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둘래산길 트레킹 10월 정기산행
진안 고원길 2구간(들녘길)
2022년 010월 22일, 넷째주 토요일.(맑음, 기온 12˚~21˚)
진안 고원길 2구간[들녘길]
산행출발 :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1004-2번지(마령면사무소)
산행도착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동창리1364번지(백원면사무소)
코스 : 마령면행정복지센터->남악제(인증장소)->원평지->계남->방화->백마교->원운교->하평장->
영모정->미룡정(인증장소)->닥실고개->신정->배우개재->상백->중백->백운면행정복지센터.
거리및 시간 : 14.4km / 4시간 30분 / 난이도(下)
날씨 : 파란하늘색으로 아주 좋았슴
산행안내 팀장 : 젠틀맨
후미 안내지기 : 자하잘
사진 청마(靑馬)
오늘은 2구간 들녘길을 걷는 날이다.
여느때와 똑같이 금산인삼랜드 휴게소에 들려 달달한 자판기커피로 기분을 업 시키고, 목적지인 마령면사무소를 향하여 내달린다, 어쩌다보니 점심시간이 다되여 차라리 점심을 일찍먹고 가기위해 백운면사무소앞 선희네식당에서 동태탕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마령면사무소로 이동한다. 원래는 트래킹후 맛난 늦은 점심을 먹을려고 예약을 해놓은 상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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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은 진행방향으로 인삼을 상징/ 붉은색은 역방향으로 홍삼을 상징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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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복 오빈 정려(吳成福吳玭旌閭)
효자 오성복과 충신 오빈(吳玭)의 정려를 하나의 정려각에 모신 것이다
교회와 뾰쪽하게 보이는 광대봉
둔암 오기열 기적비
둔암 오기열 기적비는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원평리)에 있다. 1995년에 건립됐으며 높이 2.5m, 좌대 0.8m 이다. 진안군에서 건립했으며 현충시설 관리번호 52-1-12 이다. 오기열(吳基烈.1889~1950) 선생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며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자는 낙중(洛中), 호는 둔암(遯菴)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오기열 선생은 4월 6일 전영상, 김구영, 황해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으나 황해수가 체포됨으로써 해산하였다. 그 후 4월 12일 진안군 마령면의 장날에 만세운동을 다시 전개하다가 체포된다.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4월 21일 광주법원 전주지청에서 1년 6개월이 언도되었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대구 복심 법원에서도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 때는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오기열 선생의 우국충정을 통한 살신성인과 의리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고자 정성을 담아 광복 50주년(1995)을 맞이하여 기적비를 세웠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 기적비를 2003년 5월 31일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운교리 삼각주퇴적층 위에는 만취정(晩趣亭)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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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정(永慕亭)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1869년(고종6년)에 세워진 건물
시원하고 경치 좋은 영모정 계곡에는 효자 이야기가 서려 있다. 그것도 하늘이 내린 효자 이야기다. 이 효자가 사람들을 살렸다고 한다. 영모(永慕)란 ‘오래도록 사모한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하늘이 내린 효자 미계(美溪) 신의련(愼義連) 선생을 기리는 영모정, 미룡정, 효자각, 정려각 등이 세워져 있다.
효자 미계(美溪) 신의련(愼義連) 선생
미계(美溪) 신의련(愼義連) 선생은 조선조 명종 시대 1546년(병오년)에 백운면 노촌리 미계촌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호를 미계(美溪)로 하였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선생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순수하고 청아하여 조석(朝夕)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언제나 부모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였다. 병환에 계시던 부모님이 꿩고기를 찾자 온 산을 뒤졌으나 꿩을 잡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와 한숨만 내쉬고 있자, 느닷없이 꿩 한 마리가 날아와 마당에 사뿐히 앉는 것이었다. 그 꿩으로 부모님을 봉양했다고 한다. 또한 눈 속에서 죽순을 찾아 봉양하고, 한겨울에 부모님을 위해 얼음이 얼지 않은 깊은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서 부모님께 대접했다고 한다. 이렇듯 꿩이 제 발로 찾아오거나 얼음 속의 잉어와 눈 속의 죽순 이야기는 천지신명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현상이라고 회자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적이 이곳 진안 백운까지 쳐들어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온몸으로 아버지를 막으며 왜적에게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이를 본 왜장은 효심을 시험하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신의련은 즉시 혈서를 써서 왜장에게 건네주자 왜장은 뜰에 불을 피워 글을 태웠으나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는 불타지 않고 종이만 타버린 후 글자가 하늘로 올라갔다. 이에 왜장이 하늘이 내신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동구 밖에 ‘효자가 사는 곳(孝子所居之地)이니 왜군은 이곳을 해하지 말라’는 푯말을 마을 입구에 세우고 물러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백성 5만여 명이 피신을 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곳을 일명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기도 했고 들판은 화를 면했다 하여 면화평(免禍坪), 남쪽에 솟은 산은 덕태산(德泰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신의련에게 종8품에 해당하는 수의부위(修義副尉)의 품계를 내리고 정려를 세우라고 명(命)하였다. 이렇게 효자각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1869년(고종 6년)에 효자각 바로 밑에 정자를 건립하고 영모정(永慕亭)이라 이름 지어 후손인 거창 신(居昌 愼氏)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영모정에는 참새가 많은데 참새도 효심을 아는지 영모정에는 똥을 싸는 일이 있지만 효자각에는 똥을 싸지 않은 것을 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경탄하고 있다.
영모정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한다. 정면 앞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 누각이다. 이 영모정의 지붕은 용마루나 내림 마루만 기와를 사용하였고 지붕은 돌너와로 덮었다. 돌너와로 지붕을 덮은 예시는 흔하지 않다. 더욱이 전라도에서 돌너와 지붕은 아주 드문 사례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너와 지붕은 대부분 강원도 지방에 많은데 진안 백운지역에 돌너와가 나오기 때문에 아마도 영모정 지붕을 돌너와로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모정은 안에서 밖의 경치를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영모정은 개울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영모정의 당당한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신의련 선생의 효심이 흐르는 미재천에는 풍광이 수려한 영모정과 미룡정(美龍亭)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모정에서 위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계단 앞에 천(川)을 가로질러 미룡교가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널찍한 미룡정이다. 미룡정 주변에는 미계 신의련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군(群)들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계곡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효자 신의련 선생의 이야기에 감동한다.
미룡정(美龍亭)은 효자 미계 신의연(美溪 愼義連) 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또 다른 정자
ㅎㅏㅁ께 하신 회원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