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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CM리서치)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로 집을 떠났으며(1972년), 정년은퇴할 때까지 47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하였다.(2019년) 더욱이 선교사로 해외에서 32년을 지냈다.
해외생활 중 1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할 때 잠깐 집에 들를 정도였다. 그러니 부모님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다.
아버님께서 95세되는 때(2018년) 어머니를 어떻게 만나 결혼했으며 평양에서 어떻게 피난 오셨는지를 글로 쓰시라고 부탁하였다. 기억력이 있을 때 직접 글을 씀으로 정확하고 분명한 삶을 알고 싶었고, 자손들에게도 인지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틈틈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을 좀 더 분명히 알고 싶었다.
해외에 있는 동안 아버님은 A4용지 7장 분량의 글을 쓰셨고 우편으로 보내 주셨다. 나는 아버님의 글을 대충 흘터보고 책꽂이에 보관해 두었었다.
아버님은 코로나 펜더믹 직전에 소천하셨고(2020년 1월 12일), 올해로 4주기를 맞았다. 그 이듬해 어머니도 소천하셨으니(2021년 4월), 평양에서 이남으로 피난 온 식구는 나만 남았다.
부모님 소천 3, 4주기를 마치고 피난길을 추적해 가보고 싶었다. 기일 때마다 동생들에게 "임진강을 가보고 싶다" 말하였고, 누이동생과 매제는 "언제든지 오시면 모시겠습니다"라고 약속받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장마오기 전에 임진강 방문을 결단한 것이다.(2024. 6. 29. 토)
우리 부부는 충주를 출발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제와 동생을 만나, 임진각, 임진강으로 향하였다.
장맛비가 오기 직전이라 햇볕은 따갑고 무더운 날씨였지만, 가슴 쓰라린 임진강에 도착하니, 불볕더위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우선 "임진각 평화곤돌라"에 탑승하여 DMZ를 넘어 북측 공동지역 임진강 평화 전망대에 이르렀다.
임진강 전망대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나와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고향에서 피난 오던 일을 회상하였다.
임진강을 곤돌라에 타승하고 건너면 "임진각 스테이션"에 도착한다. 스테이션에는 기념품 판매점과 베이커리 & 카페 등 편의시설이 있다.
기념품점에서 "PANMUNJOM DMZ" 모자를 동생이 방문 기념으로 구입하여 주었다. 모자 양편에는 유엔 참전국 깃발이 표시되었다.
또한 중절 신사 여름철 모자도 구입하였고, 매제가 "DMZ, 평화 화합" 뺏지도 사줘서 모자 앞에 부착하였다.
중절 모사는 방배단 앞에 올려놓고 부모님을 기리며 고향을 향해 참배하였다.
우리 가족 3은 평양을 떠나 1950.12. 초) 황해도 황주~구월산맥~임진강(1951. 1. 초) 건넘이 피난길이다. 이때 아버님은 28세, 어머님은 18세, 나는 3세였다.
아래글은 아버님께서 95세 때 손수 쓰신 글(2018년)로 처절한 피난길을 "엄동설한 임진강 가에서 그때 그 기쁨!"이란 제목으로 정리하였다.(노종해:2024. 7. 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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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 임진강 가에서 그때 그 기쁨!
인당 노병례(평화의 정론 발행인)
나는 일본 동경 경시청 검사로 독립운동 모의했다는 치안법 위반자로 유치장 신세 137일 복역했다. 그다음 해 1944년 B29의 오야고(父子) 소이탄의 유황불 세례로 다급한 중에도 내 입의 찬송은 저절로 나왔으며 피해 숨어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늘 미행하던 일본 고등계 형사가 나의 흔들림 없는 신앙에 감복으로 한인 징용 법에 의해 귀국은 불가능하지만, 귀국안내로 1945년 5월 24일 고향으로 귀국하였다.
나는 해방 석 달 전 1945년 5월 말 미행하던 일본 형사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며, 한동안 농촌계몽을 위한 야간학교도 만들어 청소년 가르쳤다.
그러나 곧 부모 동생의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양복기술을 습득하려 했다. 나보다 두 살 밑 누이동생의 남편이 평양에서 양복점 하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숙식하며 한 달에 2번 귀가하였고, 아내의 고생을 보고 참을 수 없어 더욱 양복기술 배우려 힘썼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국군의 북침으로 인민군들이 응전하여 남으로 진격하였으며 통일이 눈앞이라"는 선전 선동의 라디오 방송하지만, 미군기의 평양 공습 보며, 김일성의 공민증 안 받고 200리? 길을 걸어서 귀가하였다.
