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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6회. '조선왕조실록이 山으로 간 이유는?' (2000.02.12.)
56회 : 조선왕조실록이 山으로 간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山으로 간 이유는?
방송일: 20000212 조회수 : 479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56회) - 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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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서 TIME V I D E O A U D I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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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7" 오대산 항공촬영 (쉬고-5초)
태백산맥의 한 자락인 오대산,
고봉준령이 겹겹이 늘어선 이곳.. 이 첩첩산중에 오롯이 들어앉은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 실록을
16" 사고 부감 항공촬영 보관했던 사고다.
(쉬고-3초)
굳이 이 깊은 산속에 사고를 만들고, 조선왕조실록을 여기 두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SUB- 10" " (부제 자막)
TITLE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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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오프닝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되면서, 한창 흥미를 더해가고 있는 사극 '왕과 비'의 한 장면입니다.
요즘 많이들 보십니까?
물론 이 드라마엔 작가의 상상력도 가미돼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론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역사가 기록된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여기 보이는 이 실록에 오백여년 조선의 정치사가 낱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와 문화 전반, 그리고 서민의 생활상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지난 97년, 세계 여러 왕조실록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바있습니다.
이젠 세계의 보물이 된 셈이죠. 조선시대 이 실록이 보관된 장소를 사고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엔 사고가 전국에 다섯 군데나 있었습니다.
한양 창덕궁내 춘추관에 중앙 사고가, 그리고 강화도 정족산, 무주의 적상산, 봉화의 태백산, 평창의 오대산,
이렇게 4군데 지방에도 각각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한양에 있는 것을 내사고, 지방에 있는 것을 외사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건 이들 외사고가 모두 산중에 있다는 점입니다.
왜 깊은 산속에 조선왕조실록을 두었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조선시대 외사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럼 먼저 외사고가 있었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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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史庫 6" 도로 트래킹 (쉬고-3초)
위치 강원도 평창에 있는 오대산.
11" 월정사 옆 트래킹 이곳엔 신라때 세워진 명찰, 월정사가 있다..
사고로 가려면 월정사에서 10리쯤 더 산길을 타야한다.
8" 바퀴 T.S.. Z.O.. (쉬고-2초)
포장이 안된 진입로는 좁고 가팔라, 눈길에선 아예 다리품을
8" 걸어오는 일행 팔아야 한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엔 더 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8" 사고 전경 사고는 구릉의 비탈진 지형에 서있다.. 건물은 단 두 동, 주위엔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고,
5" 문으로 들어오는 남쪽과 동쪽에 각각 출입문이 나있다.
6" 선원보각 T.S. 윗쪽 건물은 선원보각, 왕실의 족보가 보관돼 있던 곳이다..
10" 선원보각 PAN 사각 그 아래쪽이 실록이 있던 사각이다. 이렇듯 사고엔 어디나 실록과 왕실 족보가 함께
있었다.
5" 사각 기둥 틈새.. 오대산 사고는 옛건물이 아니다.
6.25때 불타버렸는데,
8" 사각 T.D. 다행이 주춧돌이 남아있어서 선원보각은 88년에, 사각은 91년에 복원됐다.
14" 사진.. 일제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엔 당시 남아있던 사고의 사진이 실려있다..
이를 토대로 사고는 옛모습 그대로 복원될 수 있었다.
7" 도로 트래킹 (쉬고-2초)
가장 험준한 곳에 자리잡았던 사고는 경북 봉화에 있다.
9" 산봉우리 Z.O.. 태백산의 주봉에서 약간 비켜난 각화산..
옛날엔 이곳도 태백산이라고 했는데, 기슭엔
5" 절 부감 각화사가 있다. 사고는 절에서
2키로미터쯤 더 올라가야 한다.
7" 산길 올라오는 (쉬고-2초)
워낙 험한 산길이어서, 가는 길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14" 산 PAN.. 그렇게 오르길 한시간 반 가량..
