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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뢰식이 그의 조부 김철수의 고덕을 후세에 길이 경모기념하기 위해 세운 영규헌 전경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 마을에 있으며 김뢰식(金賚埴) 이 그의 조부(祖父)김철수(金喆銖)의 고덕(高德)을 후세(後世)에 길이 경모기념(敬慕記念)하기 위하여 세운 서재(書齋)로 사용하였던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영규헌(映奎軒)에는 국내(國內)에서 간행(刊行)한 명저(名著)와 중국고대(中國古代), 당송대(唐宋代)의 중국본서적(中國本書籍)이 보존(保存)되고 있다.
건축 양식은 홑집 중당협실형으로 5량가의 정면4칸,측면1.5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김뢰식(金賚埴 : 1877~1935年) 선생은 의성김씨 세계(世系)상 제32대이다. 그의 자는 은필(殷弼), 호는 남호(南湖)이다. 김뢰식은 전 재산을 저당 잡혀 대부를 받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 공이 인정되어 1977년 국가로부터 건국공로 표창을 받았다. 배위는 안동 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김철수(金喆銖 :1822 ~ 1887)선생은 본관은 의성. 초명은 박수(璞銖), 자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아버지는 통덕랑 김재신(金在信)이고,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후손과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담(金淡)의 후손인 김장배(金章培)의 딸이다.
김철수(金喆銖)선생은 1822년 봉화 해저촌(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횡송(橫頌)하고 도송(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5세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나았으며, 9세에 의성김씨 시문집인 문소세고(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벽자(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환하게 알았고, 할아버지 문천공(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암송했다.
1835년 음죽이씨(陰竹李氏)와 혼인하였다. 1849년에는 모친상을, 185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1858년(철종 9) 노원서실(魯園書室)을 지었고, 1864년(고종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존경각(尊經閣)의 장서를 탐독하여 성현(聖賢)을 존경(尊敬)하고 도(道)에 몸바칠 것을 깊이 다짐하였다. 1867년 이헌기(李憲基)의 죄상을 지적했다.
1871년 사액서원 중 47곳을 남기고 나머지는 훼철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분개하기를 “서원훼철이 교화(敎化)에 관계됨이 막중(莫重)하니 신자(臣子)로서는 마땅히 간쟁(諫爭)하여야 할 일인데 오히려 태학(太學)에서 먼저 철향론(撤享論)을 주장하겠느냐” 하고 유건(儒巾)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집정(執政)에게 미움을 받아 하옥되어 문의현(文義縣)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명천(明川)으로 이배되었다. 나중에 풀려 나와 괴산의 제월대를 거쳐 7월에 노원 자택으로 돌아왔다.향리에 숨어살며 독서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유배 생활 동안 도내 서원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 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주었으며, 훼철된 이산서원과 삼계서원으로 가서 사우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0년 뒤 왜구가 들어오고 사설(邪說)이 만연함을 개탄하며 이단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호를 미추자(味鄒子)라 하였다.
