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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인문학 위기담론의 허구성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대학, 특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말이 무성하다. 최근에는 전국 대학의 인문(과)학 연구소들이 대책을 논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위기' 담론들은 많은 경우 '위기'를 제대로 진단하기는커녕 그 맥락을 헛짚으며
때로는 보수·수구적인 관점에서 '위기'를 부풀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문학이 단순히 문화 산업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많건 적건 그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인문의 위기는 학술뿐
아니라 문화 차원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버려야할 것은 대학과 시장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관념적 도덕주의이다.
물론 우리는 과도한 시장 논리 및 맹목적인 경쟁 이데올로기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장 전체주의'와 대학을 순전한 대립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대학에 대한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도정일 교수가 말하는 위기 담론이 이 경향을 띤다. 도 교수는 경쟁적 세계시장 체제를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시장 논리를 모든 영역에 확대시키는 '시장 전체주의'와 대학을 대립시킨다.
"교육은 전적으로 시장 경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라는 식의 말은 명분은 좋지만, 사실은 시장 논리가
사회를 '전적으로' 혹은 '전면 규정'한다는 총체주의적 근본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순진하고 과장된 이분법은 악마를 과대 포장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서술은 아니며,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도덕적 명분을 축적하는 데 치우치는 듯하다.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기는 하지만 대학이 시장과 권력과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있었을까? 좌파·진보적
이라고 하면서 왜 그 점에는 눈을 감는 것일까.
위기의 대책으로 사람들은 흔히 빈약한 연구비를 거론하는데, 낯뜨겁고 때로는 한심하다.
연구비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가? 시장 아니면 국가일 것이다. 시장 논리는 거부하면서 시장을 받치는 연구비는 왜
거부하지 않는가? 시장은 그렇다 치고 정부와 국가에서 주는 돈은 그냥 받아도 좋은 것일까?
자율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이 국가 관리를 양성하는 목적에 봉사했다는 점은 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근거지인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대학뿐 아니라 동양의 (특히 과거시험을 통한) 봉건적 전통에서도 드러난다.
대학과 인문학에 대한 상투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실적 존립 근거에 대해 성찰하자.
현실적이고도 섬세한 구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와 시장논리를 맹목적으로
유포하는 신자유주의를 경계하는 일과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일은 백 번 옳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대응은 세계 체제의 차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봉건적 경제질서를 깨기 위해 일정 정도 전략적으로 자유주의적 경쟁을 도입할 필요도 있는 것처럼, 봉건적 대학
체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경우에 新자유주의와 舊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미 좋은 사회민주주의적 질서를 갖춘 유럽이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계하는 경우와 한국의 경우는
공통점 못지 않게 다른 점도 있다. 언어-정치적으로도 불어와 독어는 영어에 저항할 여지를 비교적 많이 확보하고
있는 반면에 한국어는 훨씬 그렇지 못하듯이.
또 위기 담론은 인문학이 인간 존재에 관한 유일하고도 독점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설정한 후 그것이 훼손되고 있
다고 말한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혹은 실용과학에 대한 불변의 권한이나 경계, 이런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애매하다.
유럽에서 중세적 '철학부'가 분열하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낳았을 뿐 아니라, 이들 사이의 구분조차도 오래
전부터 유명무실할 정도로 오늘날 경계들은 삼투하고 침투한다.
또 '기초학문의 위기'라는 구호도 반은 진부하거나 상투적이다. 혹자는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이 인문학의 고유한
임무라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인문학을 기초화하는 것이 오히려 공허하거나 해로운 면도 있다.
실제로 어문학과가 실용적인 회화수업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연구의 질에 관한 내부적인 토론이나 평가를 거치는 대신 그 자체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자연과학적 모델을
따른다는 점, 그리고 무조건 회원 수가 많은 전국 규모의 학회지를 연구 평가의 잣대로 삼는다는 점, 교수들 사이의
초빙이나 수평이동이 부재하다는 점, 또 비교적 현실적인 작업을 하거나 계간지 등에 글을 쓰는 작업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들은 인문학자들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체적 문제 해결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맞물린 내부의 문제일 것이다.
위기 담론은 많은 경우 '위기'를 일반화하는 대신 대학의 고질적인 내부 문제를 은폐한다
(다른 예. 독점적 특권에 근거한 서울대가 오히려 기초학문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왜곡하고 부실화시킨다).
그러면서 내부 개혁에 대해서는 침묵시키고, 바깥에서 핑계와 희생양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김진석/인하대
번역사 초기의 논쟁지형-'번역무용론’에서 '문화번역가론’까지
김억-양주동, 유진오-김진변 논쟁
"번역은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이자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의 번역에 대한 정의이다. 이처럼 번역이 단순히 이 말에서 저 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합의된지 오래.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 기본이 수십년 전 이 땅에서 논쟁의
핵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한글 번역사는 짧으며, 자연히 번역의 방법론과 위상 등에 대한 합의는 빈약한 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학계가 맞고 있는 ‘번역의 황금시대’에 점검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의 경우, 18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난학을 활성화했다. 강재언 전 하나조노대 교수(한일사상사)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가 여기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경우, 번역은 두 문화를 직접 잇는 교량이 되지 못하고 중국어와 일본어라는 ‘연락소’를 통하는 중역의 시대
를 거쳐간다. 17세기에 최초로 이입된 서구근대의 과학사상은 중국에서 수입한 漢譯된 문헌들이었다.
서구적 계몽을 이루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1894년 갑오경장 시기에는 봉건타파와 근대성취를 외치던 계몽주의자들
역시 일역된 서적들을 대량으로 번역해냈던 것이다.
여기에 ‘번역무용론’까지 가세한다. 1920년대 김동인은 “여력이 있으면 몰라도 몇 배 우수한 일역이 있고, 또 모두가
중학생 이상의 사람이라면 일역을 능히 읽을 수 있는데, 구태여 그만 못한 우리말 번역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며 ‘번역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입말과 글말의 분리에 일어사용까지 겹치면서 한국어의 정체성이 모호한 상태에서 초기의 번역사는 이토록 혼란
속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김병철 중앙대 명예교수(영문학)의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을유문화사 刊, 1975)에 따르면, 해방 이후 번역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이전에 크게 두 차례의 번역논쟁이 있었다.
최초의 논쟁은 1920년대 문예지 ‘개벽’과 ‘금성’에 발표된 김억과 양주동 간의 공방이다. 김억은, 양주동이 시를
축자역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충실한 직역이 시번역의 지향점일 수 없다는 반론을 폈다.
김억의 주장은 번역된 시도 하나의 창작품이므로 오역의 유무를 따지기보다는 번역시의 우리말표현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이에 양주동은 “충실한 직역과 소위 창조적 무드로 한 오역” 가운데 선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자
라면서 오히려 김억의 오역을 지적하며 이에 응대했다.
직역대 의역, 축자역대 창조적 오역이라는 초보적인 논의에 비해 1930년대 해외문학파와 비해외문학파 사이의
논쟁은 ‘번역론’이라 할만한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논쟁의 촉발은 유진오 등이 제기한 ‘해외문학파 무능론’이었다.
유진오는 “그들이 지금까지 소개한 작품은 거의 90퍼센트가 해외문학에 문외한인 우리로서도 이미 십년도 전에
재독삼독한 것이며, 번역가들은 일어 중역이 아닌 직접역을 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난에 가까운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가 최재서 역시 해외문학파의 번역이 고전문학에만 파묻혀 현실과 현대문학을 외면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번역문학가였던 김진변의 반론은 번역이 요구하는 시대적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김진변은 그의 논문 ‘번역과 문화’에서 이른바 비해외문학파들이 문화의 영향력과 속성에 무지하다고 역공했다.
번역이란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단축시키는 문화적 행위이자, 외국문화를
‘조선적으로’ 소화하여 ‘조선적인’ 토양에서 발아시키는 재창조 작업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김진변은 모든 문필가들이 문화의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1950년대 해방과 전쟁 이후 문고판으로 세계문학전집이 쏟아지면서 김진변이 주장한 ‘문화의 번역가’로서의 역할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된다. 이후 간단없이 이어지는 오역논쟁 이외에는 이들의 논의를 넘어서는 번역논쟁이
부재한 상태로 우리는 제 2의 번역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쏟아지는 번역서 속에서 ‘쓸만한 번역서’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세간의 평가 앞에 우리 시대의 ‘문필가’들이 다시 짊어져야 하는 의문부호는 무엇인가.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동양담론의 허구성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의 '동양담론'에 대해 그 지배논리적 성격을 비판하고 나섰다.
