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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펀트 타워
이 홍사
잠을 자면서도 손가락이 팽창하는 듯 당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결에도 산화제는 어지간히 독한 화공약품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손가락 끝마다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잡혀있고 남의 살처럼 감각이 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했어야 했는데.......
새벽 샤워를 하다 보니 손가락마다 허물이 벗겨지는 것처럼 각질이 일어났다. 거친 목욕 타월에 비누칠을 해서 문질렀지만 일부분만 떨어지고 손가락은 역시 남의 살처럼 감각이 둔했다. 아무래도 며칠은 갈 것 같다.
군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며칠 간다는 것을 안다. 군에서 보급품 검열을 나온다고 하면 야전삽과 반합, 그리고 사물함과 내가 맡은 곡사포에 윤이 나도록 국방색으로 칠을 했어야 했다. 국방색 물감에 산화제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을 해서 칠을 하고 나면 페인트가 묻은 손가락에 국방색 물이 들며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게 며칠 지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벗겨지고 없다.
손가락에 물이 들지 않은 걸 보니 착색제는 아닌 것 같고 산화제가 그리 독한 모양이다. 욕실에서 나와서 몸을 닦으며 어제 저녁 무렵에 칠해서 화장대에 올려놓은 열여섯 마리의 목각 코끼리를 보았다.
깔아놓은 신문지가 빳빳하게 마른 걸 보니 어지간히 말랐다 싶어 다가가 검지로 살짝 눌러 확인을 하니 완전히 말라있었고 칠을 하기 전과는 때깔이 완전히 다르다. 착색이 잘 되어 나무의 문양이 그대로 나타나며 윤기가 흐른다. 손가락은 이 모양이 되었지만 칠을 하길 잘했다. 들여다보고 있는 코끼리도 모두 알몸이었지만 나도 코끼리에 정신이 팔려 알몸이었다. 아차! 제수씨에게 줄 물건인데 이런 실례가 없다.
-팬티가 어디 있더라?
어제 저녁 무렵 현장에서 돌아오다가 차가 밀리는 곳에서 주춤거리고 있는데 도로 옆에 페인트 가게가 보였다. 그렇잖아도 페인트 가게를 찾고 있던 참이라 바로 차를 도로 가장자리에 세우고 스프레이처럼 뿌려서 간단하게 윤을 낼 수 있는 투명 착색제를 사리라고 생각했다. 헌데 페인트 가게에 들어가니 그런 스프레이는 아직 미얀마에 들어와 있질 않았다. 말은 통하지 않고 손짓발짓을 동원한 이른바 보디랭귀지로 페인트를 사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착색제는 깡통이 아니라 커다란 유리병에 들어있었다. 그것도 한 병이 아니라 두 병이었다. 착색제와 산화제가 따로 들어 있었다. 이 만큼 필요 없다고 하고 그걸 반으로 나누어 더 작은 병에서 담아서 사고 붓을 하나 사서 들어왔다. 페인트 가게 주인은 미얀마 말과 영어를 섞어 칠대 삼으로 혼합을 하라고 하고는 알아들었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알아들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잔돈을 받았다.
간단하게 스프레이로 뿌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숙소로 들어와 현관에 신문지를 깔고 목각 코끼리를 꺼내 놓으니 대대적인 공사가 되었다. 바닥에 흐른 액체를 가사도우미 포포가 걸레가 아닌 휴지를 들고 바로 닦고 신문지를 들추어보니 베어 나온 액체가 장판에 흥건했다. 정작 칠을 하는 것보다 뒤처리가 더 힘들었다. 손재주가 무딘 작자라 손에 떡칠을 하며 겨우 완성해서 화장대에 신문지를 깔고 올려놓았는데 새벽에 보니 참 잘 말라있다. 옷을 입으며 멀리서 보아도 흡족하다.
코끼리는 크고 작은 게 세어보니 열여섯 마리지만 작품으로는 세 점이다. 일명 코끼리 탑, 코끼리가 코끼리를 업고 있는 나무 조각품이다. 일단 저 조각품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 제수씨에게 전해주는 건 시간문제다. 사진이라도 찍어 먼저 아내에게 날릴까 생각하며 옷을 입었다.
지금이 새벽 네 시 반이다. 나는 거의 이 시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현관에 차려놓은 임시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한국을 읽으며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새벽 시간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일단 사진을 찍으려면 깔아놓은 신문지부터 치워야 한다. 코끼리 탑을 들고 신문지를 말아서 휴지통에 넣고 보니 화장대에 올려놓은 작품이 한결 돋보인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현관에 차려놓은 임시 사무실로 나왔다.
