면 믿는자가 행함을 통한 구원의 위험 즉 멸망에 이를 수 있다.(The cost of Diacipleship. p58. New york: McMillan.co.1959
그의 유명한 말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에서 이렇게 말한다.
"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 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 ... 떨이로 팔아버린 위로다 값싼 은혜란 교회의 창고에 무진장 쌓여 있어 언제나 손쉽게 무제한 제공될수 있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값싼 은혜는 대가나 노력 없이 얻는 은혜다. 계산이 끝났기 때문에 기도와 회개란 영수증만 제시하면 언제든지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것 이것이 은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은혜를 가르치는 교회와 목회자를 통해 천군만마를 얻은 교인은 이미 구원을 소유했다고 말한다.이러한 일로 교회와 교인은, 세상은 죄를 헐값으로 덮어 버린다.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뉘우치거나 죄로부터 벗어나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 결과 값싼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부정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었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즉 성육신이 부정된다. 그래서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 대신에, 죄를 의롭다고 인정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론으로 값싼 은혜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아성취의 은혜일 뿐이다."
"믿는자 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리 선택된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기회”이다. 마찬가지로 은혜란 선택된 자들이 믿음을 받아 “획득하거나” “보증해주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감성이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은헤를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지 않았고 죄를 소명시킴으로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그러므로 믿음(Faith)이란 하나님을 도와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신인(神人) 협력 활동이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빌 2:12)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진정으로 앎의 본질이신 (knower) 하나님을 "아는 자들"(being the knower) 이 아니고 "알게된 자들:(become the known)이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맏음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논리나 부지런한 과학적 탐구나 역사적 연구 심지어
느낌이나 직관을 검증되어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적절한 반응"즉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사는 것이다,
실물교훈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 진리가 마음속에 심어져야 한다.진리가 마음을 지배하고 애정을 통제해야 한다.그러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온 품성이 하나남의 것으로 인쳐진다.하나님의 말씀의 작고 세밀한 하나부터 매일 매일 조금식 실천함에서 온다" (실물교훈 314 영문 )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도(先導)하시고 사람은 반응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야할 일을 설명하시고 사람은 협력한다. 주께서는 죄에 대하여 사유하시는 힘이 있고 그 결과로 인간이 그분의 손을 붙잡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전부 그것이 믿음인 반면 그분에 관하여는 전부 은헤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충만한 권세가 드 분의 뜻을 이루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 목표는 변화된 인간 즉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인 바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일치되게 해 줌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 주는 것이 회개와 성화의 사업이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창조주와 조화를 회복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하고 위로부터 새 영을 받아야 한다” (대쟁투 467 영문)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후 7:1)
믿음의 반응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가련함과 필요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은혜 가운데 자라서 그리스도의 성숙함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른 것”(엡4;13)을 드러낼 떼까지 역사(役事)는 믿음으로 가자. 그리하여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진정한 오늘날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始作)되고 지지(支持) 되지만 그 분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일 즉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분에게 반응하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창조계획 상 인간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반응할 수 있게 만드셨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respone-able)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책임지시는 (Responsible) 분이시다.
의롭되 되는 3가지 단계.
1.신앙에 대한 의식(意識)적인 생각(롬3:26). --그분은 변화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어 나타나는 징후를 인지하신다.(롬3:26)
2.사소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여 습관(習慣)화--변화되어 회개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신다(롬 5:1) 그리고
믿음으로 살려고 결심한 자에게 새 삶의 원칙을 심어준다(히 1016.17 겔 36:2.27)
3. 현실에 각인(刻印)된 몸과 마음의 변화이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을 하늘에 적합한 인간으로 살도록 정결의 역사를 시작한다 (요일 1:9)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하여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품성을 이루게 되어 그 품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세적인 또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실물교훈 325)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늘의 은총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시대의 소망 126 영문페이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백지 사면장을 내 주시지 않는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단지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기쁘게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知性)과 감정(感情)뿐만 아니라 의지(意志)와 마음에도 호소하신다. ” God’s Amazing Grace p100)
믿음은 은혜를 주어 책임을 목적한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 이상 그의 자녀들을 책임과 실력있는 존재로 만드시고야 만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그 창조를 심지어 말씀으로 이루신 분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창조주에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우리를 버릴 수 있고 우리 대신 다른 존재를 뚝딱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아브라함)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라" 롬 4:17 이 말씀을 역으로 해석하면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버리 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창조 할 수 있으시고 죽은 것을 뒤집을 수도 있으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말 안 듣는 우리를 끝까지 놓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가?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2:12)
하나님의 영광을 인류와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있는 신앙인으로 꼭 만드시고야 말겠다는 목적에 붙잡힌 것임을 자작하자.
그래서 다시는 이렇게 물으면 안 된다. "그럼 구원이 두 번 있어야 하나요?" 이렇게 묻는것 못난 일이다. 출생은 단 번에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커야 한다. 완성이 출생의 이유가 아니다. 출생의 목적이다. 구원에 확신과 열심있는 신앙인의 생활은 구원받은 사람의 당연히 해야할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든지 가자고 하시는 방향과 목표까지 도달하는 책임있는 신앙인으로 가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가의 목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