다음의 글은 김교수가 연세대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발표한 글의 전문이다.
1. 동도서기(東道西器)論에 대하여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은 아니다. 이 경우 한국인이란 정치적
규정이기에 일정한 현실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동양은 그런 현실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규정으로서 나름대로 일정한 사용 가치를 가지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동양'
이란 나무도 이질적이다.
그 이유는 근동에서 극동에 이르는 지역이 너무도 이질적인 정치적 문화적 환경과 배경을 가지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만히 보면 '근동'은 같은 동양인 '극동'에 가깝다기보다는 서양에 가깝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그렇게 이질적인 덩어리인데도 '동양'이란 덩어리 자체가 서양에 의해 기획되어
지고 또 서양에 대립된 것으로 기획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동'과 '서'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단순한 추상성에 머물 뿐 아니라, 솔직하지도 못한 개념으로 머문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화혼양재(和魂洋才) 등의 이념에서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주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반면, 동도서기론에서 '동'과 '서'는 구체적인 내용도 없다.
물론 현실적인 덩어리로서 동아시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적 블록이고
그 블록은 나름대로 문화적 동일성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좋다. 정치경제적 블록의 중요성은 나름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그를 뒷받침할 문화적 블록의 이념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아는가? 그 블록이 다른 아시아 지역에 대하여, 예를 들자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보기에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는 인구와 발전 가능성을 근거로 매우 배타적인 블록으로 기획되곤 하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물음도 여기서 다시 제기된다. 왜 거기에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동양 개념을 투사시키는가?
철학적 실체가 근거에 놓여있기에? 그러나 동양 철학이라는 실체, 더구나 지금의 동아시아 삼국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을 실체,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아직도 유교적 그리고
(아니면, 혹은) 도가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지 않느냐고? '동양적 전통의 현재성',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경험주의적 전제가 아닐까? 개념적으로 명확한 내용을 가지기는커녕 요란한 소리만 내는 깡통이 아닐까?
이 점을 암시하는 첫 번째 예로 김용옥의 노자·공자 개그를 들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동양 사상을 빙자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동시에 대중과 방송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복합체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문화권력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동양사상의 면면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허울을 강조한다.
2. 우리는 여기서 동양 담론의 현재적 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대안으로, 특히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을 생각한다.
앞에서 나는 극단적인 이질성을 이유로 그런 동질적인 동양이란 문화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적 전통이 질긴 동아줄 모양으로 우리를 붙들어매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듯하다. 그 유구함을 어쩔 수 없고 또 그 유구함을 어쩌겠냐는 게 그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변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잔존과 대안은 다른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자 사상은 중국적 전통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서양적 맥락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 문화가 그리스에서 태동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은폐와 왜곡이 있다.
그리스 문화는 많은 점에서 이집트를 본받았지만, 서양 문화는 이 점을 가린다.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서양, 이것조차도 서양적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적으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그리스
문화가 계속 발전하지도 않았고 지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 문화는 그리스라는 허구적인 근원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저 먼 가공의 서인도 미국까지.
그러나 동양에서는 거꾸로, 다행 중 불행인 것은, 중국 문화가 19 세기까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헤게모니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이천 년 가까이 된 문화적 패권주의, 이것을 되돌리고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다음으로 유가 사상의 가치와 인식의 중심은 정면론(正名論)에 근거한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자식은 자식노릇을 하는 것입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顔淵)
어떤 사람들은 이 동어반복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여기서 "∼다움"의 존재론을 투사하기도 한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적
정체성은 오늘날 회복되기 힘들다. 회복되면 좋은데 회복되기 힘들다는 말인가? 회복하는 것이 정말 좋은가?
그렇지 않다. 완전한 절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커먼 단절이 유가적 전통과 현재의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사회주의적 평등의 관습이 실행된 중국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바른
이름에 근거한 정당한 차이가 아니라, 신분호칭의 권력에 구성원들을 예속시킴으로써 정당한 개인의 형성을 막는
왜곡된 봉건적 정명론이다.
중요한 점이 또 있는데, 유가적 가치의 사회적 성격과 배경이다. 신분적 정명론에서 볼 수 있듯이, 유가적 가치는
철저하게 신분에 근거하고 있다. '군자'조차도 단순히 인격의 완성자가 아니라 지배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이며 그 근거 위에서 비로소 인격의 완성이 거론된다. 군자의 인격은 평등하거나 동등하지 않음에 크게 의존
한다는 말이다.
군자는 조화하지만 동등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등하나 조화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신분제 질서 자체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오늘의 시점에서 무조건
봉건적이라고 부정할 필요도 없으며, 그 질서에 기반한 공자의 사상을 봉건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신분적 질서는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름대로 '필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이러한 가치의 신분 의존성이 성리학을 해석하는 근대적 해석학에서 대부분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순수한 인격의 문제, 이기(理氣)·심·성을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은 당시의 현실
을 왜곡하는 가상이다.
동양에서 계속적으로 형성된 철학 혹은 문화의 탈정치화, 곧 탈정치화된 담론으로서의 유가 사상은 음모의 결과가
아닐까?
권력으로 작용하는 형이상학의 정체를 감추고 가리려는 음모.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려는 다양한 이해관계에서
생긴 음모.
그러던 것이 서양문화를 비판하는 대안으로 해서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제 도가는 유가적인 가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사회적 세계관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저 개인적인 태도의 차원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비판하는 기준
이자 동시에 대안으로 떠오를 때 도가에게는 엄청난 역사적 지평이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가는 근원적으로 유가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에 맞섰던 시원적 사상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유가가 규범적인 데 반하여 도가는 탈규범적이고, 유가가 정명론에 근거한다면 도가는 비명(非名)에 근거한다는
식이다.
심지어 서양에서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거치면서 형성된 해체론적 작업을 노자 텍스트에 투사하는 시도까지 생겼다.
그에 따르면 노자의 도(道)는 우주론적 실체가 아니라 해체적 방법이라고 해석되었다. 도가는 동양의 해체론이요,
해체론은 서양의 도가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서양에서 시작된 해체론적 작업의 의의까지 까먹는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론은 서양의 존재론을 그 근원에서부터 꼼꼼히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모든 텍스트에 틈입하여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내는 일.
그러나 노자의 텍스트가 그러한가? 도덕경은 그렇게 틈을 내는 텍스트에 못 미치는, 오천 자 남짓으로 이루어진
자기 암시적인 주장의 나열이다.
오천 자로 세상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과대망상이 아닌가?
세상은 온통 텍스트가 아닌가? 어떻게 그것을 단 오천 자로 정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서양의 해체론은 역사의 뒤에서 그 역사를 상대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그에 비하면 '노자의 해체'는 동양의 역사 맨 앞에서, 역사를 예상하며 역사를 결정한 셈이다.
그것을 해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비대해진 해체 중심주의가 아닐까?
이렇게 도가를 서양의 대안으로 삼는 일은 이미 동양 내부에서 비-해체적 단순화의 대가를 치른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분별이 보태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망상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따라서 천하를 취함에 있어서 항상 무욕으로 하지만 욕심으로 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而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故取天下 常而無事…, 48 장).
학문은 분별을 자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는 일과 이렇게 단순하게 대립된 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단순한 주장과 대립을 좋은 뜻의 해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세상을 취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하고 가린다.
마치 노자의 도가 순수한 해체적 방법이기만 한 듯이 말이다.
이러한 탈정치화는, 앞의 유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지한 왜곡 아니면 음모의 결과이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도가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탈 정치화의 정치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듯하다.
장차 움츠러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장차 쓰러지려고 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마땅히 보태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묘한 이치라 한다.
유약함은 강장함을 이기게 마련이므로 물고기는 연못의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유약함이라는 통치법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36 장)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채로 다스리는 법.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지만 그의 배는 채워 주고,
백성의 뜻은 약하게 하지만 그의 뼈를 단단하게 함으로써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하고 무욕하게 하여
지혜를 가진 자가 감히 일을 도모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이런 성인-왕의 치세술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닐 게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한 지배술일 것이다.
나쁜 일은 무엇인가? 도
가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고 일컫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꼽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 지배술이 알게 모르게 가려지는 일이다.
이런 절대군주적 지배술을 말하는 노자는 동양의 지배계급에 의해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권장되었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라는 것이.
