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북쪽 뱀사골 계곡을 따라 내려간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커다란 지리산 품에 안겨는 있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평지 들판에 자리 잡은
아늑하고도 조촐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의 선맥을 이어받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실상선문을 열었고,
2대조 수철화상秀撤和尙이 법맥을 이어서
고려까지 선종의 근본 도량으로 자리 잡았던 실상사는 크고
웅장한 건물 수십여 동이 장관을 이루었으나
여말선초麗末鮮初 잦은 병화兵禍로 쇠퇴를 거듭하다
세조 말년에는 완전히 폐사廢寺되어 그 후 200년간 방치되었다
석등 (보물 제35호)
석등도 통일신라 후기 대표적인 석등이며, 특히나 석등에 등을 켤 때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남아있는 국내 유일의 석등이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에는 아래쪽에 안상이 새겨졌고 위에는 연꽃잎이 넓게 새겨진
일반적인 모습이나 귀꽃이 장식되었으며 그 위로 솟아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이 통상 8각인데 비하여
이 석등은 둥근 모양을 3단으로 하여 언뜻 보면 장고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고복형鼓腹形 간주석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유사한데
당시 이 지방에서 유행한 석등의 형식으로 보인다.
8면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뚫어 보통 4개의 화창을 내고
나머지에는 사천왕상 등을 새기는 일반적인 형태보다
창이 많은 구조이다
승탑과 승탑비
극락전을 바라보아 바로 앞에 홍척국사 탑비가, 왼쪽에 승탑이 있고 극락전 오른쪽에 수철화상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의 산문인 지리산 실상산문을 개산한 홍척 스님은 증각이란 시호를 받았고
이 탑이 세워진 후 응료라는 탑 명을 받았기에
홍척국사 탑비는 '증각대사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이라 부른다.(보물 제38호)
탑비는 비신은 없어진 채 받침대인 귀부와 지붕돌인 이수만 남아있는데 낡고 쇠락해 마멸이 심해 보이지만 이수 앞면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 새겨져 있으며, 용머리가 아닌 거북 머리로 조각한 귀부는 다소 감각이 떨어져 보인다. (보물 제39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法住寺 雙獅子 石燈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승탑을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그리고 승탑의 명칭은 대부분 선사의 시호(諡號)이다.
현재 양양 진전사지에 있는 승탑은 도의선사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승탑은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받침대는 석탑의 기단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가지산문의 제2조인 염거화상탑은 전체가 모두 8각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형식의 승탑을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 한다.
이후 신라의 승탑은 이 형식을 기본으로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반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조각이 매우 정교한 지리산 연곡사 동승탑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에 이르면
승탑의 형식이 다양해진다.
8각원당형의 기본을 따랐지만
지붕돌의 8각마다 귀꽃이 솟아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
기단부와 탑신부가 모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智光國師塔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의 승탑은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조형미에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있어 한반도 석조 미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양양 진전사지 승탑"
국립중앙박물관 염거화상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지리산 연곡사 동승탑"
여주 고달사지 승탑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서 있던 지광국사탑. 해체 직전 모습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전=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앞에 서 있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을 작년 3월 해체할 때 사리공(舍利孔, 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석재 10여 점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복궁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탑 보수 후 어디로 갈지 ‘촉각’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있는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전면 해체된 뒤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
보수된 탑이 원래 있던 강원 원주시 법천사 터에 세워질지,
현재 탑 관리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오는 14일부터 석탑 주변에 가설 덧집을 설치하고 다음달 2일까지 전체 부재를 해체한 뒤 6일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길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를 지냈던 지광국사(984~1067)의 사리탑이다. 높이는 6.1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됐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했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기단, 탑신 등이 팔각형으로 된 형식) 양식에서 벗어나 평면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 준다. 탑 전체에 장식된 보살상, 봉황, 연꽃 등 정교하고 화려한 이국풍의 조각이 돋보이는, 고려 시대 사리탑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정기조사와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 정밀 안전진단 등 그동안 진행된 점검 결과 다수 균열과 시멘트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됐다. 특히 기단부와 시멘트로 복원된 옥개석(屋蓋石·덮개돌), 상륜부의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석탑의 추가 훼손이 우려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전면 해체·보존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지광국사탑은 당초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법천사 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해체돼 서울로 옮겨졌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 1915년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법천사 터가 아니라 경복궁에 놓였고 1990년 현 위치에 세워지기까지 최소 9차례 이전됐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옥개석을 비롯한 상부 부재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됐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복원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앙박물관과 원주시는 탑 위치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박물관 내 별도 공간에 세워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인 반면, 원주시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다보탑처럼 원래 장소에 세워야 한다고 - 2016.03
양양 진전사지 승탑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439호),
우리나라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의 승탑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도의선사탑(보물 439호)이다.