(쉬고-2초)
산 정상 가까이 가파른 능선에
빈터가 눈에 띈다.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곳이다.
6" 초석들.. 이 자리엔 지금 주춧돌의 흔적만 남아 있는데, 건물이 언제
12" 사고터 PAN 없어졌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쉬고-2초)
그래도 그 옛모습을 엿볼수 있는 사진이 역시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다.
17" 사진.. 왼쪽의 2층짜리 건물 두 동이 사각과 선원각이다.
한 울타리 안에 지붕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나란히 있고, 출입문은 하나..
건물은 전체적으로 꽤 볼품있게 지어져 있다.
9" 눈길 올라오는 차 (쉬고-5초)
전북 무주에 있는 적상산..
13" 산봉우리 PAN 산 정상은 사방이 바위들로 절벽을 이룬다. 그 안에 평탄하고 넓은 분지가 형성돼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꼽혔다.
3" 석축 T.S. 그래서 이곳엔 고려말부터
16" 석축 PAN.. 산성이 축성돼있었다. (쉬고-2초)
이 적상산성 안에 안국사가 있는데,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창건됐다고 한다.
원래 현위치보다 훨씬 아래쪽에
4" 천불전 T.S. 있던 것을 최근에 이 자리로 옮겼다.
7" 산봉우리 Z.O.. (쉬고-2초)
사고는 안국사에서 200미터쯤
5" 사고로 다가가는 아래쪽에 있다.
이곳 역시 2층 구조인데,
6" 건물 T.D.. 윗층이 서책 보관장소, 아래층은 훤히 터 통풍이 잘되도록 했다.
5" 사고 전경 이곳은 작년에 복원됐는데, 원래 사고가 있던 자리는 아니다.
38" INT. 김경석 -사고의 원위치에 대하여-
8" 산길 올라가는 (쉬고-3초)
강화도 남쪽, 바다에 인접한 정족산.. 그다지 높은 산은
5" 전등사 부감 아니지만, 고려때부터 산성이 수축돼 있었고, 그 안에
13" 경내 Z.I... 전등사가 있다. 신라때 창건된 고찰이다. (쉬고-2초)
이곳 경내에서 보면, 뒤쪽 수풀 사이로 사고가 눈에 들어온다.
6" 사고 전경 (쉬고-3초)
정족산 사고 역시 사각과
12" 담.. 선원각이 돌담 안에 함께 있는데, 유일하게 단층 건물이다. 해풍이 건물에 직접 닿아 생기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2" 문으로 다가가는 문은 나무로 견고하게 만든 판문을 달았다. 그리고 그 안쪽에 창호문을 하나 더 설치해
덧문으로 만들었다..
12" 내부 PAN (쉬고-3초)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통풍을 위해 창문이 나있긴 하지만, 이곳엔 또다른 통풍시설도 있다.
28" INT. 김동욱 -통기구와 화방벽에 대해-
10" 벽 PAN 벽면에 칠해진 석회석, 이것이 화재 예방의 한 방법이었다..
정족산 사고 역시 작년에
13" 사진 복원됐는데, 옛건물은 1930년대쯤 없어졌다.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보면, 옛모양 그대로 복원된 것을
알 수 있다..
10" 담 PAN.. 이렇게 조선시대 사고 4군데는 지방에 분산돼 있었고, 모두 다 산속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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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사고가 산중에 있게된 배경 도입
이것은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해동지도입니다.
사고가 있던 지방의 지도를 한번 볼까요?
당시엔 지도를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리곤 했는데, 이들 4장의 지도를 좀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이것은 강화 지도인데, 남쪽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과 명칭이 뚜렷하게 표시돼 있고,
그 옆에 전등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무주 지도인데, 적상산성 안에 역시 사고가 그려져 있습니다.
선원각도 따로 표시돼 있군요.
이건 봉화 지도입니다. 태백산 줄기의 산봉우리 바로 아래 선원각과 실록각이 나란히 묘사돼있고,
각화사도 보입니다.