4. 여기 철학적인, 매우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노자의 저 지배술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흔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그리고 해체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노자는 그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런 것들을 호명하기는 하지만, 그 호명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에서도 나왔듯이 장기적으로
세상을 취하고,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노자가 우주적 상징으로 내세우는 물에서 드러난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강한 것을 꺾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게 없으니, 물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강장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줄은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다
(78 장).
노자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강한 것을 꺾기 위해 부드러운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그리고 약한 것은 센 것을 이긴다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만 행사하지 못하는 데 다름 아닌 성인-왕이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한다고.
물론 이렇게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차원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도 꽤 많다.
그리고 그것을 활동하는 것이 처세와 치세의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물의 상징을 빌려 말하듯이,
낮은 곳에 있고 미미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기고 지배하기 위하여 높이 평가된
다면, 그런 현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현명함은 노회함과 음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왜 강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 강한 것은 다시 강한 것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다.
노자의 무위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다스리는 법이다.
노자가 말하는 암컷의 현묘함도 이런 최종적인 이기기의 목적 속에서 기획되고 계획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토록 칭송되는 무위(無爲)조차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백성을 마음을 비우고 배만 채워주면 족하
다는 구절은 끝부분을 읽어보자.
이와 같이 성인이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무위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정치, 자연의 정치이다.
물의 현묘한 겸손은 은근하고 노회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기만 한 것일까? 지나치게 노회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장기적으로는 물이 바위도 뚫고 불로 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다만 그런 장기적인
기획만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실천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냥 이기지 않기로 끝나는 수도 많다. 때로는 불과 같이 타오르는 때도 있고, 때로는 흙처럼 질퍽하거나
푸석거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그저 바람처럼 순간 속에서 명멸할 수도 있다. 이것들이 오히려 더 이름 없음에 가깝지
않은가?
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해체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많은 경우 해체의 대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해체론을 절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노자가 해체 중심적으로 숭배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해체는 화려한 이름으로 남는 이론이 아니다.
차라리 끝없이 탈이 나고 또 탈을 내면서 이탈하기, 어쩔 수 없이 혹은 알면서 탈을 쓰고 또 탈을 쓰기,
곧 탈탈탈 거리기의 과정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한 가지 점만 더 검토하자.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험과 위기를 이야기하는 담론이 흔히 의존하는 노자의 이념이 있다.
자연. 그러나 나는 이 개념조차 해체론 혹은 환경 생태론의 이름을 빌려 가상화되고 있는 점이 많다고 여긴다.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은 소중한 이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노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물로 상징되는 저절로
그러함만을 숭상한다. 상대를 앞에서 공격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노회한 방법.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듦
으로써 지배하는 방법.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을 끊고 의를 잊으면 백성은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며, 기교를 끊고 지혜를 놓으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絶聖棄智 民利白培,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絶智 盜賊無有, 19 장)
다른 문제는 무엇일까? 유가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 지배자-군자의 성격에 대한 평가. 그 군자가 대표하고 대변한
가치는 어떤 성격을 지녔을까? 인과 예에 근거하는 한, 그 가치는 도덕주의의 성향을 띨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덕주의는 어떤 성향인가? 흔히 그것을 동양적 인문주의의 시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원한 곧 르쌍티망(Ressentiments)의 도덕이 아닐까?
3. 이제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다른 동양적인 것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유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양한 방향에서 환영을 받은 것. 특히 서양의 기술문명을 극복한다는 신과학,
그리고 서양의 근원적 근대성에서 이탈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에 의해서까지 재발견되고 찬송 받은 것.
알다시피 그것은 도가(道家)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관점을 다 살피는 대신 서양을 비판한다는 시도가 어떻게
도가를 동양 내부에서 구성하고 해석하는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그 분석을 하기 앞서, 이런 역할을 떠맡기 전에 도가는 흔히 무엇으로 여겨졌는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자의 텍스트에 꼭 맞는 해석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도가는 흔히 개인적인 은둔을 강조한 세계관이라고 알려
졌었다. 무위자연도 많은 경우 이런 범주 아래에서 이해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도가는 유가적 수신제가치국과 직접 부딪치기보다는 그것과 피하거나 그것에서 조용히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집단적 훈육을 비웃는 태도로 보였다는 것은 도가가 비교적 개인적인 몸가짐의 차원을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는 말이다. 곧 그것은 동양 내부에서도 사회적 대안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구할
도망가고 피하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러움의 극치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원시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념조차도 이 상태에 있다. 물론 그 원시성이 나쁘지는 않고, 우리 모두 때대로 동경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때이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순백으로 부정하고 비난하기 이한 이데올로기. 나는 오히려 말한다,
인간 문화는 이미 그 처음부터 위험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자연 상태가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못지 않게 문화는 쓸데없는 행위의 가벼움 속에서, 아니 가벼운 것만은
아닌 쓸데없는 행위의 무모한 열정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서양문명의 위기와 한달음에 노자의 자연을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서양문명의 위기를 기술에서 찾는다.
특히 철학적인 담론은 기술의 과학주의뿐 아니라 그것 뒤의 존재론적 구조를 문제삼는다.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기술론은 그러한 담론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이 초래하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기술에 모든 책임을 묻는 그런
위기론이 매우 피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제스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매우 상투적인 비판에 그치는 때도 많다. 자, 한 번 보자. 자본주의의 위험이 다만 기술에서 유발되는
것인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그 기술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하는 존재론적 망각 때문인가?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공허해지기 쉬운 지점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가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면서 생산력을 확대
하는 괴물 같은 '자본'에 힘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구가하는 개인들의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억압받고 빼앗기는 층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자유와 평등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 욕망에 제 영혼을
태우고 있다. 이 점을 망각하는 동양 대안론이야말로 공허하다.
동양적 해석학만이 허구적인가? 필자는 단순히 서양철학자의 자리에서 동양-대안론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서양 중심의 해석학도 마찬가지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과거의 해석학은 오늘을 위해 제한된 효과밖에 가지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단절이 있다. 시퍼렇고 시커먼 단절. 인문학 자체가 거기에 빠져 허둥거리고 휘청
거린다.
[논쟁] 동양담론의 성격 - 김진석 교수에 대한 반론
김진석 교수의 '동양담론의 공허함'의 공허함
이 글은 본지 지난호(203호)에 실린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의 '동양담론의 공허함'에 대한 반론이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노자, 공자등의 동양담론의 가진 지배논리적 성격을 비판하고, 최근의 동양담론에대한 해체론적 논의가
가진 문제를 비판한바 있다. 이에 대해 동양철학 전공자인 김성환 군산대 교수(철학)가 반론을 기고해왔다.
도올 김용옥의 강의를 통해 유포된 이른바 '동양담론'이 스타일과 포즈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현대적
해석'을 둘러싼 '훈고학적 논의'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면, 이 두글은 '동양담론의 성격'을 본격적
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한국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은 아니다"라는 김진석교수의 선언은 우리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양'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너무나 이질적인 덩어리이고, 서양에 의해 구획되어 그 자신에
대립된 것으로 기획된 추상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동양'은 실체가 없으며, 이처럼 실체가 불분명한 '동양'을 내걸고 제기되는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담론은
모두 근거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교수의 글을 차분히 읽으면서, 스스로 동양인이기를 거절한 과감한 발언에서 발동된 호기심은 이내 공허함
으로 바뀐다. 그의 주장이 전혀 새롭지 않을뿐더러, 내용마저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당신들이 한국사람이지만 동양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발 우리 모두가 동양인이 아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말라.
우선 '동양'은 너무나 이질적인 덩어리라는 주장. 그의 말처럼 Asia를 지칭하는 의미의 '동양'은 중동에서 동아시아
에 이르기까지 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언어 관습에서 '동양'이 아시아 전역보다 주로 동아시아를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동양철학' 혹은 '동양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보통 한·중·일을 전제로 하는 것은 일종의 언어 습관이다.
물론 이것은 그 언어사용의 엄정성에 있어 분명 문제가 있으며, 필자 역시 오래 전부터 우리 언어에서 '동양'과
'동아시아'가 보다 엄격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김진석교수는 이런 언어 규약 상의 혼란을 곧 실체의 부재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동양'이라는 말을 통해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것이 언어사용의 오류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의 문화적 정체로서 동아시아의 실체를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양인이기를 거부하는 김교수는 반드시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부인해야 하며, 나름대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도는 다시 건너지 말아야할 비약의 강을 넘는다.