코끼리 탑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지난봄이었다.
이동 통신사가 두 개나 생기는 바람에 미얀마의 통신 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져 지금은 카톡까지도 할 수 있지만 그날따라 통화품질이 왜 그렇게 안 좋은지. 거의 한 달 만에 통화하는 안부전화 말미에 아내는 생각난 듯이 코끼리 탑을 사오라고 했다. 제수씨의 부탁이라고 했다. 국제전화 요금이 다운되는 소리가 통화음보다 더 크게 들리는 수화기에 대고 뭘 말하는 거야? 다시 물어도 잡음 속에 코. 끼. 리. 탑! 목청을 높여 한 음절씩 잘라서 말을 했다. 잡음은 심했지만 말은 알아들었는데 뜻을 모르겠다. 그게 뭘까? 어떻게 생겨먹은 걸 얘기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코끼리 문양이 새겨진 탑을 얘기하는 것일까?
-도대체 뭘 얘기하는 거야?
-몰라요. 당신이 껌뻑 죽는 제수씨가 사오래요.
전화는 감이 안 좋아 그 말만 하고 끊었다. 아내는 내가 알아들었건 말건 전했으면 그만이라는 투였다. 아내는 분명히 말했다. 당신이 껌뻑 죽는 제수씨라고. 아내의 말에는 ‘껌뻑’이라는 음절에 힘이 실렸다. 그 ‘껌뻑’ 이라는 수식어는 설명하기 모호한 시기와 질투 같은 오묘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 옆에서 컴퓨터로 도면을 보완 수정하는 이 부장에게 물었다. 이 부장은 눈길을 모니터에 주고 있지만 통화내용을 다 들었다.
-이 부장! 코끼리 탑이라고 들어봤어?
-걸씨요. 뭔 말씀하시는지 모르것는디.......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모니터에 눈길을 주고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이 자식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차마 뱉지는 못하고 울대 밑으로 꿀꺽 삼키고 현장으로 나갔다.
전화로 코끼리 탑을 사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이내 잊었고 일에만 전념하다가 귀국했다. 그게 지난봄이었는데 우기가 닥치기 전에 기초공사를 마감해야 했기에 쫒기는 사람처럼 엄청 바빠서 코끼리 탑이란 물건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그 말 자체를 까맣게 잊고 귀국했다. 엄청 바쁜 철이라 귀국하던 날도 오후 늦게까지 두 곳의 현장을 체크하다가 밤비행기로 귀국을 했다.
귀국을 하면 한국에도 밀린 일이 기다리고 있다. 장비가 들어가는 현장마다 중장비업자랍시고 얼굴을 디밀어야 했다. 막내 여동생에게 맡겨둔 현장을 일일이 돌아보고 체크하는 게 귀국하면 가장 급한 일이다. 여동생은 전화를 받고 배차만 하지 현장관리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들어가면 가장 먼저 현장을 돌고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한다. 게 중에서 좀 껄끄러운 말이 들리면 현장 소장이나 대리를 불러내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줘야 한다.
한국에서 그냥 중기 임대업만 하면 좋으련만 건설 경기가 시들해져 한국 일에만 목을 매기에는 처량할 정도다. 중기 업자라 그런지 일없이 세워두고 있는 중장비를 보는 건 고역이다. 일감을 감안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더듬어 작년 초에 장비 보유 대수를 반으로 줄이고 그 돈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 미얀마의 주택사업이었다. 미얀마에 발을 디딘 지 일 년이 좀 넘었지만 아직 투자기간이라 수익은 없다. 사업과 홀아비 불알은 주물럭거리면 커진다고 했다. 당초에는 여윳돈으로 아르바이트삼아 시작했는데 주물럭거리다 보니 커져서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시작할 때의 예상과는 달리 대출받아 엄청 쏟아 붓고 있는 상태다. 두 나라에 일을 벌여놓으니 한 달은 한국, 한 달은 미얀마에서 생활하는 철새가 되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쪽 일이 걱정되고 저쪽이 있으면 이쪽 일이 궁금한 실정이라 항상 마음만 바쁘다.