이건 당시 오대산을 관할했던 강릉 지도입니다. 역시 사고가 그려져있고, 월정사도 보입니다.
이처럼 옛지도엔 반드시 사고가 표시돼 있습니다.
그만큼 사고를 아주 중요한 장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사고를 왜 산속에 두었을까요?
실록을 보관하자면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 쉽게 오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낫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조선전기엔 그랬습니다.
임진왜란 이전만해도 사고는 한양의 춘추관 외에, 전주와 충주, 성주의 읍성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교통의 요지인 큰 고을들이었죠. 그러다가 임란 이후에 산속으로 사고를 옮겼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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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16" 조정 T.D.. (쉬고-2초)
역사적배경 조선 전기인 세조때, 양성지는 사고를 산속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
민가 가까이에 있어, 화재나 전란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9" 말하는 신하 당시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가 염려했던 일은 얼마후 현실로 나타난다.
18" 중종실록 표지.. 중종때인 1538년, 성주 사고에 불이 나, 실록이 전부 불타버린 것이다.
그 뒤 다른 사고의 실록을 인쇄해 성주에 다시 사고를 세웠다..
12" 바다, 배.. 하지만 곧 실록이 한꺼번에 수난을 당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
왜군의 빠른 진격 속에서,
12" CG. 지도 성주와 충주, 한양 춘추관에 있던 실록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그해 6월, 유일하게 남은 전주 사고도 위험에 처한다.
15" 경기전.. (쉬고-3초)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관,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조선 초부터 모셔져 있었는데,
이곳이 경기전이다..
12" 담 PAN 사고 경기전과 담 하나 사이로 사고가 있다. 세종때 이곳에 사고가 들어섰는데, 현재의 이 건물은
9년전에 복원한 것이다..
5" 사고 전경 옛사고는 임진왜란때 불탔다. 하지만 당시 실록은 가까스로
8" 내부T.D. 화를 면했다. 거기엔 이 지방 유생들의 힘이 컸다..
4" 남천사 외경 정읍엔 그들을 기리는 사당인
3" 남천사 현판 남천사가 있다..
3" 내부 F.S. 당시 실록을 구해낸 장본인은
6" 손홍록 위패 손홍록과 안의.. 그들은 민간 유생들로, 왜군이 들이닥친다는
7" 안의 위패 소식을 접하자, 실록과
태조 영정을 급히 대피시켰다..
3" 임계기사 표지 안의가 지은 임계기사엔
5" 임계기사 내용 그때의 상황이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돼 있다.
8" 산봉우리 PAN (쉬고-2초)
6월 22일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11" 은봉암 추정지.. 옮긴다. 그들은 함께 혹은 교대로 실록을 지켰다. 그리고 1년 뒤, 선조가 피신해 있던
해주로 다시 옮겼다.
39" INT. 신병주 -전주 사고본의 의의와 임란 이후 새로운 사고지 선택..-
19" 모여있는 신료.. 당시 비변사에선 '사고는 인적이 닿지 않는 험준한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
았다.. 논의 끝에 마니산과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이 새로운 사고지로 선정됐다.
14" 선조실록.. 사고가 완성되고 실록이 모셔진건 선조 39년. 기록엔 이 일이 국가사업중 큰 규모여서, 포상도
따랐다고 한다. 그만큼 사고 건립은 중차대했던 것이다.
9" 저수지 PAN.. 그 뒤 묘향산 사고에 있던 실록은 후금의 위협 때문에, 인조때 적상산 사고로 옮겼다.
6" 강화 사고 전경 그리고 마니산 사고는 불이 나 현종때 정족산으로 옮겼다.
40" INT. 신병주 -산속 사고의 장점-
14" 능선 Z.O.. (쉬고-4초)
산중에 사고를 정하면서 장소 물색에도 신중을 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엔 해당 지역의
7" 산길 오르는 관찰사가 직접 지형를 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풍수를 잘 아는 지관과 함께
5" 지관.. 오대산 사고의 주변 지세를 살펴봤다.