.
이 승탑은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는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각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놓고 있다.
반면에
탑신은 팔각형의 몸돌위에 기와지붕모양을 지붕돌을 얹어놓은 전형적인 승탑 형태를 하고 있다.
승탑 중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통일신라 말(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의선사는
선덕왕 때(784년) 당에서 선종을 배운 후 821년 귀국하였다.
당시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이곳 진전사에서 40여년 동안 수행하였다고 입적했다고 한다.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가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으로,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진전사 절터는 설악산 자락 아래에 있기는 하지만
깊은 계곡에서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진전사지가 있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물치천이라고 하며
이 하천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도 동해안에서는 많은 편이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평지사찰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사찰로 보인다.
관동팔경 중 한곳인 낙산사가 물지천 하류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자락 진전사 절터에 남아 있는 도의선사탑(보물 439호).
통일신라 때 우리나라에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은 석탑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탑신부. 전체적으로 팔각형태를 하고 있는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승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몸돌 남쪽에는 문을 새겨 놓고 있다.
지붕돌은 목조건축물 기와지붕을 모방하고 있다.
뒷쪽에서 본 도의선사탑.
옆쪽에서 본 도의선사탑.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보물439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이 부도는 8각형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으나,
기단부가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 이중기단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돌로 붙여 4매로 짜고,
각면에는 양우주와 탱주가 뚜렷이 모각되었으며, 갑석도 4매로 I자형 은정으로 고정시켰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구성되고 각면에 탱주가 있으며
갑석은 2매로 밑에 부연이 있다.
윗면에는 8각형의 받침이 있고 이 위에 8각의 다른 돌로 괴임대를 놓아
탑신을 받게 하였는데
주위에 16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다.
탑신은 8각으로 아무 조식이 없으며 옥개석도 8각으로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다.
조성연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6년)
석등石燈은 등공양燈供養과 연등燃燈을 상징하는 석조물로, 돌로 만든 등이다.
석등은 하대석下臺石 · 간주석竿柱石 · 상대석上臺石 · 화사석火舍石 · 지붕돌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위에 보주寶珠를 얹는다.
이런 일반적 형태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등불을 넣는 화사석인데,
통일신라 때 주류를 이룬 기본형은 8각형이고 4면에 화창구火窓口를 낸 형태이다
석등 부분 명칭이런 8각형 양식의 대표적인 것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이다.
이 석등은 네모반듯한 지대석 위에 복련석(覆蓮石, 연꽃을 뒤집어놓은 모양)을 올리고,
그 위에 굵기와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 8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위에 8각의 화사석을 받치는 앙련석(仰蓮石, 연꽃이 하늘을 보고 활짝 피어 있는 모양)을 놓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지붕돌을, 지붕돌 위는 보주로 장식했다.
이 석등은 각 부분들이 단정하고 아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긴 보살상과 복련석의 귀꽃 조각이 아름답다
이 시대에는 고복형(鼓覆形, 북을 옆으로 누인 모양)이라는 특수한 양식이 있다.
이 양식은 각 부분이 주로 8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기본형과 같으나 간주석이 장구나 북 모양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과
지리산 실상사 석등이다.