제수씨의 부탁을 까맣게 잊고 한국에 들어가서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전에 제수씨와 통화를 했는데 당신 들어왔다고 하니 코끼리 탑을 사왔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제수씨는 대구에 살고 우리는 구미에 산다. 들고 들어간 캐리어는 아내가 열어서 정리했으니 그런 물건이 없다는 건 아내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전화를 한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뿐더러 깜빡 잊었다고 하니 아내는 말했다.
-당신이 껌뻑 죽는 제수씨 명인데 그걸 잊어요?
아내는 또 ‘껌뻑’이라는 수식어에 힘을 실었다.
-아무튼, 못 사왔으니 끊어! 나 지금 바빠.
사실이지 제수씨 말이라면 나는 아내 말마따나 ‘껌뻑’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조심스러운 사람이 바로 하나 뿐인 제수씨다. 뱉으면 가슴 쓰린 말이지만 동생이 죽고 나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동생이 죽고 없다.
믿기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 덤덤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옆구리가 허전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게 미칠 것만 같고 정도가 심해져 먼저 간 녀석이 얄미울 때도 있다. 녀석이 죽는데 형이란 작자가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 죽고 나서 절에서 천도를 올려준 게 고작이다. 생각하니 또 가슴이 쓰리다 못해 명치가 아프다. 가급적이면 생각을 말아야지.
녀석이 죽고 술이 늘었다.
매일 저녁 소주 한 병이다. 경우에 따라 못 마시는 날은 잠을 설친다. 마흔 여섯, 피 끓는 나이에 죽은 동생도 동생이지만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제수씨를 생각하면 가슴이 더 미어든다. 너무 안쓰러워 내가 살아있음이 죄스러울 정도다.
동생은 죽기 전에 대구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 교사란 직업이 제 적성에 맞는지 내가 알기로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열성을 들이부었다. 딱 이십 년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죽었다. 동생이 췌장암으로 죽을 적에 나도 췌장이 성치 못했다. 췌장이 인슐린을 분비하지 못해서 생긴 당뇨가 점점 심해져서 약을 쓰지 않고 인슐린 펌프를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약을 복용하면 인슐린을 분비하도록 췌장을 쥐어짜는 역할을 한다. 펌프를 차고 강제로 인슐린을 주입하면 췌장은 제 기능을 하지 않고 쉰다. 그렇게 일 년간 쉬도록 만들고 나서 지금은 약을 복용하고 있다.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근데 췌장암이란 고약해서 걸렸다 하면 수술이 불가능하다. 항암치료 밖에는 방법이 없다. 췌장이란 놈은 옆구리 대동맥 옆에 바짝 붙어 있어 암이 생기면 암 덩어리가 온 몸으로 내려가는 대동맥을 물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최첨단 현대 의술이라도 대동맥을 건드리지 않고 암을 제거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췌장암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했기에 그 사실은 동생도 알고 있었다. 두 번 다 가슴을 열어보고는 손도 못 대고 닫은 경우였다.
동생은 항암치료를 받으며 제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살던 아파트를 과감히 정리하고 이 층짜리 단독주택을 샀다. 동생에겐 아들, 그러니까 조카가 둘이 있는데 나중에 장성하면 큰 놈은 일 층, 작은 놈은 이 층에 살라고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제가 죽으면 연금이 얼마가 나오는지 정확히 계산을 했다. 그 돈으로는 아이들 공부시키며 제수씨가 홀로 살아가기에 부족하다는 걸 인지하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요청을 받을 적에 동생은 대구의 대학병원에 있었고 나는 인슐린 펌프를 차고 충주호 호반에 있는 대학병원 부속 요양시설에서 혈당을 체크하며 췌장을 쉬도록 만들고 있었다.
동생의 요청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경영하는 중기 사무실에 중기를 한 대 사서 지입으로 넣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모자라는 생활비를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둘 다 병원 신세를 지며 그런 내용을 문자로 주고받았다. 중고 중기를 살 여윳돈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나는 퇴원을 강행했다. 파악하니 중고지만 포클레인은 살 돈이 안 되고 적당한 덤프트럭은 가능했다. 당시에 포클레인은 기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아니었다.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셔오기였다. 허나 덤프트럭은 기사가 늘려있었다. 일감도 포클레인보다는 덤프트럭이 많았다.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포클레인은 어렵고 덤프트럭으로 하자고. 동생은 순순히 중기 사업은 문외한이니 형님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기 임대업 삼십 년이 넘는 내가 중고차를 워낙 많이 팔아보고 사보아서 결정한 일에는 거침이 없었다.