13" 능선 PAN 사방으로 부드러운 산능선이 병풍처럼 겹겹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안쪽 아늑한 곳에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19" CG. 월정사-사고 또한 오대산을 보면, 월정사와-적멸보궁 사고,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있는 적멸보궁은
일직선상에 있다.
사명대사는 이곳을 삼재, 즉 물 불 바람의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꼽았다고 한다.
84" INT. 김종철 -사고 자리의 풍수적 측면-
10" 산 Z.O.. (쉬고-3초)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산중에 자리잡게된 사고.. 그렇다면
5" 사고 전경 산속에 사고가 설치된 뒤로 실록이 소실될 위기는 없었을까?
31" INT. 김용곤 -춘추관 실록의 소실과 외사고 실록의 보존에 대해-
13" 사고 항공촬영 실록이 오랜 세월 보존돼온 산중 사고, 여기엔 실록을 후대에 남기려했던 당대의 노력이
짙게 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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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사고의 구조 도입
이것은 방금 전에 보셨던 오대산 사고로, 사고 건축물의 전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실록이 보관됐던 이 사각을 보면 이층집으로 돼있는데, 얼핏보면 누각과 비슷하지만, 위아래 모두 사방을 막아
창고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붕은 특이하게도 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래 쪽에도 나있고,
창문은 벽면 윗쪽으로 처마에 바싹 붙어 있습니다.
문은 여기에 있군요. 그리고 이건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인 것 같은데.. 한번 올라가 볼까요?
내부는 보시는 것처럼 훤히 트인 마루방입니다. 그리고 사방에 창문이 나있습니다.
그런데 이층에 있는 이 창문들은 좀 독특하군요.
창호문 바깥 쪽에 나무로 된 창문이 하나 덧대어져 이중창으로 돼있습니다.
얼핏 둘러봐도 사고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건물들과는 다르게 지어져 있습니다.
거기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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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건축의 6" 사각 전경 (쉬고-3초)
특징 사고는 규모는 작지만,전체적으로
19" 초석 PAN.. 우람해 보인다.
(쉬고-3초)
주춧돌은 상당히 크고, 그에 걸맞게 기둥이나 다른 부재들도 육중하고 견실하다..
여기에 단청을 곁들여 화려함까지 더했다.
6" 사각, 선원각 보이는 특히 눈길을 끄는건 웅장한 지붕, 위아래 중층 구조로 돼있고,
7" 윗지붕 PAN 윗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것은 권위를 상징한다.
20" CG. 지붕의 변화 그런데 지붕은 건물 규모에 비해 유난히 크다. 비례에 맞게 지붕을 줄여보면,
훨씬 안정돼 보인다..
하지만 지붕을 크게 하고, 처마도 길게 늘어뜨린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31" INT. 김동욱 -처마의 효과에 대해-
5" 사각 측면 (쉬고-2초)
눈비를 막기 위해서 창문도 벽면
4" 창문 둘 F.S. 윗쪽으로 처마 가까이에 나있다.
11" 아래 창문 T.U.. 하지만 통풍을 생각해 면적은 크게 했다.. 윗층 창문은 나무로된 판창이 덧대어져 있다.
윗쪽은 특히 강렬한 햇빛과 산속
7" 창문 여는 습기가 잘 들어오는데, 판창은 이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다.
25" CG. 사각 F.S.. (쉬고-3초)
습기야말로 서책 보존에 치명타, 때문에 건물은 지면에서 약간 올려 지었다. (쉬고-2초)
이렇게 틈을 두면, 통풍이 잘 돼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제거되는 것이다..