1950년 10월 7일부터 중공군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고, 인해전술에 유엔군은 후퇴, 철수에 급급하였다. 11월 한 달 동안 유엔군은 동. 서로 분단되었고, 서부전선 유엔군은 12월 4일 평양을 철수하였다. 동부전서 흥남철수는 12월 14일 철수 시작하여 흥날철수를 완료하였다.(12.24.)
나는 10월 24일 서해로부터 돌연 숙천 순천지역에 거대한 수송 비행기 십여 대가 바로 고향 숙천 부근에서 미군 낙하산 부대들의 투하를 보고서, "이제 해방이다", 여기고 다시 걸어 평양으로 양복 배울 생각으로 나가보니, 매부는 인민군으로 끌려 나가 무소식이었다.
고민하던 중, 국군들이 후퇴한다는 소식(12.4.)을 듣고 부모처자의 안위가 걱정되어, 대동강 남쪽에 있던 매부의 집에서 대동강 건너 북쪽 평양중신 지역에 이르렀다.
이 웬일인가! 중공군 밀려 내려온다며 인산인해의 피난민의 인파 끊어진 대동강 다리 부근에 밀려왔다. 대동강 다리는 중간이 끊어져 있었고, 피난민들은 다리 난간 위 70cm 정도의 넓이 철판 위로 살겠다고 엎드려 서로 건너고 있었고, 나도 살기 위해 같이 그 행열에 끼워 건너기 시작했는데 이 웬일인가?
푸른 대동강 강물의 인도교 다리의 아치 끊긴 곳의 사다리를 국군들이 치워 버리니, 남쪽으로 피난 가는 길이 막혀 도로 모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는 증에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어머님은 내 걱정으로 잠 못 주무시다가 국군들이 후퇴하는 줄도 모르고, 평양에서 나오시어 내가 있던 남쪽 매부네 집에 오시려다 대동강 가에서 만난 것이다.
놀랍도록 기뻤으나, 날이 저물어 한 밤 자려고 어머님 고향 친척집에 찾아갔다. 밤 지나고 난 새벽, 사람들은 해방의 인민군 들어온다며 붉은 인공기 내 걸며 우리 보고 빨리 피난 나가란다. 두려워 떨며 대동강 강가에 다시 나아오와 보니 1m 넓이의 나무 다리었다.
그것도 도중에 끊겨 있었으나 다행히 강물은 얼어붙어 있어 조심조심 강을 건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쪽으로 향해 민물처럼 밀려오는 피난민들의 인파 속에서 아버지와 처자 누이동생 만난 것이다. 이 또한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섭리라던 닌가!
어쨌든 서로 만나 기뻤으나, 뒤따라오는 잔악한 김일성의 인민군과 더 잔악한 모택동의 중공군이 무서웠다.
황해도 황주를 지나서 빈집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아버님은 더 이상 못 가신단다. 아버지는 만주 선교사에서 생겨난 위장병으로 늘 아프셨으며 더욱 심한 통증으로, 이젠 더 이상 못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님꺼서 통증이 심해 피난 못 가신다는 말에 할 수 없이 어머님과 누이동생들도 같이 떠나려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분들의 “아니 병든 남편 버리고 혼자 잘살겠다고 떠나는 여편네가 어디 있냐”는 말에 어머님은 아버지와 함께 피난 못 떠나셨다.
또한 누이와 어린 아들 셋과 또 다른 누이동생 두 명 등, 나와 처 아들 셋이 모두 아홉이, 대로 신작로는 인민군이 온다고 하여, 인민군들을 피해, 그 유명한 구월산맥(九月山脈) 아흔아홉 굽이굽이 고개를 넘었고, 대여섯 집 모여 사는 평화로운 촌락 어느 집에서 잤다.
자고 나서 생각하니 매부가 그래도 인민군으로 잡혀 나아갔으나 국군에게 사로잡혀 포로수용소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누이는 평양에서도 못 찾아 남하하다 지쳐, 자기네 평양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아내도 자기 친정 할머니와 부모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아내는 고향 마을 시부모님 계신 곳으로 같이 가겠다는 말에, 나는 마음 캄캄하고 아찔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나는 믿음을 지키려고 되돌아 갈 수가 없으니 당신이 가면 영영 못 볼 이별이다”라고 대뜸 말했고, 나의 말에 아내는 곧 “나도 같이 남하하겠다”는 말에 감사, 기쁨이 넘쳤으며 나와 아들, 셋이서 피난 남하의 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그것도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눈 덮인 황해도 산야의 험한 피난길이었다.