제수씨가 통장으로 보내온 금액을 확인하고 인터넷 중고 중기매매사이트를 훑었다. 적당한 연식과 기종을 선택하고 다섯 대를 찍어서 면밀히 훑어보며 두 대로 압축 시켰다. 그리고는 다음날 예비 기사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인터넷으로 찍은 두 대를 눈으로 확인하고 엔진소리와 주행상태까지 확인하고 한 대를 사서 바로 끌고 왔다. 끌고 오며 전화로 기사를 구하고 다음날부터 작업현장에 투입했다. 계산을 하니 쏠쏠한 이익을 남겨주었다. 월급만 받아보던 동생은 기사 월급을 제하고 수리비와 기름 값을 제하고 보내주는 돈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동생은 돈을 받을 때마다 응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때는 건설경기가 좋아 일감이 밀려있던 상태였다. 덤프트럭을 사고 여섯 달 후에 동생이 죽었다. 동생이 죽던 날도 덤프트럭은 현장에서 흙을 실어다 날랐고 장례를 치르던 날도 덤프트럭은 일을 했다.
지난 일을 돌이키니 또 가슴이 쓰리다 못해 위경련이 일어나는 것처럼 목울대까지 통증이 온다. 동생이 주고 간 증상이다. 지난밤에 마시다가 남겨둔 싸늘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선생님이던 동생이 죽자 제수씨는 사모님에서 과부로 수직 추락을 했다. 그렇게 추락한 무남독녀 제수씨의 존재가 내 어깨에 실려 엄청 무겁게 여겨졌다. 나는 덤프트럭을 알뜰히 돌려 수익금을 제수씨에게 보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덤프트럭이 일 년 정도는 잘 돌아갔다. 전국토를 거대한 공사판으로 만들었던 정권이 끝나고 다시 정권이 바뀌자 일감이 팍 줄었다. 복지에만 신경을 썼지 건설은 버린 자식이다. 덤프트럭이 일을 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그 때는 동생 차뿐이 아니라 내 차가 세 대나 더 있었다. 내 덤프트럭 두 대와 포클레인 세 대를 과감히 정리하고 덤프트럭은 두 대만 돌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쉬는 날이 더 많았다. 억지로 일감을 만들어 돌리고 있는데 설상가상 덤프트럭이 일을 한 현장 두 군데에서 동시에 부도를 맞았다. 건설에서 복지로 정책이 바뀌자 부도가 났다하면 건설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제수씨에게 부도를 맞았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사무실 경리업무와 배차를 맡고 있는 여동생이 나섰다. 덤프트럭을 한 대 팔자는 것이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차를 파느냐가 문제다. 사무실 문을 닫지 않는 한 덤프트럭이 한 대는 있어야 한다. 그건 설거지 장비다. 돈이 되건 적자가 가던 포클레인을 굴리려면 한 대는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경기가 안 좋아 중고차 값은 나날이 떨어지는데 안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라는 사실을 아는 여동생이 시키지 않았지만 어느 날 오후에 대구로 내려가서 제 올케를 만나고 왔다. 오빠 덤프트럭을 팔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어느 오빠를 말하는 거야?
괜히 여동생에게 역경을 냈던 그날이 떠오른다.
막상 차를 팔려고 보니 건설경기를 감안한 시세가 떨어져 살 때의 가격 칠할 정도에 시세가 머물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정보가 워낙 빠삭해서 무슨 기종, 몇 년 식이라고 하면 중고 매매센터에서 바로 얼마라고 가격이 나온다. 거기서 차량 상태와 타이어상태를 고려해서 몇 십 만원이 흥정으로 오르내리는 정도다. 다음 날 바로 덤프트럭 매매센터에 넘기고 통장으로 들어온 차량가격에 얼마를 보태서 제수씨 통장으로 날려주고 짐을 벗었다.
울화통이 터져서 배차가 어떻게 되던 사무실을 박차고나가서 만만한 권 박사를 불러내서 메기 매운탕과 한잔 진하게 하고 노래방엘 갔었다. 참으로 몇 년 만에 찾아보는 노래방이었다. 흘러간 가요를 처량하게 부르는데 볼에 뜨거운 액체가 타고 내렸다. 손바닥으로 훑어보니 눈물이었다. 옆에 있는 권 박사보기가 면구스러워 마이크를 던지고 술만 마시다가 취해서 돌아왔다. 잔뜩 취해서 옷도 벗지 못하고 잤는데 자다가 갈증이 나서 깨어보니 짐을 벗은 게 아니라 마음의 짐이 더 크게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 할망구가 빨리 죽어야 될 텐데........