병풍에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과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1876년에 삼계서원에서 천사(川社)의 부계장(副契長)으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1877년에 영남 유생들이 서원의 복설 상소를 올리고자 소수서원에 소청을 차렸을 때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1878년 봄에 학사공(學士公)의 고식(故寔)을 간행하였고, 추령의 선비들이 충재 권벌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김철수를 소수(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노원집(魯園集) 10권 5책이 전한다. 1879년(고종 16) 이후에 기자로부터 대산 이상정(李象靖)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전현들의 장갈문을 찬집하여 동헌록(東憲錄)을 지었고, 1884년(고종 21) 역대성현전수편(歷代聖賢傳授編) 1권을 편집하였다. 수득록(隨得錄)·모년기사음청약기(某年記事陰晴略記)·노원만록 및 경사와 제자서 1,000여 권이 노원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노원집(魯園集)은 목판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되어 있으며 1913년 그의 아들 난영(蘭永) ·화영(華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2에는 사(辭)와 시(詩), 권3∼4에 서(書), 권5∼6에 청장(請狀)과 잡저(雜著), 권7에 서(序)·기(記)·설(說)·발(跋)·전(傳) 상량문·명(銘), 권8에 제문(祭文)·뇌문·유사(遺事)·행장(行狀), 권10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서(書)의 여기산정장민병(輿箕山鄭丈民秉)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뜻이 담긴 것으로, 당시 유림(儒林)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내성사약절목(奈城社約節目)은 그가 내성사의 부계장(副係長) 때 지은 것으로, 국조향례합편(國朝鄕禮合編)과 창로사약(蒼老社約)의 도표(圖表)를 참고하여 사약(社約) .벌목(罰目) .벌칙(罰則) .독약례(讀約禮)와 각종 행례(行禮)에 대한 도표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므로, 당시의 계(契)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정리=봉화군문화재지킴이 방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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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 만회고택추천 0조회 5113.12.30 04:53댓글 0
聞韶世稿 聞韶世稿序 近世士大夫家往往裒輯先世文字。合爲一編。名之曰世稿。蓋所以闡發家門文獻之美也。然其連世而有德業者寡矣。歷五六世或十餘世而能世其家者爲尤寡。况自得姓以來至于己身。皆有文章事行之可述。豈非絶無而僅有者哉。吾友金君鎭東甫。以其所編世稿示余。余謹受而卒業。作而曰。盛矣哉。吾聞源深者流長。根培者葉茂。其公家之謂乎。聞韶之金。爰自羅季。迄于國朝。儒賢輩出。不可悉記。今以七峯一派言之。七峯,開巖,東岡三先生。以德學文章。顯於明宣之際。後數世而入吾先生父子又繼起。爲之光前而啓後。蓋其法門。以忠孝爲主本。廉潔爲家計。經訓爲菑畬。於是乎子孫世守之。弘儒韻士。比肩林立。桂籍蓮榜。逐世蟬聯。封靺成行。珠璣照燭。蔚然爲一邦之名宗。已數十世矣。譬如閬苑琪樹。枝枝相承。葉葉相禪。瓊葩玉蘂。其發益奇。而同出於一根。今因是編之出。而悉以表見於世。則吾子裒輯之功。又曷可少哉。雖然吾子之編是書。非以耀明于世。蓋欲使後世子孫。追念先德而有所持循也。吾觀是編。有居家之道焉。有事君之節焉。有撿身之則焉。有接物之方焉。自玆以往。凡爲金氏者。無不以是編爲繩尺。行一事出一言。必曰無或得罪於世稿乎。處乎家需乎世。輒曰無乃有違於世稿乎。