"동양철학이라는 실체, 더구나 지금의 동아시아 삼국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을 실체,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거의 없다"는 발언은 그 자신이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사상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현재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문화가 서구문화의 폭격에 거의 초토화된 것은 틀림없지만, 과거 동아시아 문화의
근저에 유교·도교 등의 사상적 실체가 없었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없다.
김교수의 글에 관통되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은 서구가 곧 보편의 잣대라는 독단이다. 예컨대 "서양문화는 그리스
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는 찬미가 "동양에서는 중국문화가 19세기까지 문화적 헤게모니를
유지했다"는 그래서 "이 천년 가까이된 문화적 패권주의를 되돌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억지의 배경이 된다.
김교수는 은연중 이 땅의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중국의 문화적 패권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
지만, 이것은 서구 문화에 기생해 엄청난 문화권력을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으름장에
불과하다. 사실 '동양담론'을 업으로 삼는 우리는 김교수의 말과 달리 중국의 문화적 패권에 일말의 향수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 동안 홀시 되어온 동아시아의 전통 가운데 의미 있는 사상과 문화를 발굴·재해석하여 인류
에게 되돌리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패권에 대한 질문은 반대로 필자가 김교수에게 던지고 싶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이야말로 잔인한 식민지 확장
을 통해 범지구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강제이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그
패권을 강요하지 않는가? 게다가 김교수 같은 식자들이야말로 지난 백년 동안 이 땅에서 서구의 패권에 의지해
거대한 문화·사상·학술적 권력을 누려오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미약한 동양철학 연구를 '문화권력'으로
몰아세우고, 그 담론의 씨를 말리려 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김교수가 '개그'라고 빈정거리는 김용옥의 노자·공자 강의는 그의 말처럼 모종의 '문화권력'일 수 있다.
그런데 김교수는 김용옥 강의의 '문화권력'화를 동양담론 전체의 문화권력으로, 그리고 김용옥강의의 공허함을
동양사상 자체의 공허함으로 비약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음모가 아닐까? 빌미를 잡은 김에 철학 혹은 인문학적 '동양'을 말살하려는 음모. 그리고 '서양'에
기생한 자신의 거대한 문화권력을 유지하려는 이해관계에서 생긴 음모.
사실 김교수의 비난과 달리, '동양' 전공자들은 오히려 대학과 학계에 압도적인 '서양' 학문의 패권, 그 문화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적잖이 시달리고 있다. 김교수는 동양철학자들이 과거의 동양을 되돌리려한다고 모함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를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계승과 동·서 문화의 화해 혹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서양철학자 가운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작업에 동참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필자는 김교수의 글에서 선언적 논리에 의거해 학문의 서구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독단, 철학의 살집에 끼여든
'동양'이라는 가시를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투정, 동양이 조금이라도 주목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질투 이상을 발견
하지 못한다. 김교수는 본인의 주장이 얼마나 빈약한 근거와 비약 그리고 감정적 노여움과 질투에 근거하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동양'에 대한 거친 부정이 자신의 지적·정신적 빈곤의 소산임을 노출시킬 뿐이다.
한 예로 유가사상이 신분제를 옹호했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김교수식의 논리에 따른다면, 마찬가지로
계급질서를 옹호했던 근대 이전의 거의 모든 서양철학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교수는 그런 교조적 단순화의 논리가 이미 반세기 전에나 통했음직한 억지임을 모르는 모양이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필자조차도 그의 이런 지적 무모함에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그밖에 유가와 도가에 대한 그의 구체적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것은 주어진 지면의 제한이 가장 큰 이유지만,
동양철학에 대한 그의 공부가 너무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이를 반박할 흥미가 유발되지 않는 탓도 있다.
[지상논쟁] 동양담론의 성격-김성환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김진석 교수가 지난호에 실린 김성환 교수의 반론(본지 204호)에 대한 반박문을 기고해왔다.
동양담론에 대한 김교수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이 논쟁은 동양담론의 지배논리적 성격, 동양담론의 현실적 유효성,
노자의 해체적 해석 등을 핵심화두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유가와 도가의 현대적 독해가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이 논쟁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전통, 그리고 전통의 현대적 재구성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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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인하대·철학
지적 토론과 논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글을 제대로 읽어야 할 터인데, 김성환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필자
강연의 중요 주제는 건너뛰면서 감정적인 비난을 일삼고 있다.
우선 마치 내가 “서양문화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고 말하면서 서양적 잣대를 옹호
한 것처럼 글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김 교수는 사과해야 마땅하다. 나는 오히려 거꾸로, 이제까지 그리스에서 시작
하여 서양문화를 구성했던 그리스 근원주의도 추상적 동양주의와 마찬가지로 의심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집트 및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비서양적’ 유산을 배제한 서양적 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서양 전통을 비판하는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것이 이제까지 본인 작업의 한 축이었다.
물론 그런 비판조차도 서양 역사를 일정하게 반복하는 한계를 가진다고 처음부터 지적했다.
그렇기에 본인은 서양적 해체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나, 새로운 한국어 개념들(‘탈’ 형이상학, 초월에서 ‘匍越’로, 소외
에서 ‘疎內’로)을 생산하며 현실을 분석하고 서술하려고 했다.
전공분야에서 누가 더 공부를 많이 했느냐고 따지는 유아적 콤플렉스라니! 자신의 분야에 대한 타자의 비판을 전혀
수용하지 않으려는 기득권 집단의 잘못된 권위 아닌가.
중요한 것은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된 글과 텍스트에 근거하여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다.
‘서양’전공자이니 동양고전해석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치졸한 편견을 남용할 필요 없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의 전통을
폐쇄적으로 구축하는 문화권력은, 전공을 넘어서, 지적돼야 한다. 김용옥에 대한 필자의 다른 글도 어느 해석이 옳
으냐 혹은 누가 자격이 있느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상징의 비-시대적 권력화를 문제삼은 것이다.
또 서양문명이 역사적으로 패권주의적 성향을 띤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서양식’으로는 아무 비판도 할 수 없다
는 말도 비약이다. 동아시아 고전들도 현대 언어로 번역돼야 하지 않는가.
텍스트 근거한 타전공자 비판 수용해야
다만 필자의 글 중에 한가지 본의 아닌 실수가 있다. 유가적 전통 중에서 정명론을 비롯한 수양론 부분만 짧게 언급한
것은, 강연 원고가 주로 노자 쪽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본인도 유가에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상대적으로 부정적인)과 구별되는 사회적 실천의 측면(상대적으로 중립적이
거나 긍정적인)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또 관습적 정명론만을 강조했다면서 유가에 노자를 대립시키고, 후자를 해체적-무위자연적인 사유라고 해석하는 데
반대한다(몇 년 전 해체론적 노자 해석에 대한 논평에서도 그 의견을 표명했었다). 다만 당시에 의미를 가졌던 유가
의 실천적 가치를 지금 회복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말꼬리를 만드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김 교수가 전혀 건드리지 않은 논점을 다시 정리하겠다.
노자를 동양의 해체론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첫째,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해석조차 서구적 편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노자’가 말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은 문명의 복잡한
문제를 해체적으로 비판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 같은 부드러움’ ‘여성성’ ‘무위’는 흔히 말해지는
것처럼 ‘해체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데리다 류의 해체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데리다가 서양 중심적 사유를 니체적 전복 방식에 따라 해체적으로 연장한 성과는 인정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해체론은 지나치게 텍스트 내부에서 움직인다. 그런 해체론은 자신의 텍스트를 풍부하게 보존한 서양
에서만 작동 가능할 뿐이며, 유산이 상실된 한국 같은 주변부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인문학에서 가능한 한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를 구분할 것을 제안해왔지만, 그렇다고 동아시아의
인문적 유산인 유가와 노자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그 두 연구 방향을 혼돈하지 말자는 것이다. 생태 위기
의 와중에서 근본주의적으로 자연을 총체적-추상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오류를 노자에 대하여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실천으로서 엄연히 필요한 유위의 맥락을 초월하여 무위를 숭배하는 일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양식 있는 동양학 연구자라면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자연에 대한 지배는 역사적으로 사실이지만, 자연에 대한 문명의
관계는 인간사회 안에서 이미 존재하는 많은 지배질서(성·계급·인종·종교에 따른)와의 연관 속에서 다뤄야지, 독립된
추상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데카르트 이래의 이성이 자연을 지배했다고 하는 말도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철학, 추상적 관념성에서 벗어나야
또 서양의 기술이 자연을 지배했다고 말하는 것도 역설적으로 기술결정론에 빠지기 쉬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문명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에 의존하는데, 그의 기술론이 서양사유를 비판한 성과는 인정되더라도, 오늘
되돌아보면 서구의 존재론적 역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궤적 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술 발전의 악영향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 역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점차 최고의 가치가 된 개인의 정치
경제적 자유, 합리주의적 통제의 자장 속에서 실현된 수명연장·인구증가·복지정책 등과 함께 판단되어야 한다.