자다가 깬 내 입에선 얼토당토않게 이상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할망구란 다름 아닌, 제수씨의 친정어머니, 나에게는 사돈어르신을 말하는 것이다. 벌써 십오 년 전에 풍을 맞아 절룩거리며 여태 제수씨의 등골을 뽑아먹고 있는 것이다. 등골을 뽑아먹는다는 표현은 좀 과할지 모르나 내가 그날 술이 덜 깬 기분으로 느끼기에는 그랬다.
제수씨는 사촌도 없는 무남독녀다. 바깥사돈은 오 년 전쯤 돌아가셨다. 그때 장례를 치룰 적에도 내가 앞장을 섰다. 사위인 동생은 상주노릇을 하고 나는 장례집행위원장노릇을 도맡았다. 손님들 음식부터 장지까지, 장례를 치루는 동안 사흘을 빈소를 지키며 모든 일을 내가 처리했다. 안사돈이 돌아가시면 동생이 없으니 그 정도가 더 심할 게다. 나는 동생이 죽고 유골함을 안고 장지로 이동하는 차에서 동생의 유골함을 쓰다듬으며 수도 없이 얘기했다. 너희 장모님을 어서 데려가라고. 제수씨가 듣는데 버젓이 그 말을 했다. 그 길만이 제수씨가 살길인데 그 안사돈은 명줄이 오지게도 길어서 아직까지 대구의 동생 집 부근의 요양소에서 새벽마다 절룩거리며 재활운동을 하며 제수씨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그 안사돈의 존재도 동생이 없는 나에게는 보통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이곳 미얀마에 있어도 그 안사돈이 어떻다고 급하게 전갈이 오면 바로 날아가야 할 형편이다. 제수씨를 생각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코끼리 탑을 얘기하다가 엉뚱한 얘기가 길어졌다.
지난봄에 코끼리 탑이란 말을 들었으나 까맣게 잊고 한 달을 한국에 머물다가 미얀마로 나와서 진척이 느려터진 현장을 둘러보며 짜증만 내다가 공사하도급 계약을 한 건 하고 보름정도 머물다가 우기가 닥치는 걸 보고 들어갔다. 그 때 들어갈 적에는 검은 참깨와 꿀을 몇 병 사갔다. 꿀은 미얀마 꿀이 한국의 좋다는 꿀보다 품질로서는 한 수 위다. 한국 양봉업자는 겨울에 꽃이 없으니 벌에게 설탕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치인데 여기는 사시사철 꽃이 있으니 벌에게 인위적으로 설탕을 먹일 일이 없다. 우기라도 매일 비가 오는 게 아니다. 벌은 비가 오는 동안 벌통에 비축해놓는 꿀을 먹다가 날이 개이면 금세 꽃을 찾아 꿀을 따다 나른다. 꿀의 질은 며칠 꿀 병을 화장대 위에 얹어두면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다. 한국의 꿀은 며칠 그렇게 두면 가라않는 뿌연 물질이 생기는데 그건 설탕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미얀마 꿀은 아무리 오래 두어도 그런 부유물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날 꿀 병을 챙기고 가방을 꾸리면서 조차도 제수씨가 말했다는 코끼리 탑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밤중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들어가서 내가 사는 도시로 내려가는 공항리무진을 타고 졸다가 집에 도착하면 다음날 점심 무렵이 된다. 기내식으로 나오는 아침이 시원찮아서 항상 점심부터 챙긴다. 내가 점심을 먹는 동안 들고 들어간 캐리어를 정리하던 아내는 참깨를 여러 봉지로 나누어 담았다. 이건 누구네 주고 저건 누구네 주고. 항상 그런 식으로 이웃과 갈라먹던 참이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꿀 한 병에 검은 참깨 반 되 정도. 그렇게 몫을 지우던 아내가 마지막으로 읊조린 말이 ‘이건 당신이 껌뻑 죽는 당신 제수씨 주고’ 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아내는 생각났다는 듯이 코끼리 탑을 왜 안 사왔냐고 물었다. 밥을 입에 물고 대꾸를 했다.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코끼리 문양이 새겨진 탑을 말하는 거야?
-나도 말만 들었지 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껌뻑 죽는 제수씨가 내일 온다고 했으니 직접 물어보세요.