4" 두 개의 문 F.S. 두 개의 출입문중 건물 옆쪽으로
15" 동문 PAN.. 난 동문은 일반인들이 드나들었고, 정문인 남쪽은 의식을 행할 때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사고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 이중 담.. 그런데 사고엔 바깥 쪽으로 두른 돌담 말고, 안쪽에도 또 하나의 담이 있다.
이 담은 윗쪽에 있는 선원보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쉬고-3초)
이렇게 만든건 무슨 까닭일까?
20" INT. 김동욱 -방화벽에 대해-
8" 김홍도 그림 (쉬고-2초)
이것은 단원 김홍도의 오대산사고 그림이다. 그는 정조의
5" 그림의 사고 T.S. 명을 받아 관동지방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그때 제작된 것이다.
9" 그림이 CG로 변하는 이 그림을 컴퓨터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변화시켜봤다..
11" CG-입구로 가는.. 당시 진입로엔 국가의 중요건물을 상징하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31" --건물 훑는 두 군데 출입문은 모두
이중문이고, 담도 선원보각뿐 아니라 사각에도 이중으로 둘러져 있다. (쉬고-3초)
이처럼 사고는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에 걸맞게 위엄을 갖췄다. 그리고 보존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안전을 고려해 지은 당대의 과학적인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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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사고의 관리체계 도입
잘 아시다시피 단원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오대산 깊숙한 데 있는 사고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사고는 그렇게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사고를 인적이 드문 이런 외진 산속에 두고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이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면, 사고 옆에 이렇게 또다른 건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고의 부속 건물로,
여기에 바로 관리자들이 머물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소중한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데, 이 정도로 그쳤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봤듯이 산속에 있는 사고 가까이엔 반드시 거대 사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강화 정족산 사고
옆엔 전등사, 적상산 사고엔 안국사, 태백산 사고엔 각화사, 그리고 오대산 사고엔 월정사가 있습니다.
혹시 이들 사찰이 사고를 지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진 않았을까요?
이제 당시에 사고가 어떻게 관리됐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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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6" 월정사 경내 (쉬고-3초)
관리체계 오대산 사고와 월정사의 관계를
4" 대웅전과 탑 알아보기 위해 월정사를 찾았다.
7" 책 PAN 이곳에서 사고에 관련된 옛기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13" 책+자막 기록엔 사방 40리의 땅이 모두 사고에 속한다고 돼있다.. 그리고 월정사에도 전답을 하사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41" INT. 김용곤 -사고와 수호사찰의 관계-
13" 허리띠와 증표.. 인근 사찰은 승군을 조직해 사고를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사찰의 주지는 책임자인
수호총섭으로 임명됐다.
45" INT. 현해스님 -수호사찰의 위세-
18" 뛰는 발.. (쉬고-3초)
임진왜란때 승병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그래서 임란 이후 산중에 사고를 지으면서 승병을 활용할 수 있으리
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1" 사고 PAN.. (쉬고-2초)
오대산 사고의 경우엔 월정사와 거리가 있는 까닭에 지척에 암자를 두기도 했다. 지금은 사고
3" 영감사 앞 일행 윗쪽에 있는 이곳 영감사다.
29" INT. 각수 스님 -영감암에 대해-
9" 수직사터로 Z.I.. 영감사가 사고를 관리할 당시 있었던 자리는 사고 옆 조금 아래쪽이다.
지금은 빈 터로 남아
5" 비석 있고, 수직사터라는 비석만 서있다.
17" CG. 평면도 1909년에 제작된 사고 평면도엔 영감사가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영감사가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옆에 별관이라고 또다른 건물도 보인다..
12" 수직사터 PAN 기록엔 사고마다 참봉이 두 명씩 있고, 그들은 사고 옆에 거처 했다고 한다.. (쉬고-2초)
사고 참봉은 어떤 사람이
8" 도로 트래킹 임명됐고, 그들의 일은 무엇이었을까?
6" 마을 전경 수소문 끝에 봉화에서 태백산 사고 참봉의 후손을 만날 수
6" 방 안.. 있었다. 그는 4대조의 것이라며 참봉 첩지를 내보였다.