其或有不入規度者。又必責之曰爾不見世稿乎。不以科宦之不繼爲憂。而惟以德義之不修爲懼。不以門闌之彬郁爲喜。而惟以先業之不墜相勉。則吾見金氏之門。日見其昌大。而世稿之書。世世有續編矣。豈不休哉。金君曰。善乎子之言也。吾將載之而歸。與門族共勉焉。於是次其語。爲世稿序。 上之十四年庚戍六月下澣完山柳長源謹序 1. 七峯遺集 김희삼(金希參) 1507년(중종2)∼1560년(명종15) 2. 伊溪逸稿 김우홍(金宇弘) 1522년(중종17)~1590년(선조23) 3. 開巖集 김우굉(金宇宏)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4. 茅溪逸稿 김우용(金宇容) 1538년(중종33)~1608년(선조41) 5. 東岡集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1603(선조 36). 별도 6. 柱峯逸稿 김득가(金得可) 1547년(명종2)~1591년(선조24) 7. 天有遺稿 김 률(金 瑮) 1568년(선조1)~1651년(효종2) 8. 畏棲庵逸稿 김추임(金秋任) 1592(선조 25)∼1654(효종 5). 9. 鶴汀逸稿 김추길(金秋吉) 1603(선조 36) ~1686년(숙종12) 10.八吾軒集 김성구(金聲久) 1641(인조 19)∼1707(숙종 33). 11.修撰公遺稿 김여건(金汝鍵) 1660년(현종 1)∼1697년(숙종 23). 12.望道翁遺稿 김여용(金汝鎔) 1662(현종 3)∼1735(영조 11). 13.拙菴遺稿 김여당(金汝鏜) 1667년(현종8)~1719년(숙종47) 14.松鶴遺稿 김경찬(金景澯) 1680년(숙종6)~1722년(경종2) 15.松庵遺稿 김경헌(金景瀗) 1690년(숙종16)~1744년(영조20) 16.丹沙遺稿 김경온(金景溫) 1692년(숙종18)~1734년(영조10) 17.西坡逸稿 김경철(金景澈) 1698년(숙종24)~1764년(영조40) 18.鶴陰遺稿 김경필(金景泌) 1701(숙종 27)~ 1748년(영조24) 19.羅溪遺稿 김필동(金必東) 1706년(숙종32)~1756년(영조32) 20.一枝窩遺稿 김택동(金宅東) 1708(숙종 34)∼1778년(정조 2) 21.百懶軒遺稿 김서동(金瑞東) 1709년(숙종35)~ 1771년(영조47) 22.素巖集 김진동(金鎭東) 1727년(영조 3)∼1807년(순조 7). 23.臥隱集 김한동(金翰東) 1740년(영조 16)∼1811(순조 11) 24.白山文集 김희분(金熙奮) 1760년(영조 36)∼1822(순조 22) 25.文泉集 김희소(金熙紹) 1758년(영조 34)∼1837년(헌종 3) 미수록 26.葛川集 김희주(金熙周) 1760년(영조 36)∼1830년(순조 30). 27.故寔 김희락(金熙洛) 1761년(영조 37)∼1803년(순조 3). 28.晩悔軒集 김건수(金建銖) 1790년(정조 14)∼1854(철종 5). 미수록 29.鶴浦集 김우수(金禹銖) 1804년(순조 4)∼1874년(고종 11) 30.魯園集 김철수(金喆銖) 1822년(순조22)∼1887년(고종23) 목록만 수록 31.心山遺稿 김창숙(金昌淑) 1879(고종 16)∼1962. 聞韶世稿總目 卷之一世系圖始祖詹事公墓碑鎭民祠移建記七峯先生逸集賦詩書誌文 附錄伊溪逸稿祭文附錄卷 之二開巖先生文集詩賦疏 卷之三 開巖先生文集䟽劄啓辭教書書跋祭文墓文 卷之四 開巖先生文集年譜附錄 卷之五芧溪逸稿詩附錄東岡先生逸稿劄啓 教書劄錄附孺人金氏墓誌[適士人李應命] 卷之六柱峯逸稿詩附▣ 附孺人金氏墓誌銘[適士人柳成龜] 卷之七天有堂遺稿詩 卷之八 鶴畏天汀雜祭詩棲銘書有稿逸卷著文菴卷遺堂之逸之十稿九稿 ▣附祭 ▣錄文 詩卷之十一 鶴汀逸稿書祭文序記雜著墓誌附錄 進士公墓誌銘處士公遺事 卷之十二八吾軒先生文集詩 卷之十三八吾軒先生文集詩 卷之十四八吾軒先生文集 䟽啓辤卷之十五吾軒先生文集經筵講義 卷之十六八吾軒先生文集書銘狀八祭文行狀雜著 卷之十七八吾軒先生文集附錄 卷之十八草堂公墓碣銘修撰公遺稿詩 書祭文疏啓辭經筵講義 卷之十九修撰公遺稿附錄 卷之二十望道翁遺稿 詩附錄拙菴遺稿詩祭文附錄處士公墓誌 卷之二十一松鶴遺稿詩 卷之二十二松鶴遺稿附錄處士公遺事松庵遺稿詩祭文附錄 卷之二十三丹砂遺稿 詩卷之二十四丹砂遺稿書祭文行狀通文囘諭文銘雜著 卷之二十五丹砂遺稿附錄 卷之二十六處士公墓誌西坡逸稿詩墓誌雜著附錄 松窩公墓碣銘 卷之二十七鶴陰遺稿詩 卷之二十八鶴陰遺稿詩 卷之二十九鶴陰遺稿詩 祭文䟽雜著附錄湖叟公墓碣銘 卷之三十羅溪遺稿詩哀辤序 行錄附錄卷之三十二一枝窩遺稿詩書上樑文祭文附錄 卷之三十二 百瀬軒遺稿詩䝺墓誌附錄望雲齋行錄松下公墓誌銘附孺人金氏墓誌 聞韶世稿總目 聞韶世稿卷之一 바래미 문소세고.hwp |
강익(姜翼,1523~1567)