-껌뻑 죽긴 뭘 껌뻑 죽어? 당신한테 껌뻑 죽지.
-밥알 튀어요. 열 내지 마세요.
제수씨에게 껌뻑 죽는 게 아니라 애처로워서 그런다, 당신은 애처롭지 않느냐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 않고 밥을 먹으며 물었다.
-제수씨가 내일 왜?
-누구 결혼식이 있나 봐요. 아무튼 내일 들른다고 했어요.
제수씨는 처녀 적부터 알고 있던 사이다. 물론 아내도 제수씨가 처녀 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내가 중매한 거나 다름 아니다. 우리 내외가 신혼 초부터 다니던 강 건너의 작은 암자가 있다. 백 년이 넘은 고찰인데 불구하고 규모는 크지 않은 조용한 절이다. 그 절의 진입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연을 맺었으니 벌써 삼십오 년이 넘는다. 당시에 진입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던 포클레인 기사인 내가 굳건히 그 절을 다녀 지금은 아내를 그 암자의 신도회 회장사모님으로 만들었으니 짧은 세월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제수씨도 처녀 적에 신심이 깊은 어머니를 따라 그 암자에 꾸준히 왔다. 절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얼굴을 보며 같이 차를 마시고 이름정도는 알고 있던 처녀였다. 애경 씨였다. 본명은 따로 있지만 그 때는 몰랐고 절에서는 아명인 애경이로 불리어졌다.
총각 선생인 동생을 생각하며 내가 애경 씨에게 마음을 품은 건 진달래가 곱게 핀 전라도의 어느 절에 성지순례를 가서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경내를 돌고 있는 조용한 처녀, 유심히 관찰을 했지만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행동거지나 말을 함에 있어서 조용하고 어디를 보아도 허식이 없으며 품행으로 미루어 가정교육에 똑 바로 각이 잡힌 처녀였다. 내가 관심을 보이며 주지스님께 애경 씨가 뭐하는 처녀냐고 묻자 어느 초등학교 서무실에 근무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스님에게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애경 씨에겐 잘 어울릴만한 동생이 있다는 말을 했다.
-애경이가 무남독녀인데 맏이가 아니니 다행이네. 한번 만나게 하지.
애경 씨가 무남독녀라는 걸 그 때서야 알았고 스님은 이미 신랑감의 자격요건을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옆에서 그 말은 들은 아내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바로 행동개시였다. 007 작전의 첩보처럼 민첩했다. 절간을 거니는 애경 씨에게 동생 얘기는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착 달라붙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현상해서 시동생에게 먼저 보여주고 동생의 사진을 받아다가 애경 씨에게 보여주고 주선을 했다. 그 모든 일은 스님 허락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 중매를 한 사람이 스님인지 아내인지 아직까지도 모호하다. 아니다. 중매를 한 사람은 스님이 분명하다. 녀석이 부부싸움을 하면 스님에게 전화를 해서 뭐 이런 사람을 중매했느냐고 장난삼아 불평을 했다고 들었다. 녀석도 죽기 전까지 그 암자에 다녔고 죽고 나서 옷을 태우고 천도를 올린 곳도 그 절이다.
아무튼, 동생이 없는 제수씨를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꿀과 참깨의 몫을 지으며 하는 아내의 말에 의하면 다음날 제수씨가 오는 건 분명한데 그게 숙제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수씨는 나를 보면 밝은 미소를 짓는다. 내 애간장을 생각해서 밝은 표정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티가 역력하다. 하여 제수씨가 온다는 전갈을 받으면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다음날 괜히 커피만 축내며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제수씨가 왔다. 사무실에 온 게 아니라 집으로 왔다. 집과 사무실이 아래위층으로 붙어있어 집에서 아이들이 통닭만 시켜도 사무실에서 알고 여름날 사무실 문을 열어두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려가는 것까지 알 수가 있다. 집으로 올라간 제수씨는 동서 간에 붙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체 내려오지 않았다. 집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잘못 보았나 싶어 마당을 내려다보니 제수씨의 차가 서있었다. 그 차도 내 주관 하에서 바꾼 것이다. 동생이 살아있을 적부터 타고 다니던 경차가 고속도로에서 두 번이나 고장이 나서 견인했다는 말을 듣고 경차를 날리고 소형차로 바꾸었다. 물론 제수씨가 돈을 냈지만 기종과 년 식은 내가 인터넷으로 가격이 만만한 중고차를 고르고 경차를 적당한 가격에 처분했다.