13" 김용호 첩지 첩지의 주인공은 김용호, 그는 1800년대 태백산 사고의 참봉을 지냈다.
사고 참봉은 종 9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7" 김상락 첩지 그의 아들 김상락의 첩지도 있다. 대를 이어 사고 참봉을 지낸 것이다.
56" INT. 김규봉 -사고 참봉의 일과 자격-
10" 사진 사고는 이런 참봉과 승군이 함께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수비 인원도 있었다..
57" INT. 배현숙 -사고의 수호군에 대해-
5" 적성지 표지 (쉬고-2초)
수호군은 해당 지역의 관아에
17" 기록 T.D.. 소속된 정규군이었다..
지역이나 시기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른데, 가장 많았던 곳은 적상산 사고다..
고종 때엔 백명이 넘었다..
10" 고지도 F.S. 물론 이것은 적상산성의 수비도 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옛지도에도 나타나듯,
8" ..Z.I. 사고 산성내 가장 중요한 건물은 사고였다..
10" 별장청.. 특히 이곳엔 수비를 위한 건물들이 많은데, 별장청이나 대별관은 군사 주둔지다..
8" 시왕전.. 그 옆으로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던 안국사의 당우들도 여럿 보인다..
12" 청하루.. 그리고 참봉청과 무기가 있던 군기고도 있다.. (쉬고-5초)
이렇듯 수비와 관리를 철저히
12" 지도 Z.O.. 했기 때문에, 4군데 산속 사고는 어디나 안전했고, 실록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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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실록의 제작과정과 봉안
참봉과 수호군, 그리고 승려로 조직된 승군.. 이렇게
조선시대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실록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이것은 사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관이 조정에서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실록의 기초 사료가 됩니다.
또다른 사료는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같은 관청에서
작성한 공식 기록입니다. 이것을 시정기라고 하죠.
왕이 죽으면 다음 왕대에 이들 사료를 수집해
실록 제작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광해군일기 중초본입니다. 중초본이란 사료의 내용을
선별해 초고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수정한 것을 말합니다.
이 중초본 역시 또 한차례 수정되는데, 여기 이렇게
붉은 색으로 고친 흔적이 보이죠?
이렇게해서 마침내 완성본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필요한 부수만큼 필사하거나 인쇄하면 실록 제작은
끝나고, 이어서 실록을 잘 모셔두는 봉안 의식이 치러집니다.
이것은 역대 국왕의 치적을 기록한 국조보감의 봉안의식을
그린 당시의 그림입니다. 문무백관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의식인데, 실록 봉안도 이와 흡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만큼 실록 제작은 국가의 큰 사업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조선시대 실록은 왜 중시됐고, 당시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를 후대에 남기려고 했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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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5" 묘 F.S. (쉬고-3초)
보관방법 여주엔 인조때 사관을 지냈던
8" 묘 T.S.. 인물의 무덤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정태제, 호는 국당이다.
11" 사진-널.. (쉬고-2초)
지난 87년 이장을 하기 위해서
그의 무덤을 열었을 때, 시신은
미이라 상태였다.. 그리고
11" 사진-널 속 책들.. 몇권의 책이 들어있었는데,
거의 훼손이 안됐다. 그 가운데
정태제가 기록한 사초도 사초도
있었다.
26" INT. 정재열 -정태제에 대하여-
8" 사초 넘기는 이 사초는 인조 15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5개월간의
기록이다.
12" 사신왈 T.D. 그날그날 조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날짜별로 요약돼 있고,
때때로 그 뒤에 '사신왈'로
시작되는 부분이 있다.
18" CG. 사신왈.. 이것을 '사론'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 스스로
논평한 것이다. 사신왈, 사관왈,
근안 등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사론이 정태제의 사초엔
57차례 등장한다.