기술의 지배는 통제와 자유가 동시에 강화된 ‘민주주의적 역설’의 차원에서 성찰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은 자신의 추상적 관념성을 먼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동양담론논쟁] 김진석 교수에 대한 재반박
김성환/군산대·철학
김진석 교수는 필자가 그의 글에 대해 “서양적 잣대를 옹호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했다”며, 이를 사과하라고
요구해왔다. 사실 서양 전통을 비판-해체하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런데 김 교수는 다른 글(‘철학의 광신적 대중화-김용옥의 경우’, ‘사회비평’ 27호)에서 이렇게 천명한 바 있다.
“비판 행위의 정당성은 비판의 내용 못지 않게 비판하는 자의 자기 비판 태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 교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우선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분을 전체로 확대한 오류
분명 문화권력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우리 학계의 서구 지향적 문화권력에 중독돼 있지
않은가. 동양 중심의 해석학뿐만 아니라 서양 중심의 해석학도 비판받아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서양 중심의 해석학으로 ‘동양’과 ‘동양철학’을 멋대로 재단하지 않는가. 서양적 해체 중심주의
에서 벗어나 새롭게 현실을 분석하고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해체’가 서양 텍스트의
틀 내에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라고 여기며, 동양사상과 해체론의 조우 자체를 부인하는 또 다른 서구적 ‘해체’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김 교수가 학문의 서구적 패권과 문화권력을 유지
하려는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의 글에 ‘서구가 곧 보편의 잣대라는 독단’이 근원적으로 관철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동양에 대해 ‘서양식’으로 아무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비약할 필요는 없다.
진지하고 공정하며 설득력 있다면, 서양적 관점 혹은 다른 어떤 관점에서라도 ‘동양’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란 없다.
그렇지만 ‘동양담론의 공허함’에서와 같이 전공 학계의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초보적 검토조차 생략한 채, 동양담론
전체가 ‘요란한 소리만 내는 깡통’이라고 매도하는 식의 선동적 독설마저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 자신의 말처럼 “진득하고 고독한 작업을 외면하고 요란한 문제 제기와 대중용 지식 전시에 중독”되어 그
자체를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전공 분야에서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김 교수와 전적으로 견해를 달리하지 않는다. 요컨대 동·서양을 막론한 철학적 해석작업에서 구체성과
실천성이 결여된 ‘추상적 관념성’이 비판돼야 한다는 것, 과거의 텍스트-경전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신화가 폐기돼야
한다는 것, 인문학에 있어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의 시대적 맥락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에서 필자는
그와 생각을 같이한다. 어찌 필자뿐이랴. 적지 않은 동양철학 전공자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공유해 왔다.
그러니 한국의 모든 동양철학자가 동양철학의 추상화와 경전의 신화화에 매달린다거나 시대착오적이라는 등의
무책임한 비난은 그만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방적 매도가 아닌 상대가 있는 토론과 논쟁을 바란다면 말이다.
이제 필자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고 김 교수가 지적한 문제를 다루겠다. 그는 노자를 해체론과 연관짓고 도가사상
을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해체론이 서구적 텍스트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
이며, ‘해체’가 서양 후기근대의 역사적 맥락에서만 발생 가능한 사건이라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탈현대적 해체론은 오히려 역사가 체계의 논리성 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혹은 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런데도 ‘해체’가 일정한 역사적 흐름의 어떤 시점에서만 가능한 사건이라고 단정짓는
다면, 이야말로 해체론적 작업의 의의를 결정적으로 까먹는 것이다.
독불장군 격의 해석학에 불과
노자가 해체의 ‘대상’ 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노자의 ‘무위’는 비열한 지배술과 우민정치의 음모에 불과하다.
‘자연’ 역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노회한 통치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
으로, 노자를 ‘해체’한다기보다 강제로 철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노자 해석에 동의할 전문가는 거의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제 그들 모두를 다시 ‘추상적 관념성’의
노예로 매도하고 말 것인가. (이 문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다룰 예정이다.) 김 교수는 또한 노자의 자연을 말하는
사람들이 서양 문명의 위기를 기술에서만 찾는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논문에서 도가의 사상을 논의하며,
문명의 위기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계와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밝힌 바 있는 필자는 이를 수긍
할 수 없다. 학계의 기존 연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이런 독불장군격의 해석학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해체’는 종종 파괴와 부정 자체로 평가절하 되곤 한다. 하지만 지난 것은 무조건 부수고 보는 것이 해체인가.
아니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의 말처럼 해체는 오히려 ‘옛 것을 부수어 새 것을 얻자’는 것이고, 이렇게 말할 때
해체론자는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이 아닌 지독한 문헌학자이다. 해체론은 편견 없이 동서양의 사상사적 전통을
溫故知新하는 방법을 역설하며, 그렇기에 데리다가 다시 수 천년 전 중국의 도가 사상가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해체의 ‘이념’, 동서양 공유
보다 중요한 것은 해체의 정신-이념이다. 만일 해체를 지도하는 ‘이념’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김상환 교수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고유한 내면성과 사유욕으로부터의 해탈, 절대적 無慾이리라.” 탈현대의
해체는 이런 ‘이념’을 공유하는 지점에서 노자·장자와 연대하며, 더 나아가 은유의 강조·差延의 해석·시비분별에
대한 관점·지배질서 해체의 전략 등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탈현대의 해체론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래된 도가 문헌의 먼지를 털고 책장을 다시 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시대착오적 음모인가. 우리는 분명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를 혼동하지 않지만, 전통에 대한 재
해석을 통해 ‘새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동·서를 부수고 형이상학을 부수며 체계 속의
역사도 허물어 더 이상 부술 것 없는 텅 빈 마당에서 데리다와 노자·장자가 만나고, 하이데거가 붓다를 만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들이 함께 오늘의 문제와 내일의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녕 그리도 ‘잘못된 만남’이란 말인가.
동양[기획대담담론은 새로운 세기의 대안인가]
본지 203호부터 206호까지 계속된 '동양담론' 논쟁의 결산 대담이다. 애초 김진석 인하대 교수와 김성환 군산대
교수간의 논쟁으로 시작된 이 논쟁은 이른바 '동양담론'의 대안적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마무리 좌담에는
최초의 문제제기자인 김진석 교수와 동양철학을 전공한 정세근 충북대 교수가 참여했다.
교수신문 '동양담론 논쟁'을 돌아본다
정세근 : 이 논쟁에서 동양철학자가 반발한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동양철학자들도 옥시덴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서양철학자가 옥시덴탈리즘이라 비판했기 때문이죠. 서양철학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동양철학, 그것도 유가에게 '핍박' 받아왔던 도가를 비판했으니 반발이 더 컸을 겁니다.
서양철학자들은 동양의 옥시덴탈리즘 비판과 함께 서양의 오리엔탈리즘도 비판해야 합니다.
기독교 문명권과 유교 및 회교 문명권의 전쟁 시나리오인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대해 제대로 비판해본
적이 있나요. 오히려 독일학자가 나서서 문명의 충돌이 아닌 '화해'를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용옥의 경우, 이런 전쟁 와중에서 나온 도승의 '고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터졌는데 고승이 한마디 한다고
달라지진 않죠. 그의 가장 큰 오류는 노자와 공자가 모두 옳다는 데 있습니다.
도가와 유가는 치열하게 서로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해를 하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거야말로 철학적이지 않은 접근입니다. 그는 훌륭한 번역자이지, 당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자는 아닙니다.
김진석 : 저 스스로 서양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플라톤 이래의 서양중심적 철학을 비판
하는 작업을 해왔고, 논쟁의 출발이 된 처음 글에서도 동양학만이 아니라 서양학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동양철학 혹은 도가가 처한 현실적이며 우울한 상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저의 논점이 일방적
으로 '서양패권주의'로 왜곡된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저는 동양철학자들에게 간곡히 요구합니다, 서양철학(자)을 기꺼이 비판하라고요.
