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간의 세계 추구
하 재 준
1. 나는 그간 이렇게 수필을 써 왔다.
내가 살아온 현실 속에서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삶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을까. 화석처럼 굳어져 버려진 지난날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과 만나면 그만큼 새 모습과 새로운 내용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숨쉬는 삶의 모습이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쓰는 글이 나의 수필이다.
평범한 일상적인 나의 생활이자 누구나 겪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에다 내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했을 뿐이다. 그러면 의미부여란 무얼까? 우리의 삶의 내용이다. 멋을 부여하는 일이다. 음식에 맛을 부여할 때 혀끝에 미감을 자극시켜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듯이 우리의 삶의 내용에 멋을 부여했을 때 삶의 의미와 가치가 충만해지는 것이 아닐까? 맛과 멋은 한 뿌리라고 여겨진다.
“삶의 참맛을 모르는 사람은 멋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이 바로 이를 뒷받침해 주는 말이 아닌가.
멋은 세련된 삶에서 피어오른다. 흥겨운 흥취에서 또 돋아나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할지라도, 사회적 지위가 높을지라도 조잡한 삶에는 멋이 없는 것이요, 진정한 흥겨운 흥취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세련된 삶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평범한 일에도, 하찮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일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이러한 작업의 글이 나의 수필이다.
2. 수필의 글감
① 생활 체험
② 자연에서 얻은 느낌
③ 사회생활에서 얻은 교훈 등을 주로 써 왔다.
위에서 말한 ①, ②의 경우는 경수필로 ③은 중수필로 주로 써 왔는데 중수필이라고 하면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칼럼의 형식들이다.
다시 말하여 내가 보고 느끼는 무엇이나 쓸 수 있는데 오직 개성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느낀 것에다 다시 의미부여해서 자연스럽게 토해내고 있다.
나는 때때로 입맛이 없으면 주로 밥을 비벼 먹는다. 그렇다고 독특한 자료를 넣은 것도 아니다. 식탁에 올려놓은 반찬 그대로 넣고 비벼도 제법 멋있는 비빔밥이 된다. 더 첨가하고 싶으면 고추장과 참기름을 추가로 넣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짜지 않도록 적절하게 넣어야 할 것과 첨가한 고추장과 기름이 많이 들어가 너무 맵거나 느끼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만 하면 무슨 반찬을 넣던 자유인데 누구나 맛을 느낄 수 있으면 훌륭한 비빔밥이요 이것을 문학으로 말하면 수필이 되는 것이다.
3. 수필의 맛
수필의 맛은 별미의 맛이 아니라 쌀밥의 맛이다. 주로 입맛이 없을 때 별미를 찾는데 그 맛은 매우 쌈박쌈박하여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 주기에 이렇게 맛있는 밥을 평생 먹었으면 참 좋겠다고 여기지만 서 네 끼니만 계속 먹으면 곧 질려 더 먹기 싫다. 그러나 쌀밥은 별미처럼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느낄 뿐 아니라 평생을 먹어도 질리는 것이 없고 안 먹으면 먹고 싶은 것이 곧 쌀밥이다. 그뿐인가. 살과 뼈를 만들고 튼튼하게 해 주어 건강하고 아름답게 미모(美貌)를 이루어 내는 것이 역시 쌀밥이니 과연 으뜸인 것이다. 이것을 피천득은 수필을 빛깔로 표현했는데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도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도 않고 언제나 온아하고 우아한 것이다” 라고 했다.
4. 수필은 자기 고백의 문학이다.
소설이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섹스피어는 햄리트가 되고 플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리고 시 역시 시적 자아가 있다. 그러나 수필은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하게 나타내는 문학이다. 다시 말하여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말한다.
수필의 원조라 일컬음을 받는 몽테뉴도 그의 수필집 서문에서 “내가 그리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의 결점까지도 나의 수필에서 읽혀진 것이다. 내 자신이 이 수필집의 내용이다” 라고 말하였다.
수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필자 자신의 개인적인 또는 인격적인 색체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 본질을 말할 때 기술(記述)도 아니며 설명도 아니요, 논의(論議)도 아니다. 더욱이 작가의 자아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씌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최승범) 라고 했다.
5. 수필을 쓸 때의 나의 마음가짐
① 나만의 렌즈로 글을 썼는가.
② 구성은 잘 이루어졌는가.
③ 서두에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썼는가.
④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썼는가.
⑤ 글의 품위를 잃지 않았는가.
⑥ 단일 주제로 썼는가.
⑦ 진실의 기록인가.
⑧ 이 글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는가.
⑨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인가.
⑩ 유머와 위트를 가급적 사용했는가.
⑪ 수미쌍관법을 이용하여 주제의 선명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기도록 했는가.
⑫ 한 편의 수필 속에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담을 수 있는 작품인데도 빠뜨렸는가.
⑬ 상상력이 풍부하여 문학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는가.
(잡문은 되지 않았는가.)
⑭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기 위하여 흥미와 쾌락을 유도하므로 건강심리를 병들게 하지는 않았는가.
⑮ 한 편의 수필을 읽는 독자에게 희망과 의욕을 심어 주었는가.
이상의 것들을 확인해 가면서 한 편의 수필을 해산한다. 특히 ⑮번을 주로 마음에 두고 쓰다보니 나의 수필이 교훈적이라는 말도 더러 듣는다.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혹은 웅변식으로 이루어짐도 아니다. 예를 들면 내가 절망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하자. 그리고는 바로 그 뒤에 나의 생각을 펴는 것이다. 그러기에(절망적 상황,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힘있게 주먹을 쥐었다고 하자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독자는 그 수필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고개를 끄덕이며 옳아 하지 않을까. 필자는 한 편의 수필에서 독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역할이 아닐까. 여기에 문학에서 말하는 상상(想像)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수필이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문학의 정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상상의 세계를 통하여 아름다운 인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의 세계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사고(思考)의 세계다. 이상(理想)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한 사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위와 같은 생각으로 수필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