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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十) 색 단풍 톺아보기
프롤로그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마루에서는 단풍의 불길이 밑으로 밑으로 타 내려오고 있다. 그냥 견디기에 겨워 산으로 나선다. 가까이 갈수록 단풍의 실체가 드러난다. 먼 데서는 잘 보이지 않던 단풍잎이 눈에 들어온다. 빨강, 노랑, 분홍, 주황…. 다양한 색깔들을 끌어안고 있다. 터득한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이토록 다양한 개성을 가진 것들이 제 성질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이번 《문학미디어》 가을호에는 단풍처럼 다양한 모습을 한 작품들이 함께 어우러져 부드럽게 빛을 발하고 있다.
가을호의 수필 문을 열기에 앞서 계절 풍경으로 반숙자 님의 <수레국화 핀 날>은 이 가을의 서정을 한껏 돋우는 글이었다. 여름날의 더위로 조금은 침침해진 눈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가을 단풍 구경을 떠나게 해 주고 있다.
단풍 열 잎 톺아보기
수필은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하여 생산하는 예술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삶 자체의 기록이 수필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일기이거나 전기이다. 즉 예술이 아닌 실용적 글이다. 여기서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 설정이 요구된다. 이 경계 설정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작가가 체험한 삶은 그 자체로서는 글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살면서 우리를 고뇌케 한 삶의 찌꺼기일 뿐이다. 그 찌꺼기를 문학적 소재로 바꾸기 위한 작가의 끝없는 노력이 따라 주어야 한다. 작품은 이 문학적 글감을 가지고 생산하는 것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삶의 편린이 문학의 범주에 들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석(낯설게 보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작가의 해석으로 글감이 함유한 본질을 찾게 되면 주제를 만들게 된다. 이쯤 되면 형상화(낯설게 하기)를 시도해도 무방하다.
송보영의 <생과 사의 행간에 대하여>는 일생을 같이한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 그동안의 삶과 현재의 삶을 반추하는 글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반려자가 떠나면 슬픈 마음을 다스리기에 여념이 없다. 사별하면 영원한 이별이 되고, 그로 인한 외로움을 감내치 못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현명한 작가는 남의 흉내나 내는 글은 쓰려 하지 않는다. 나름의 해석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을 파악하려 한다. 작가 송보영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만의 해석을 들고나온다. 결코 남편이 떠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함께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두 부부의 그동안 삶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고, 행복한 부부였음을 독자에게 웅변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가 아주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생겨난 형체가 사라졌을 뿐 영혼은 살아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이는 그와 여전히 대화한다. 부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 속에서 떠난 사람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기에 사후의 사랑도 자랄 수 있다. <헬리라우어>”는 말을 믿는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따사로운 숨결로 내 곁에 머물고 있다. 형체는 바뀌었지만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내 곁에 머물면서 함께 호흡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에게 일상을 이야기한다. -송보영의 <생과 사의 행간에 대하여>에서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전혀 다르다.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영혼은 살아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대화하고,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발견하고, 계속 사랑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이같이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글감에 대해 나름의 특별한 해석을 내림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이 특별한 해석이 없다면 굳이 작가라 하여 따로 구분할 이유가 없다. 이 과정이 없이 자신의 경험만을 줄글로 내리 적은 글은 결코 수필이 아니다.
배명란의 <풀꽃의 시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었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 거리두기가 끝나고 자유로워진 현실에서 팬데믹의 후유증을 글감으로 하고 있다. 작가 배명란, 역시 이 글감을 작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오히려 벗어서 알아볼 수 없었음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스크 쓰기 규제가 느슨해진 올해 4월, 은행에 갔다. 사무실 밖에서 모르는 분이 내게 인사를 하여 누구일까 생각하느라 어정쩡한 답인사를 했다. 일을 마치고 J대리가 계시나 찾았더니 “저 여기 있는데요, 사모님.” 방금 전 인사한 분이 J대리였다니, 그는 내가 창구 일 마치기를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몰랐다. 그를 만나온 지 3년째인데 왜 그랬을까. “제가 마스크를 벗어서 모르셨을 거예요. 저는 사모님이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알아봤거든요.” J대리는 내가 마스크를 벗고 왔으면 몰라봤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어떤 시기를 지나온 걸까. -배명란의 <풀꽃의 시간>에서
상식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현실이다. 자그마한 에피소드로 독자에게 쉽게 접근해가서 뒤바뀐 현실의 우스꽝스러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작가 배명란, 역시 나름의 체험을 문학적 글감으로 환치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분명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이 왔으리라 믿는다.
이재영의 <우리 고유의 제사와 명절 문화>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미 글의 주제가 드러나 있다. 작가의 이력을 살피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글의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귀띔을 해야 하겠다. 우선 우리의 고유문화를 글감으로 택했을 때는 그 문화의 정체를 정확히 기술하고 그 위에서 비판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의 현상을 기술함에도 얼개 짜기를 하고 집필에 임해야 한다. 이런 준비가 없이 기술하다 보면 중언부언하여 글의 맥을 흐릴 수 있다.