전공이 다르다거나 할 수 있는데 안 한다고 둘러대지 말라고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안 한다고 말하지 말라고요.
안 하는 것은 대부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서양을 나누는 잘못된 칸막이가 없어질 겁니다.
동양과 서양의 구분에 대해 저는 비판적입니다. 中體西用, 和魂洋才와 달리 東道西器에서 문화적 주체가 매우
불분명하고, 동양을 관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틀림없이 있으니까요.
정 : 동의합니다. 서양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을 하기 때문에 쉽게 타자화할 수 있지만, 동양철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철학, 한국철학, 일본철학 식으로 나누려 하지만, 슬그머니 동양이라는 말을 빌리기도 합니다.
동양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편애하는 경향은 문제지요. 한국의 '동양철학자'는 동양철학과 '한국철학'을 모두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더 버거운 형편입니다.
이런 구분이 공고화된 것은 대학제도의 측면도 있겠지만, 철학자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노자 전공자가 열명 밖에 안된다면 무슨 얘기가 되겠습니까. 기초가 쌓여야 할말도 있고, '東西'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 : '서양철학자'도 서양과 한국을 동시에 해야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운명입니다. 또 오늘날 문제는 인문학자의
수가 적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과잉이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축적된 학자의 수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어느 대학에는 철학과 대학원생이 학부생의 몇 배인 1백50명을 넘고, 국문학과는 2백50명이 되더군요.
동서양 철학이 이렇게 서로 백안시하는 상황에서 저는 차라리 동양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은 동양학부로, 서양 고전
을 해석하는 사람은 서양학부로, 그리고 우리시대의 당면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은 따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동서양철학의 구분은 한국화, 동양화, 서양화의 구분만큼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의 틀 안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지, 해석의 문제를 두고 내가 더 공부했다, 누구는 전공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일입니다. 철학과 폐지와 맞물려 의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구분이 철학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봅니다.
정 : 동서의 구분을 넘어서야 한다는 철학의 '보편성'에 관한 논쟁에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양
철학자였습니다. 동양철학자는 부정적이었죠. 철학이 보편적이라고 해도, 모든 문제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학자 촘스키가 말하듯이 현재 문제삼아야할 '보편성'은 미국적 보편주의입니다.
미국 철학계에서 활동하는 김재권 박사의 물리주의는 '현대유물론'입니다. 그의 업적은 미국의 이익과 적지 않게
맞물려 있죠.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은 서양철학계 내부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가의 현대적 해석, 어떻게 볼 것인가
정 : 유가사상은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공자의 宗法제도를 보죠. 이 제도는 가부장제의 전형이자 그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정주영회장 때의 현대그룹처럼 말입니다. 공자는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그 당시의 정치적 여건
속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공자에 대한 비판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 공자
를 비판했을 때 그에 대한 찬성 글을 쓴 것도 양적인 중용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제대로 된 비판은 불가능하지요.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80년대 미국의 논의를 90년대 들어와서
반복하는 상황도 우스운 것입니다.
그 개념은 싱가폴의 이광요가 자신의 정치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양한 것인데 말입니다.
사회과학자들이 유가 등의 동양철학을 수용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속에 어떤 환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입니다. 공자 노자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고대의 논의만을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김 : 일단 공자나 노자가 봉건적이었다는 단순한 비판은 경계해야겠지요. 오늘의 척도를 과거에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고 또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 안에서 그들의 사상적 텍스트는 나름대로 가치를 가집니다.
그런데 유가의 사회철학적 측면을 긍정하더라도, 수양론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수양이 있고 사회적 차원의 수양이 있다면, 당시는 인본주의적 원칙이 작동하는 비교적 단순한 사회
였기에 이 두 측면 사이에 어느 정도 통합적인 조화가 가능했죠.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두 측면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유가처럼 도덕적 수양을 사회적 실천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설정한다면, 오늘날 너무 이상적인 도적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선정적인 분위기를 비판한다면서
다시 선정적으로 도덕을 빙자하는 일을 '선정적 도덕주의'라 할 수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 선정적 도덕주의에
빠지는 실수를 계속 반복합니다.
정 :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대형사고가 터지면, '안전불감증' 운운하면서 전국민의 도덕성을 문제삼습니다.
대체 성수대교 붕괴와 국민 개인의 도덕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계해야할 수양일반론, 도덕제일론이지요. 개인에게 도덕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음모'일 겁니다.
유가의 '도'와 '덕'이라는 것은 현대적으로 '이론과 실천' 또는 x와 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는 비어있음, 虛位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대입이 필요하죠. 인의예지신을 오늘날의 문제에 대입시키자면, 예컨대 智 = 정보사회, 信 = 신용
사회같은 식이죠. 유가사상에 새로운 대입점을 찾는 작업, a와 b가 아니라 a', b'의 값을 찾는 작업이 현재의 철학
입니다.
김 : 사회적 분열과 혼돈의 와중에서 인격적 완성주의는 명백한 한계를 가집니다. 수양의 두 측면이 서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그 분열을 전제한 후에야, 아마도 개인이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덕목으로 '수양'을 설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가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 중국이 비교적 다양
하게 시도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국과 대만에는 탈정치화된 부분이 많고, 보편적인 인간의 수양으로
몰아가려는 경향이나 음모가 뿌리깊습니다. 더 나아가 유가의 정명론적 태도가, 사로 '차이'를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평등을 요구하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분석해야 합니다.
정 : 효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며느리는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리도 있는 겁니다. 종법제는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그 관계를 사회적으로 유비시킨 것이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가족 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친상을 당했다고 정치인이 임무를 방기해선 안되죠.
조건이 바뀐 사회에서 똑같이 충효를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중국의 현대 신유학을 연구하는 鄭家棟 교수가
퇴계의 집에 자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바로 그 점이 한국 유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타자화하고, 객관화해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유가의 발전은 전대에 대한 비판 속
에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한편, 저는 곳곳에 남아있는 향교를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립니다. 이게 현재에도 살아있는
단절되지 않은 전통이라는 사실 때문이죠. 하지만, 학회의 행사가 문중의 행사이기도 한 현실에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작업은 어렵습니다.
노자와 해체론은 접목될 수 있는가
정 : 노장과 해체론에 관해 동서양 학자들이 만나 함께 논문을 쓴 것은 매우 발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해체의 해체'라는 평문을 썼습니다. 노장이 해체론이라는 선언적인 문구만 있지, 노장 자체를 해체할 생각은 없더
군요. 이것과 저것이 같다라는 것은 무의미하죠. 진정한 해체의 작업이 수행되어야 입니다.
노장은 해체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인 거죠. 김진석 교수가 노자를 통치술로만 보신 것은 안타깝습니다.
노자사상도 역사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노자와 왕필이 다르고, 장자와 곽상이 다릅니다. 왕필은 '물'을 "사람은 모두
치도, 즉 다스림에 마땅히 응해야 한다.〔人應於治道〕"고 봅니다.
이점은 물은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데로 흐른다는 노자의 입장과 다릅니다. "말과 소의 고삐를 죄는게 자연〔天〕
인가, 인위〔人〕인가"라는 물음에 장자는 인위라고 보지만, 곽상은 마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命)이라고 봅
니다. 이런 곽상의 말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전체 속의 개인〔獨化於玄冥之境〕이라는 의미인데, 위험한 논리죠. 漢대, 魏晉 시대를 거치면서 노장학이 변질된
측면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노장학 자체의 저항적 측면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후대의 혁명가는 장자을 바탕
으로 혁명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장자에 평등과 자유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죠.
김 :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성외왕의 사상인 한 노자에도 통치술의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한국에서
그것이 거의 무시된 것이 아닐까요. 이제까지 정치적 변화가 중국처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힌 적이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노장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 관념화에 빠져 있고, '자연'이나 '무위'에 근거한 저항도 미미한 듯합니다.