창가에 서서 차를 보고 있으니 제수씨가 아내를 대동하고 내려왔다. 인사만 하고 바로 내려갈 차림새였다. 내가 인사치레로 물은 점심은 예식장에서 먹었다고 했다. 코끼리 탑이 도대체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제수씨는 설명했다.
-나무로 깎은 것인데 코끼리가 코끼리를 업고 그 코끼리가 또 코끼리를 업고 있는 것 말예요. 그렇게 다섯 마리로 탑을 만든 것이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파고다를 수 없이 다녔고 파고다마다 있는 기념품 가게에 목각 조형물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그런 물건을 본 적은 없다.
-그런 물건은 못 봤는데......... 어디서 그런 물건을 보았어요? 미얀마에서 샀다고 합디까?
-어느 절에서 보았는데 미얀마에서 샀다고 했어요.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분명히 미얀마에서 샀다고 했어요. 미얀마를 다 뒤져서라도 사다주세요. 정 안되면 주문 제작을 해서라도 만들어 오세요.
제수씨는 단호하게 말을 하고는 계면쩍은지 웃었다. 제수씨가 웃는 모습을 보면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알았습니다. 미얀마를 다 뒤지죠.
제수씨는 잠시 사무실에 들렀다가 꿀과 참깨 봉지를 들고 내려갔고 나는 한 달간 현장을 돌아보며 일을 하다가 다시 미얀마로 나왔다.
미얀마로 나오니 예상대로 우기가 시작되어 있었다. 매일 한두 차례씩 비가 오는데 이 기간이 거의 오 개월이다. 우기에 기초공사를 시작하면 물 퍼내다가 하 세월 다 보내니 기초공사는 아예 시작을 하지 않고 기초가 끝난 현장은 하늘의 눈치를 봐가며 조금씩 공사를 하지만 진척이 엄청 더디다. 더딘 현장을 속을 끓이며 돌다가 제수씨의 부탁인 코끼리 탑이 생각났다.
빨리 구해야 한다. 주문을 하더라도 빨리 해야지 이번에 들어갈 적에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가서 구하나 망설일 필요도 없이 거바예 파고다를 정했다. 아무래도 양곤에서는 거바예 파고다에 가야지 그런 물건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파고다에는 깎아놓은 조각품을 파기만 하는데 반해 그곳에서 조각품을 직접 깎는 장인들이 목각 공예품 가게마다 있다. 사무실 안에 걸린 현판도, 책상 앞에 놓인 명판도 그곳에서 주문제작을 해서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가게도 있다. 없으면 그 가게에 주문이라도 해야 한다.
양곤은 파고다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불교국가라 당연한 이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고다를 찾아가서 기도를 하고 저녁거리 시장을 봐서 돌아간다. 부처님 사리를 모신 거바예 파고다가 좋은 점은 넓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다. 주차료 이백 원만 내면 차를 하루 종일 세워놓아도 무방하기에 그 부근에 볼일이 있으면 가끔 거바예 파고다 주차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 혼자 다니다가 점심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으면 그 파고다에 가서 차를 세우고 상가 식당에서 샨카욱쉐라 불리는 쌀국수로 점심을 때우기도 한다.
거바예 파고다로 가서 차를 세우고 들고 다니기 귀찮은 슬리퍼는 차안에 벗어두고 맨발로 나섰다. 양곤의 아니, 미얀마의 모든 파고다는 신발을 신고 들어가지 못한다. 양말이나 스타킹도 허용하지 않는다. 무조건 맨발이라야 하고 반바지나 짧은 스커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곤에 있으면 현지인들처럼 발가락 슬리퍼를 자주 신게 마련이다. 맨발로 자주 가던 가게에 가니 주인이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물건을 주문하러 왔나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주인에게 설명을 했다.
-앨리펀트 업 앨리펀트 실라?
영어와 미얀마 말을 혼합해서 설명했지만 고개만 갸웃할 뿐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그럴 땐 말보다 보디랭귀지를 동원해야 한다.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는 목각코끼리를 들었다. 한 마리 위에 또 한 마리를 얹고 또 한 마리를 얹으려는 찰라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 앨리펀트 타워?
앨을 강하게 발음한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았던지.
-시래!(있다!)