제사와 명절 문화에 관한 내용이 여기저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에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쓰려는 내용을 어느 부분에다 배치해야 효과적인가를 깊이 고민해서 선택하여야 독자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또 문장을 씀에 명심할 일은 한 문장에 하나의 내용만 기술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내용을 끌어안으려 하면 문맥에 부담을 준다. 앞에서 끌고 온 내용과 뒤에 이어진 내용이 엉클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사물이라 해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고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어찌 보면 안태엽의 <역 꼰대 시절에>는 이재영의 <우리 고유의 제사와 명절 문화>와는 상반되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기 위해 명언이나 경구, 옛사람의 말을 동원하지만 그들의 입맛은 각기 다르다. 한쪽은 효심과 전통문화를 강조하며 유교문화의 뿌리를 보호하려 한다.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은 급변하는 사회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적응하는 삶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퇴색한 사람’, ‘늙은이’, ‘꼰대’를 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같은 세상을 살아내면서도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독자는 이 두 작품의 내용을 접하면서 스스로 답을 얻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하고 어느 쪽이 편협된 생각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독자인 우리는 자신의 삶 철학에서 자(尺)를 꺼내어 세상을 재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최광식의 <상흔 유감>은 그동안의 삶에 대한 ‘반성문’에 가깝다. 늦둥이로 태어나 귀하게만 자라와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는 작가가 아내의 팔 다침으로 여자 일을 하게 된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김장하기를 하면서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아내가 아픔을 겪는 동안 자신의 고리타분한 의식을 털어내겠다는 다짐은 또 하나의 진리를 터득시킨다. ‘고통의 시간은 성숙의 시간’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아내의 마음에 이기적이고, 가부장적이던 자신의 모습이 지워지고 오로지 좋은 인식만이 자리하여 깊은 맛을 내는 김치처럼 숙성되기를 소망한다.
수필에서 흔히 사용하는 상징적 에피소드 상관물의 제시법은 독자가 어색함을 감지하지 않도록 부드러워야 성공한다. 예화가 상징적 에피소드를 접고 자리를 차지해 앉을 때는 덜컹거림 없이 넘어가야 효과적이다. 그리고 그 예화는 앞에 결론을 드러내 제시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시작하여 마무리쯤에 가서 얼굴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조급하게 내밀면 독자가 깊이 생각할 기회를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김은혜의 <석송령>은 인간과 식물의 교유를 다룬 듯하지만, 실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한 글이다. 흔히 수필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자연에서 글감을 취하여 의미를 부여한 후 인간을 그 위에 얹는 방법이다. 이때 너무 노골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면 효과 면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인간사로 환치하면서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말면 독자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드는 수가 있다
재산을 하사받은 부자 나무를 만나던 날 아침은 햇살이 온 누리를 품었었다. 정오가 되니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서너 시쯤에 비가 내린다. 눈 깜박한 것 같은데 빗줄기가 순백색의 눈으로 변했다. 겨우내 한파를 이겨내고 막 피어나는 샛노란 산수유꽃 위에 물을 잔뜩 머금은 눈송이가 앉으니 활짝 핀 목화송이로 변한다. 봄맞이로 바쁜 나뭇가지에도 두툼한 흰 외투를 입혀준다. 해 질 녘이 되니 산마루에 해님이 걸터앉아 살래살래 노을빛으로 손사랫짓한다. --김은혜의 <석송령>에서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글의 배경(setting) 기술이 단순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글의 전개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실로 크다고 하겠다. 아무리 행복하고, 삶의 만족도가 크다고 해도 불행이나 고통은 언제 가까이 올지 알 수 없다. 작가는 남편에게서 경제권을 부여받고 만족해하지만, 삶의 고뇌는 언제 어떻게 접근해 올지 모른다. 위 예문에서처럼 미래의 삶을 암시적으로 표현해 주는 기법도 글의 형상화에 크게 기여한다.
김동분의 <이집트 사막 투어>는 제목이 안내하듯 기행의 글이다. 기행 수필을 씀에 이제는 지나치게 여정에 묶이는 글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해외여행까지도 대중화되다 보니 어찌 보면 여행은 일상인 셈이다. 일상 속에서 글감을 취하듯 여행 중에 건져낸 글감에 충실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흔히 해외여행을 다룬 글에서는 처음 대면한 장면에 흥분하는 모습이 겉으로 지나치게 드러난 경우도 접하게 된다. 조심할 일이다. 글에서 작가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면 싫증이 나기도 한다. 오히려 담담한 필치로 차분하게 기술한 것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다. 감동한 점을 서두르지 말고, 일상의 언어로 뇌까리듯 들려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저뭇해지자 백사막의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없다. 우주쇼의 신비로움이랄까. 처음 보는 풍경이다. 그 광대하고 경이로운 자연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의 별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어느 순간 지평선 위로 은색을 띤 가느다란 달이 떠올랐다. 그 영롱한 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배두인들의 악기 연주는 끝없이 이어지고 우리는 모닥불 주위를 돌면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김동분의 <이집트 사막 투어>에서
잔잔하게 기술한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된다. 여기에 ‘사막은 정말 신비스러운 것 투성이다.’, ‘이집트는 볼거리가 참 많은 나라였다.’와 같은 결론적 기술은 독자의 감정을 한순간에 앗아가는 사족이다.