지적인 차원에서도 '무위자연'은 실천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허위나 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지독하게 정치적이면서 말로는 쉽게 무위자연을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예로 김용옥은 "有爲는 인간세에 엄존하는 죄악"이며 "자본주의 시대에 교육은 철저히 비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
고 하는데, 저는 바로 이런 위선적인 무위자연을 비판하는 겁니다. 무위자연을 순백의 본질로 실체화하면서 형이
상학적 도덕주의로 빠지고 있으니까요. 인간은 유위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무위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직접적으로 무위에 도달한다고 믿는다면,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아닐까요. 무위자연을 우상화할 경우, 성·계급·인종
등의 사회적 맥락에서 추상되기 십상일 것이라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운동이나 저항의 측면에서, 또 개인적인
실천이나 공동체적 실천의 차원에서 '자연'적 태도를 강조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지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미세한 개념적 구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이념적인 불평등과 차이가 엄존하는데, 보편적인
무위자연만 강조하는 것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위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저는 노자에서 '물' '부드러움' '여성'이 내포한 추상적인 상징주의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정 : 그동안 저는 노자의 여성성을 계속 강조해왔습니다. 노자에게 여성성은 유약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죠.
이런 말은 여성학자들에게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런 노자의 여성성은 유가적 전통의 강한 체계에
저항하기 때문에 여성학자들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개념이죠. 물론, 공자, 맹자뿐만 아니라 노자, 장자도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김 : 균형이 중요합니다. 비판이 수용된다면 동서 구분없이 함께 할 수 있겠죠. '疏外에서 疎內로', '超越에서 匍越로'
등의 개념을 말하는 저는 동서양철학 모두에서 왕따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양철학자들은 그들이 서양철학에서 못
본 개념을 쓴다고 비판하고, 동양철학자들은 동양철학의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합니다.
해체론도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저는 데리다적 텍스트를 가지고 해체론을 하는 것은 반대
합니다. 동서의 맥락이 다르기도 하고 데리다는 지나치게 텍스트 중심주의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죠.
데리다적 해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계속 반복하는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개념들이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지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노자를 해체론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유보적입
니다. 노자를 데리다적으로 보는 것으로 20년 전에 이미 외국에서 했던 작업이죠. 지금에 와서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맥락이 맞질 않습니다.
'철학의 현실화, 현실의 철학화'라는 과제
정 : 우리 현실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유가를 비판했다고 유림이 학자를 고발하기도 하고, 심도있는 작업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매체지향형 엔터테이너가 되어 가고, 동서양 철학이 각자 일방통행하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처럼 역설적입니다. 소로스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는 포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퀀텀펀드의 이사장이기도 하죠. 인권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생명공학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도 있죠. 이같은 '문제현실'들이 바로 '한국철학'을 하는 대전제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글쓰기가 공허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변의 시대에서 수사의 시대로, 사색의 시대에서 표현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해도 착실한 글쓰기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스웨덴의 웁살라대학 강당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위대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은 더 위대하다"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또,지금의 철학계에는 '전공주의' 타파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비판이 가능합니다. 저는 학제성이 아니라 學內性을 강조합니다. 노자와 공자도 못만나는데, 어떻게 동서가 만날 수 있습니까. 이제는 같음에서 다름으로 나갈 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노자와 데리다가 같다는 하위수준보다 노장과 데리다가 다르다는 상위수준에서 우리의 문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김 : 철학과도 폐지되는 상황이고, 철학교수들조차도 서로 대화가 안 되는 마당입니다. 저는 모든 대학에 철학과가 있어야 한다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이 일정하게 축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학·경제학·과학 기술·문화 예술 영역과 섞여야지요. 노자 공자만 끝없이 해석하고, 칸트 데카르트를 끝없이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철학계의 자기성찰이 부족합니다. 한 예. 윤리교육에 관한 교육학과의 입장을 비판한 것은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윤리의 부재가 철학이나 윤리교육의 부재 때문이라는 철학계의 대응은 철학의 폐쇄성을 보여주었다고 여겨집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죠. 고전만을 공부하는 철학은 사회변화를 직접 유도하기는커녕, 사회적인 맥락을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동서양의 커다란 텍스트에만 빠져있지 말고, 구체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현실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정 : 다른 단과대의 교수들은 우리 사회에 '철학'이 없어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과 육성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되물으면 '그건 당신들 문제'라고 합니다. 말로는 철학이 문제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문화
권력의 폭력으로나 맛뵈기로 철학을 접하고 있는 실정이죠. 철학이 상실되는 상황이지만, 문명비판의 역할이나
인문학적 교양, 종교적 위안의 역할은 여전히 철학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김 : 그러나 이른바 '철학위기론'에는 공허함이 있고, '철학의 부재가 문제'라는 말에도 묘한 상투성과 이중성이 있죠.
말로는 주체적인 사상이 필요하다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철학교수는 동서양 고전 연구자에 불과한 상황이 아닌가요.
'탈'-형이상학, '疎外에서 疎內로', '超越에서 匍越로' 의 관점에서 글을 써온 저는 동서양철학계 양쪽에서 외면당
하고 있지요. 서양쪽은 서양적 개념이 아니라면서, 동양쪽은 '동양적'이지 않다면서 한국적인 작업을 싫어합니다.
철학 교수들은 진지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어요. 오늘날 철학은 유익하기보다는 해로운 게 아닐까, 라고. 인문학의
위기가 무엇보다도 철학에 닥친다면, 자초한 몫이 분명히 있다고. 고전 연구 혹은 도덕적 형이상학이라는 보호막을
빙자해 현실의 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이기 위해 철학은 자신이 자란 동서양의 칸막이와 고전이라는 '전공 변호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양담론논쟁을 마무리하며
동양담론에 대한 이상열기는 학계의 논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도올 김용옥 박사의 '노자강의'가 이 열기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이른바 '도올 논란'은 철학의 대중화에 대한 긍/부정론, 품위론 등 그를 둘러싼 논란은 오늘의
우리에게 동양담론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로 확대되지 못했다.
그 즈음,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가 연세대 대학원 학생회 주최의 강연에서 '동양담론의 공허함'이란 주제로
발표를 했다. 그의 주장은 21세기의 대안담론으로 떠오른 '동양담론'을 문제삼은 것으로 그 비판의 강도나 내용은
신랄했다. 그는 "'동'과 '서'라는 규정자체는 매우 단순한 추상성에 머물뿐만 아니라 솔직하지도 못한 개념"이며,
군주다움, 신하다움을 강조하는 儒家의 정명론은 신분호칭의 권력에 구성원을 예속시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道家의 경우도 고도의 지배술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노자는 해체의 주체라기 보다, 해체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노자와 해체론을 관련짓는 학계의 흐름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한국도가철학회'는 '노자에서 데리다까지'(예문서원 刊)에서 노자를 데리다적으로 해석하는
학술저작을 발표했다.
김진석 교수의 문제제기는 동양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간의 논쟁을 좀더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라고 판단,
그의 글을 본지 203호에 요약 게재했다. 동양철학계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비판", "논쟁할 가치가 없는
글"에서부터 "동양대안론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노자철학을 전공한 김성환 군산대 교수(철학)의 반론이 그 다음호에 게재되었다. 그의 비판은 격렬했다.
그는 "학문의 서구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독단, 철학의 살집에 끼여든 '동양'이라는 가시를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투정, 동양이 조금이라도 주목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질투"라고 못박았다. '동양개념'의 허구성 주장에 대해 그는
"하나의 문화적 정체로서 동아시아의 실체를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비판했다.
김진석 교수의 논리를 "서양패권주의"로 규정하는 김성환 교수의 글은 동양철학계가 처한 '현실적 이유'에서
설득력이 있다는 게 중평이었다. 동양철학은 그동안 대학제도 내에서 홀대 당해왔고, 교수수나 강좌에서 서양
철학에 비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히 낮았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 중심으로 재편되어 왔던 '강단
철학'의 역사적 구조가 새삼 문제되었던 것이다.
'관전평'을 보내온 최종덕 상지대 교수(철학)는 "동양철학의 간판을 걸고 장사하거나 전통생태주의를 빙자하여
개인의 보신주의에 빠져버린 주변상황을 볼 때 김진석 교수의 문제제기는 긍정적"이라면서도 공/노자 원전 인용은
편협적인 이해가 있고, 동양철학을 사회철학이란 측면을 배제하고 수양론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성환 교수에 대해서는 "또다른 패권주의의 면모"를 지적하며, 김진석 교수의 주된 논지를 빠뜨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진석 교수는 "유가에서 형이상학적 측면과 구별되는 사회적 실천의 측면"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했다는 점을 수긍했지만, "당시에 가졌던 유가의 실천적 가치를 지금 회복하기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반박문에서 김성환 교수는 노자와 해체론의 접목을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노자를 '해체'한다기보다 강제로
철거시키는 것"이라며, 데리다와 노장의 만남, 하이데거와 붓다의 만남은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탐문하는 작업이라 응수했다.