介庵先生文集下 / 附錄 / 年譜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42 金宇弘이 군수로 부임하여 서원에 東西齋舍를 짓고 감사 李戡이 서원의 운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해 주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44 7월, 金宏弼과 鄭汝昌의 春秋致祭를 지내게 해 줄 것을 누차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정의 허락을 받아서 ‘灆溪書院’이라고 賜額하다.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42 | 金宇弘이 군수로 부임하여 서원에 東西齋舍를 짓고 감사 李戡이 서원의 운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해 주다. |
嘉靖四十三年甲子。先生年四十二歲。是年。金侯宇弘爲郡侯。乃東岡金先生之兄也。侯亦律已有度。雅景仰先生。始至。先訪先生。相與契許最深。常以爲院宇旣成。而東西齋舍。猶未營建。生師一堂。禮儀不嚴。乃與金侯相議。
更建東西齋舍。
동재, 서재를 건립하고
齋下左右。鑿小池。
동서재 아래에 작은 못을 파고
池邊種梅竹有次。
못 가에는 매화나무, 대나무를 죽 이어 심고
池中植紅白蓮花。
못 안에 홍연화, 백연화를 심었다.
於是。堂齋儼然階砌峻整。門路折旋。鑿鑿可觀。曹梅庵溥。素以筆名於世。先生乃使書大字。扁其堂曰明誠。扁其左右夾室曰居敬,集義。扁其東西齋曰養正,輔仁。其齋軒曰愛蓮,詠梅。其大門曰遵道。請于監司李相戡。得四邑食鹽,兩邑魚醯,三條漁基。而永屬於院。以備養士之需焉。
嘉靖四十四年乙丑。先生年四十三歲。院中學徒。交集講業。而書籍無存。財穀不多。先生大懼無以養育人材。以盧徙庵裸。掌備書之任。以梁竹庵弘澤。典裒寶之責。終始協心。克有成就。書秩凡百餘卷。財穀有裕於供士。先生乃與玉溪,九拙兩先生定議。分院財。各授境內書堂及洞內。使之各助其昏喪。而春秋行講信禮。遂爲一鄕定式。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44 | 7월, 金宏弼과 鄭汝昌의 春秋致祭를 지내게 해 줄 것을 누차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정의 허락을 받아서 ‘灆溪書院’이라고 賜額하다. |
嘉靖四十五年丙寅。先生年四十四歲。蓋自寒暄,一蠧被禍之後。雖有正德丁丑昭雪之典。而當時大臣。議以爲無立祠之地。令各於家廟。春秋致祭。今旣立祠。則當致祭於院。而擅陳俎豆。不合禮法。故陳辭丐請。不知其幾。而世罕好德之賢。未遇轉達之期。
군수 김우홍을 통하여 감사에게 전달, 조정에 사액을 신청하여 윤허를 받다.
幸賴金侯來守。又遭朴相公啓賢觀風。始得上達。秋七月宣賜額號曰蘫溪書院。令春秋致祭。其間周旋之際。玉溪,九拙,靑蓮。實有力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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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홍(金宇弘) (1522~1590)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삼척 부사(三陟府使) 김희삼(金希參)의 아들로, 나주 목사(羅州牧使)ㆍ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냄.
김우홍 함양군수 재임기간 1564~1568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42 | 金宇弘이 군수로 부임하여 서원에 東西齋舍를 짓고 감사 李戡이 서원의 운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해 주다.개암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44 | 7월, 金宏弼과 鄭汝昌의 春秋致祭를 지내게 해 줄 것을 누차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정의 허락을 받아서 ‘灆溪書院’이라고 賜額하다.개암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29 | 여름, 모친상을 당하다.동강.개암.이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