그리고
간주석 대신 두 마리 사자가 서 있는 양식이 있는데,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등이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고려에 이르면,
대체로 8각형의 전형을 계승하지만 기본형에서 벗어난 4각형의 양식이 나타난다.
논산 관촉사 석등이 이 양식에 속하는데, 고복형의 간주석에 4각형의 상대석을 얹고 화사석은 네 귀에 석주만 세우고 4각형의 지붕돌을 놓은 형태이다.
조선의 석등은 4각형이 기본형이고, 간주석은 짧고 두툼한 형태로 변했다=
논산 관촉사 석등
종 목 보물 제232호 지 정 일 1963.01.21 시 대 고려시대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터무니없이 널찍하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 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불 즉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각황전 앞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지리산 화엄사"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의 스님인 연기조사께서 창건하신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세움으로써 화엄사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원효스님은 화엄사 해회당에서 화랑들에게 그 유명한 화엄사상을 설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호남의 승려들이 승군 300여명을 모아 왜군과 맞섰다는 이유로
화엄사는 전소되는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었다.
이후 인조와 숙종 때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화엄사에 갈 때는 일단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화엄사를 감싸 안는 청아한 계곡 물소리부터
마음속으로 끌어들여보자.
차갑고 맑은 계곡물소리가 마음 가득히 퍼지면
눈앞에 펼쳐지는 사찰의 풍경도 그 안에 함께 녹아들 것이다.
지리산 실상사 석등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법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높이 3.3m , 통일신라, 국보 제5호.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팔각의 하대석 위에 두 발로 서서 가슴을 맞댄 사자 두 마리가 앞발과 주둥이로 상대석과 화사석,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현존하는 사자 조각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조각 수법 또한 뛰어나 머리의 갈기와 다리, 몸의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국보 제5호. 높이 3.3m. 간주(竿柱)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이다지표에 놓인 넓은 팔각 지대석(地臺石)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우주형(隅柱形)을 표시하였으나 각 면에 조식(彫飾)은 없고 상면에는 각형(角形)과 반원형 2단의 뚜렷한 굄이 표현되었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으로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복련(單瓣覆蓮) 8엽이 조각되었다. 8각기둥을 대신한 쌍사자(雙獅子)는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어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上臺石)을 받쳤으며, 머리는 들어서 위를 향하였는데 머리에는 갈기가 있고 다리와 몸에는 근육까지 표현되었다.
상대석에는 서로 양식이 다른 단판의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은 다른 사실이 있었던 듯하다개석(蓋石)은 크고 8각이며 처마 밑은 수평이나 추녀 끝이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옥개 위에는 구형(球形)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도 간고한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및 옥개석 등의 비례에서 장중한 품격이 넘치고 있다. 법주사에 전하는 또하나의 사천왕석등과 함께 신라 석등의 걸작이며, 조성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백과]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LI>산스크리트와 팔리어의 한글 표기는 1986년 1월 7일에 문교부에서 고시한 ‘개정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된소리와 장음표기를 쓰지 않고, 동일 겹자음일 경우에 앞 자음은 받침으로 표기했다.
<LI>음사(音寫)는 산스크리트 또는 팔리어를 한자로 옮길 때, 번역하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을 말한다. <LI>예) 반야(般若, ⓢprajnā ⓟpannā) / 열반(涅槃, ⓢnirvāṇa ⓟnibbāna) </LI></UL> <H4 class="tit_subtit subtit_append">경전 표기법</H4> <UL class=list_literature> <LI>전거에서, 예를 들어 <雜阿含經 제30권 제7경>은 《잡아함경》 제30권의 일곱 번째 경을 가리킨다. <LI>《니카야(nikāya)》의 경우, <디가 니카야 22, 大念處經>과 <맛지마 니카야 54, 哺多利經>에서 22와 54는 경 번호이고, <상윳타 니카야 23 : 15, 苦(1)>에서 23은 분류(division) 번호이고, 15는 경 번호이다.
옛 절터에 남아 있는 도의선사탑(보물 439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