그것도 12월 4일 평양 떠나 이듬해 초까지 꼭 한 달간 아내는 잘못 먹지도 못하여 아들 애는 적게 나오는 젖을 먹여 허약해졌고. 아내는 애 업고, 덮을 보따리이고 얻어 먹이며 남하하였다.
드디어 최후의 자유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임진강에 이르렀다. 바로 그 근처 촌락에 이르러 빈집에 들어가 머무는데, 바깟 앞산에서 인민군 몇 명이 총을 메고 내려오지 않는가!
이에 놀라 수 백 명의 피난민들 모두가 다 인민군으로 죽을 판에 한 사람 한 사람 일렬로 겨우 임진강을 건너니, 미군이 교각 밑 웅덩이에 몰아넣었고, "이 중에 간첩이 많아 뒤돌아 강 건너가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아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미군들은 도로 건너가라 강요하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아! 혹독한 밤이었다. 진정 그날 밤은 더운 온돌방에서도 춥다고 하겠는데 그것도 강가의 연말연시의 날은 맑아 달은 밝은데 그 추이는 혹독하였고 날이 새니 얼어 죽은 애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우리 금덩이 같은 아들 애는 포대기로 안은 데다, 누이가 준 매부의 두꺼운 털 오버로 감싸 있었기에 무사했다.
날이 밝으니 그 무섭던 미군 흑인 병사가 한 사람 한 사람 몸수색하더니 서울 쪽으로 보냈다.
임진강 가에서 그때의 기쁨은 인간의 언어와 펜으로 어쩌다 표현할쏘냐! 눈물로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글: 인당 노병례-202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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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어머님과 3살 된 아들, 나는 엄동설한에 기차지붕위에서 부산까지 피난하였다. 그 추위와 위험은 상상도 못하지요!
피난 당시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나, 3명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잠깐 평양에서 남쪽으로 피난 갔다가 곧 고향으로 올 줄 믿고, 유엔군과 국군이 12월 초 평양에서 후퇴할 때 간단한 보따리를 챙겨, 남한으로 나(2살)와 부모님만 피난 나왔다. 부모님의 삶은 피난살이었으며 늘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시며 고향 땅을 못 잊으신 70년의 삶이었다.
명절을 맞을 때마다 나는 부모님과 국군 12.4 후퇴(1950년) 피난길(평양-임진강-서울-부산)을 헤아리며 상념에 젖었고, 처절한 부모님의 삶이 눈물로 저려왔다. 부모님께서는 6.25 한국전쟁이 곧 끝날 줄 알고, 1.4 후퇴 때 당시 3살인 필자와 부모님만 평양에서 부산까지 피난 왔으므로 남한에는 아무 친척도 없다.(참고;1.4 후퇴는 정부의 서울 철수날이다!)
부모님의 거실 중앙에는 항상 파괴된 평양철교 위를 기어서 건너가는 사진이 걸려 있으며, 아버님은 "네 엄마가 너를 업고 바로 이 철교를 넘어왔지, 아! 여기 있구나" 가리키며, 그날을 잊지 못하며 눈물 흘리셨다.
아버님은 우측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 지팡이를 짚으시고 엄동설한에 도보로 피난길을 걸었으며, 나는 어머니 등에 업히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임진강에 이르러, 구사일생으로 마지막 미군배를 타고 건넜다. 아!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
나는 난생처음 임진강 방문을 통해(2024. 6. 29.토)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독개다리, 자유의 다리, 지하벙커, 자유의 다리, 망배단 등을 관람하고, 반구정나루터집 식당에서 철책선 넘어 임진강 바라보며, 장어구이와 메기매운탕을 맛보았다!
식당은 임진강 나룻터에 있는데, GMZ 철책으로 막혀 있고, 민정경찰 군인들의 순찰로가 보인다!
월북시인 박세영의 "림진강"은 남과 북에서 지금도 노래로 불러지고 있다. 원작에는 "림진강"이나 "임진강"으로, 후렴에서 "남쪽 땅"을 "북쪽 땅"으로 부르고 있다.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애타는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로 가슴을 적시고 있다.(가수 양희은, 김연자, 알리 등)
임진강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위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월북 시인, 박세영의 시)
(후렴)
내 고향 북녘 땅 가곱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임진각, 임진강 방문 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