26" INT. 장필기 -정태제 사론의 유형-
14" 민생책에 대한 사론 (쉬고-2초)
정태제는 사론에서, 병자호란
직후 백성의 민생고부터
해결하지 못하는 국정을
꼬집고 있다.. 그의 사론 가운데
12" 김자점에 대한 사론 가장 많은 건, 인물평이다.
인조정권의 공신세력이자 한때
요직을 맡았던 김자점도
혹독하게 평가돼 있다..
11" 인조에 대한 사론 그런가하면 인조에 대해선
시종일관 비판적이다.
그는 임금의 덕이 부족하다며,
그 자질까지도 비난했다..
15" 사초와 실록 대비 정태제의 사초와 인조실록을
대조해본 결과, 그의 사론은
실록에 다섯 차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엔 이렇게 실록에
사론을 실어, 사관의 기록을
12" 실록의 기록들 중시하며 보장했다. 또한 왕이나
신료, 그 누구도 사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45" INT. 장필기 -사관의 자격과 자부심-
4" 조정 F.S. (쉬고)
17" 사관 PAN.. 사관의 올곧은 기록인 직필..
이 직필이 있었기에, 실록은
당대의 사건을 나열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시대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그것이 실록의
정신이었다.
12" 전시실 외경 그리고 직필은 제도적으로
보장됐다.. (쉬고-2초)
경북 봉화에 있는 권벌 유물관.
여기엔 그런 제도의 단면을
4" 전시실 내부 엿볼 수 있는 유품이 있다..
6" 세초도 F.S. 바로 이 '연산군일기 세초도'다.
세초란 실록이 완성된 뒤,
11" 그림 PAN 사초를 비롯한 자료를 물에 씻는
걸 말한다..
당시 귀한 종이를 재생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10" 물에 씻는 그림 실록의 내용이 유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7" 연회 베푸는.. 이렇듯 세초는 직필로 인해
사관이 후환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그것은
곧 실록에 담긴 기록의 공정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4" 조정 F.S. 또한 실록의 내용은 왕조차도
볼수 없었다.
9" 신하와 세종 (쉬고)
24" 말하는 세종 중간쯤 성군이었던 세종도 아버지인
태종이 어떻게 기록됐는지 알고
싶어 두차례나 실록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진
못했다.. 실록에 기록된 역사,
그것은 당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토록 엄격했을까?
58" INT. 이성무 -권력의 부패 방지와 사관-
21" 실록들 PAN 역사는 왕과 관료를 후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수 없게했고,
따라서 올바른 정치를 유도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 인식때문에
실록은 중시됐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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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실록의 보관 방법 도입
정태제의 사초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국가멸이 사불가멸'..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인멸될 수가
없다는 뜻이죠. 당시의 역사 인식은 이러했고,
사관은 올바른 역사 기록을 목숨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한때는 사관이었습니다. 바로 그들 사관만이 이 사고에
실록을 넣거나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럼 실록은 여기에 어떤 상태로 있었을까요?
보시는 것처럼 실록은 이렇게 궤짝에 보관돼 있었습니다.
궤짝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봉인이 돼있습니다.
이 봉인을 보니, 여기엔 현종실록이 들어있군요.
한번 열어보겠습니다.
이게 뭘까요? (냄새 맡아보며) 한약재 같은데..
이건 기름종이 같고.. 이건 무슨 가죽처럼 보이고..
보자기 안엔 또 기름종이 같은 게 덮여 있고..
책과 책 사이엔 이렇게 얇은 종이도 있습니다.
아마도 실록을 오래 보관하고자 이렇게 했을 것 같은데,
그럼 당시의 실록 보존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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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4" 규장각 외경 (쉬고)
보관방법
11" 서궤 있는 창고 내부 서울대에 있는 규장각..