한정된 신문지면에서의 학술논쟁이란 불가피하게 단순화의 위험을 비할 수 없다. 두 차례의 공방이후, 한편의
논자가 "신문지상에서 할 수 있는 논쟁의 선을 넘었다"며 학술논문을 통해 본격적인 비판을 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서양철학자인 김상환 서울대 교수는 "재미있는 논쟁"이었다며 "앞으로 발전시켰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논쟁이 마무리될 무렵 도착한 정세근 충북대 교수(철학)의 논평문은 지상논쟁의 결론격에 해당되는 글이었다.
"데리다가 서구의 형이상학을 말하듯 우리는 동양의 철학적 기반을 물어야 한다. 요즈음이 후기 현대일 수 있는
까닭은 오늘이 제2의 현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의 현대'이기 때문이다. 그 현대의 정답으로 노장과 데리다가
반드시 제시되어야할 까닭은 없다.(...) 완전한 대안은 없다. 비판의 수행과 그 결과로서 철학만이 있을 뿐이다."
생산적인 논쟁을 찾아보기 드문 시대, 본지의 지상논쟁은 그동안 떠들썩한 풍문과 막연한 추상으로만 머물던 '동양
사상이라는 유령'의 실체를 한꺼풀 벗겨보는 작업이었다. 철학의 몫은 '과거의 해석학'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명과 성찰이다. 이 논쟁이 남긴 과제는 바로 그것이다.
'김진석-김성환 논쟁'을 보며
다름이 철학을 만든다
이 글은 김진석-김성환 교수의 논쟁을 보며, 정세근 교수가 기고해온 글이다. 동양철학자의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김진석 교수와의 대담을 요청하자, 정 교수는 그간의 논쟁에 대한 '독후감'을 보내온 것이다. 글 전문을
게재한다.
정 세 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신문사에서 대담자리가 있다며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들어보니 '만날 수 없는 사이'라든지 '아직
나서기 그렇다'든지 '이제 욕먹기 싫다'든지 하는 비학문적 용어가 학리적 탐구에 앞서 있었다. 정작 동서철학이
만나 짭잘하고 시원한 이야기를 해야 할 이 시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좀 더 발전적으로 개진하고자 종합하는
자세로 이 글을 쓴다. 어차피 기자가 보내온 논쟁문을 읽는 바람에 이미 시간은 빼앗긴 대로 빼앗긴 마당이다.
김진석 교수(인하대)는 동항(同行)의 말처럼 공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는 김상환(서울대), 최진석(서강대)
교수의 글 논평자로 나란히 자리에 오른 적 있고(1999.11.20. 서울대), 그 때 나는 그가 나와 많은 생각을 공유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다못해 쉬는 시간에, "김 교수의 '포월'(匍越)이란 용어는 특허내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인용 없이 그냥 쓰네요"라며 그의 철학적 창조성을 변호한 적도 있다(물론 오오하마 아키라의 '包越'
이라는 용어와 구별하여). 우리의 생각은 해체론이 나오자 노장이 해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공주의'의 혐을
벗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노장과 데리다가 아니라 진정 '개방성의 기원'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것이 인간, 사회, 윤리, 국가, 종족 그리고 수많은 판단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칸트가 나오면 모두 칸트, 하이덱거가 나오면 모두 하이덱거, 이런 식의 접근은 영원한 식민지학을 보장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입장은 오히려 김 교수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나야말로 전공주의는 배격하지만 이른바 전공이라는 것은
동양 그것도 노장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사회비평}에서 김용옥박사에 대해 장문의 논평을 써달라 왔을 때도
우리 학계의 '냉담제일'론을 거역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글도 자칫하면 배신자의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김 교수의 견해를 옹호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을 중체서용(中體西用)과 화용양재(和魂洋才)의 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은 내 철학개론의
첫부분이다. 일본만 하더라도 '중국철학사연구'라 하여 자기와 중국을 철저히 구별하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분류에
감감 무소식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 김성환 교수 의견의 타당성이 있다.
서양학에 치인 동양학, 서구의 보편이란 이름의 폭력, 그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마침내는 "철학의 살집에 끼어든
'동양'이라는 가시를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투정"과 질투, 이런 것들에 휩싸여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동양학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양철학전공자보다 많은 동양철학전공자(한국철학도 포함하여)가 있는 대학이 우리
나라에 있느냐는 말이다. 따라서 동양철학계를 잘못 건드리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울분이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의 철학 교수진 비율을 현행의 '서양철학2/3, 동양철학1/3'도 못되는 수치에서 이를테면 '서양(구미)
철학 1/3, 중국 및 일본철학1/3, 한국철학1/3으로 하자'고 할 때 받아들일 학과가 몇이냐 되냐는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 거기다가 '동양담론의 공허함'을 외쳤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진석 교수의 말을 잘 들어보자. 그는 동양이 곧 대안이라는 논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서양중심의 해석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김 교수는 솔직하며 학구적이다.
내가 보기에 김 교수의 문제는 '문제 자체'에 있지, 동서의 구별이나 호교론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같음을 만드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름이 철학을 만든다. 주자와 칸트의 다름, 나아가 공자와 강유위 및 장태염의 다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
레스 그리고 아퀴나스의 다름 때문에 철학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철학계에서 '다름'은 모독이고
무지이며 오독으로 간주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판이 곧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주는데도, 비판이 상정하고 있는
다름을 참아내지 못한다(졸고, [철학적 비교에서 같음과 다름], 범한철학23). 마치 주자와 다르면 큰일 날 것 같은
조선의 유생과도 같다(과거답안지 때문이라도).
그러나 다름만이 철학의 생명이고 인문학의 활력소이다. 달라야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김진석·김성환 교수의 논쟁이 마치 소모전과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나란히만 갈 뿐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서양철학자가 동양철학자보다 많이 알 수 없거나, 그 거꾸로인 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원칙적으로 '철학하고' 있지, '철학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사의 행위도 강단철학의 주된 과제임을 조금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은 철학하는 것이 아닌가?
철학을 할 때, 전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치열한 논지의 전개이다. 이를테면, '도가의 자연관이 생태론의 대안이다'
라는 명제는 당위적이지만 사실적이지 않고, 또한 '도가의 자연관은 생태론과 무관하다'는 명제는 선언적이지 추론
적이지 않다. 동양담론이 요란한 깡통이라면, 서양담론도 또한 조용한 요강일 뿐이다. 이렇듯 '경전에 대한 신성불
가침의 신화가 폐기'되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가 아닌가?
나는 오히려 요즘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많은 담론들이 멋진 수사에만 빠져, 읽을 때는 좋은 데 읽고 나서 남들에게
이야기하려면 금방 까먹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변중심의 시대에서 수사우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마치 주간지를 읽고 버릴 때처럼 텅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애무는 많이 하는 데 진정한
포옹은 온데 간데 없다.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조건 없는 포스트모던적 해체는 학문의 약육강식으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임을 다양한
수사로 주장하는 이왕주 교수(부산대)에게 한 적이 있는데(2001.6.2. 원광대), 그것은 애무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쾌감을 위해서임을 서로 확인하기도 했다.
김진석 교수는 동양을 잘 모른다. 김성환 교수는 동양을 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알고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지배질서(성·계급·인종·종교에 따른)'(김진석)를 파악하고 '구체성과 실천성이 결여된 추상적
관념성'(김성환)을 실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이데올로기의 과잉이겠는가?
최진덕, 최진석, 김진석과 정호근, 정세근이 어울어졌던 그 날의 발표된 논평문([해체의 해체])의 끝을 옮긴다.
"데리다가 서구의 형이상학을 말하듯, 우리는 동양의 철학적 기반을 물어야 한다. 요즈음이 후기 현대일 수 있는
까닭은 오늘이 제2의 현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의 현대'이기 때문이다. 그 현대의 정답으로 노장과 데리다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계보학의 부활이지, 그것이 계보학이었다는 진술이 아니다.
유가전통에 대한 오류의 계보학 뿐만 아니라 도가와 불가전통에 대한 시비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대안은
없다. 비판의 수행과 그 결과로서 철학만이 있을 뿐이다." 앞의 이야기는 요란한 깡통이라도 좋으니 동양의 역할을
희망하는 것이고, 반면 뒤의 이야기는 그것이 조용한 요강으로 끝나지 않기를 고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