문소리의 <불러보지 못한 이름>은 사별의 의미를, 그중에서도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나는 어린 영혼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별이 갖는 의미야 비슷하겠지만,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영혼의 안타까움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작가가 글의 주제를 유념하여 최선의 전달 방법을 모색하는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용 전달을 위해 글의 형태도 칼럼의 형식보다는 온전한 수필로 형상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앞부분에서는 자신이 겪은 조카의 죽음에 대한 것이지만, 후반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세간의 생명 경시 현상이 대두된다. 이것을 주목하면서 글의 형태도 완전 혼란에 빠져 버렸다. 물론 반대급부를 노리고 있음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이 글에서는 세간의 현상보다는 죽음에 대한 의미 찾기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지금의 구성과는 반대로 앞뒤를 바꾸면 어떨까 싶다.
본래 혈연의 떠남 앞에 감정을 다스리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는 언제나 냉철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아무리 감정이 솟구치어 육신이 무너져도 글에서는 냉정을 간직해야 한다.
또 하나, 수필 문장은 필요할 때만 수식어가 동원되어야 한다. 별생각 없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수식어를 마구 동원할 일은 아니다. 한 문장 안에서 드러내야 할 부분에만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현명하다. 마구 동원하면 사족이 되고, 오히려 문맥을 그르친다.
구경모의 <내 삶의 철학>은 어려운 역경을 딛고 팔순이 넘도록 공부하고 있는 만학도의 이야기다. 참으로 긴 세월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내서 박사과정까지 공부한 의지에 쌍수를 들어 박수를 보낸다. 배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있어서는 질 좋은 삶을 위해 공부한다. 취직도 아니고, 학위도 아니며, 늙고 병든 아내와 자신이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게 공부의 목적이다. 오로지 두 부부의 행복만을 위해 팔순이 지난 나이에도 다시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있다. 확실한 목적과 신념이 있기에 작가의 향학열에는 멈춤이 없다. 무엇인가 뚜렷한 목적이 있는 행위는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필 쓰기도 매한가지다. 늦게 시작하여 문장이 완성되지 못하였어도 글 안에 담고자 하는 바는 정확히 모아 놓고 있다. 앞으로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문장 수련은 좀 더 하리라 믿는다. 머지않아 어휘의 정확한 의미 파악이 이루어지고, 중복 표현의 흔적은 사라지리라 기대해 본다.
이혜숙의 <준비 없는 이별>은 애완 묘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지켜보면서 이별의 아픔을 곱씹는다. 연예인처럼 작가 앞에서 귀여움을 떨던 고양이가 힘센 놈의 폭력 앞에 목숨줄을 놓았으니, 황망하기도 하다.
작가는 고양이의 떠남을 바라보면서, 일찍이 자신의 곁을 떠난 피붙이를 소환한다. 50대에 떠난 모친, 사랑만 베풀다가 80대에 외롭게 떠난 부친, 젊은 나이에 떠난 올캐, 70대 초반에 떠난 작은오빠. 피붙이의 떠남은 어느 경우보다도 절실하고 가슴 아리다.
작가는 여기서 강한 지진으로 부모와 자식의 떠남에 절규하는 튀르키예 국민들의 아픔과 접목한다. 지진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모두가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다. 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지고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튀르키예의 상황을 지켜보는 순간, 아버지의 아득한 눈망울이 가슴에 와 박힘을 감지한다.
다만 고양이의 죽음에서 시작한 이 글이 피붙이의 죽음과 먼 나라의 지진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재난 현장에까지 맞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 굳이 거리가 있는 글감을 맞대려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해 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슷한 점만으로 어설프게 엮으려 하면 독자에게 신뢰를 잃는 아픔도 있을 것 같다.
에필로그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삶 속에서 글감을 선택하여 그 본질을 찾아내고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형상화하는 문학 장르이다. 작가가 경험한 바를 주저리 주저리 엮어 놓았다고 하여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명한 수필가는 절대로 자기의 체험을 말하는 데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 체험이 갖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데에 정열을 쏟는다. 그래야 작가 나름의 존재 의미가 부여된다. 수필가들은 집필에 앞서 이 과정을 철저하게 실행함으로써 좋은 수필을 생산할 수 있고, 독자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을이 좀 더 익어가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단풍은 각자 가지고 있는 개성을 조금은 내려놓고 서로 배려하고 어울리기에 가능할 것이다. 우리 《문학미디어》 수필가들도 밝은 사회 구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주리라 믿는다. 이젠 차분한 마음으로 겨울호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교수님 수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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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것들이 제 성질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데서 나오는 것' 이라는 교수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자기 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해 손에 쥔 글감도 보지 못하는 저를 반성합니다.
교수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현명한 수필가는 절대로 자기의 체험을 말하는 데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 체험이 갖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데에 정열을 쏟는다.' 새기겠습니다. 아직 글쓰기 시도조차도 용기가 안 나는 미숙아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좀 더 깊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수필을 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