이곳엔 사고에 있던 궤짝들이
보관돼 있다.. (쉬고-2초)
먼저 이들 궤짝이 실록 보존에
3" 봉인 T.S.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12" 파편 꺼내는 (쉬고-3초)
이를 위해 목재 연구가가 파편을
수집했다.. 궤짝의 나무 종류와
특성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4" 봉투에 글씨 쓰는 (쉬고)
15" 붓칠하는.. 분석에 들어간 곳은 임업연구원..
파편을 얇게 잘라 시편을 만든뒤,
목조직의 특성을 파악한다.
(쉬고-3초)
시료는 모두 7개..
7" 현미경에 놓는 분석 결과, 종류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 피나무, 소나무로
밝혀졌다.
43" INT. 박병수 -궤짝 재질의 특성에 대해-
17" 형지안 넘기는 (쉬고-2초)
궤짝 속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기록에 잘 남아 있다. 그것은
붉은 보자기와 얇은 종이인
초주지, 창포와 천궁, 사슴 가죽,
그리고 기름종이였다.
7" 약재병들 PAN 그런데 창포와 천궁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30" INT. 장일무 -창포와 천궁의 효과에 대해-
5" 창포, 천궁 방부 방충 효과가 있는 창포와
천궁 말고도
8" 내용물들 PAN 궤짝 속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이들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47" INT. 배현숙 -기타 내용물의 효과에 대해-
8" 형지안 PAN (쉬고-2초)
실록 보존을 위해 했던 또다른
일이 있다.. 사고를 열때마다,
6" 내용 넘기는 그 내용을 기록한 이것은 실록
형지안이라고 한다..
12" 형지안 표지 T.S.. 이 형지안에 따르면, 건물을
수리하거나 실록을 봉안할 때
사고 문을 열었고, 가장 빈번한건
포쇄의 경우였다.
25" INT. 신병주 -포쇄에 대하여-
5" 멍석 가져오는 (쉬고-3초)
평창 군청의 도움을 받아
4" 쇠막대 펼치는 포쇄를 해보기로 했다..
4" 천막 펼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빈 터에 차일을
5" 책 놓는.. 치고, 여기에 책을 늘어 놓는다.
그늘을 만들어 햇빛이 직접
10" 책들 PAN 책에 닿지 않도록 하면서,
바람을 쏘이는 것이다..
대개 한나절이면 족한데,
포쇄가 끝나면 약재 등의
6" 천막 F.S. 내용물을 새 것으로 갈아 넣는다.
8" 선원보각 현판.. 포쇄를 노래한 한시도 있다.
이 시를 통해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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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 놓는 사람들 포쇄를 위해선 임금의 명으로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됐고,
5" 사람들 여럿 있는 대개 봄가을의 청명한 날에
행해졌다..
6" 책들 PAN 사고를 열기 전엔 의식을 치렀고,
실록은 소중하게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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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루 T.U... (쉬고-5초)
이 시를 지은 이는 신정하.
그는 숙종때의 인물로, 태백산
사고에 포쇄하러 갔을 때
이 시를 지었다.
그때 그의 직책은 사관이었다.
26" INT. 배현숙 -포쇄를 할 수 있는 관리..-
13" 오대산 사고.. 당시엔 실록 보존에도 이렇듯
정성을 쏟았고, 그래서 실록은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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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클로징
산속 사고에 있던 실록들은 일제 지배하에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여기 이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의 동경대로
옮겨졌다가 관동 대지진때 대부분 불타버리고,
극히 일부만 현재 동경대와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태백산 사고본과 정족산 사고본은 한성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정부기록보존소와 규장각에 각각
보관돼 있습니다. 적상산 사고본 역시 한성으로 옮겨진뒤,
6.25때 행방불명됐는데, 지금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실록의 완벽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올 수 있었던건 조선시대 사고를 여러 곳 만들어
실록을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깊은 산속에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 그것은 오래토록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보다 진정한 이유는
역사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의 시대의식, 그들의 역사에 대한
외경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역사 정신이야말로 실록이 우리에게 남긴
더 중요한 유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후대에 남길, 그리고 평가받게될 역사를
과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