대답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진열대 밑에 있는 좁은 공간을 뒤지더니 먼지가 잔뜩 묻은 조각품을 하나를 꺼내서 솔로 먼지를 대충 털어서 내밀었다. 그렇게 궁금해 하던 코끼리 탑! 일명 앨리펀트 타워였다. 딱 팔뚝 크기였다. 받아들고 훑어보니 연화대 위에 코끼리가 여섯 마리 정교하게 조각된 작품이었다. 얼마를 주면 되냐고 묻자 그런 물건은 팔아본 지가 오래되었는지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얼마를 달라고 했다. 내가 부른다고 다 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주인은 안다. 현판과 명판을 깎을 적에 거래를 해보아서 알고 있다. 얼마를 깎고 적당한 가격에 샀다.
거바예 파고다에는 그 집이 아니라도 직접 목각을 깎는 곳이 대여섯 군데 있다. 그 집을 샅샅이 다 돌며 비닐봉투에 든 앨리펀트 타워를 보여주며 같은 물건이 있냐고 물었다. 모두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집에 가니 점원이 아가씨였다. 비닐봉투를 보여주며 있냐고 묻자 진열대 뒤에서 코끼리 세 마리가 조각된 작품을 내밀었다. 그것도 샀다. 또 한 집에 가니 묻기도 전에 나무 기둥에 앨리펀트 타워를 철사로 묶어 걸어둔 것이 눈에 띄었다. 칠은 하지 않았지만 먼저 산 것들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참했다. 헤어보니 코끼리가 일곱 마리 조각된 작품이었다. 얼마를 주면 되겠냐고 물으니 가게를 지키던 작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주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통화가 안 되는지 폴더를 닫고 그것을 꺼내더니 작품을 줄자로 재고 있었다. 가로를 재고 세로를 재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 자식은 무슨 계산을 이렇게 해?
계산기를 두 번이나 두드린 작자는 십만 짯을 달라고 했다. 턱도 없이 비싼 가격이다. 계산기를 두드려서 할 것 같으면 뒤에 있는 목각불상은 크기로 미루어 백만 짯이 넘고 앞에 진열해놓은 손가락만한 목각은 천 짯도 안되겠네. 계산하는 방식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 사고 싶은 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손가락 여섯 개를 펴 보이며 육만 짯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흥정이 안 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이미 미련을 접고 했던 말이다. 한 번 웃어주고는 그 가게를 나와 천천히 다른 가게를 둘러보며 계단을 내려왔다. 거바예 파고다 진입로 계단에는 가게가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다. 옷가게부터 엑스서리, 꽃, 귀금속, 잡화, 간식 코너 등 없는 게 없고 사람들은 언제나 붐빈다. 빼곡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게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입구로 나오니 언제 나왔는지 좀 전에 흥정을 하던 작자가 서서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그 물건을 육만 짯에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가게 주인과 연락이 닿아 한소리 들은 모양이다.
팔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그렇게는 못 사지.
뜸을 들이다가 오만 짯을 주겠다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그 작자는 주인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다시 인파 틈을 비집고 올라가 그 물건을 처음 호가의 반값에 손에 넣었다.
숙소에 와서 앨리펀트 타워 셋을 문갑위에 진열해놓고 자니 밀린 숙제를 마친 것처럼 꿈자리가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미얀마에 있는 앨리펀트 타워를 싹쓸이 한 것이지 싶다. 그게 일주일 전이다. 아침저녁으로 방을 드나들 때마다 눈길은 그 앨리펀트 타워에 머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칠을 하지 않은 것과 퇴색된 것이 눈에 껄끄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칠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참에 어제 페인트 가게를 만난 것이다.
어제 저녁 무렵에 대대적인 페인팅 공사를 하고 새벽에 나오니 아직 현관에 산화제 냄새가 난다. 손가락은 딱딱하고 쪼글쪼글해졌지만 군 시절에 곡사포에 윤이 나도록 국방색 칠을 하고 검열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정 안 되면 주문제작해서라도 만들어 오세요.
제수씨의 목소리가 귀에서 풀어지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나도 모르게 줄담배를 피우며 제수씨를 생각하다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을 부팅시켜 한국을 읽기 시작했다. 타이틀을 읽어내려 가는데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우중충하다. 우울한 뉴스가 없는데도 모니터에 눈길을 주고 있는 기분이 우울한 건, 칠을 한 앨리펀트 타워가 제수씨의 기분을 얼마나 상쇄시켜 줄까를 더듬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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